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자선을 베풀어라.(루카11,37-41)
제1독서<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지 않았습니다.>(로마1,16-25)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화답송>시편19,2-3.4-5ㄱㄴ(◎2ㄱ)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16-25)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 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8)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타락상과 믿음을 통한 의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안에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1장 32절까지는 본론의 도입부로서 타락한 이방인들의 범죄와 하느님의 유기(버리심)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로마서 1장 18절은 불경건한 이방인에 대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진노'로 번역된 '오르게'(orge; the wrath)는 본래 '자연스러운 충동', '기분', '천성', '기질'등을 의미했는데, 점차 '강한 내적 열정을 나타내는 격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구약에서 '오르게'(orge)는 불의에 대해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묘사하는데 쓰였으며,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느님의 '오르게'는 죄에 대해 그분께서 나타내시는 반응이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정당한 분노라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관점이다.
그는 로마서 1장 18절에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임을 강조한다. '하늘에서부터'로 번역된 '아프 우라누'(ap' uranu; from heaven)에서 전치사 '아프'의 원형 '아포'(apo)가 나타내는 것은 어떤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진노가 시작되는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인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거처, 즉 옥좌(보좌)로 인식되었으며(마태23,22 ; 사도7,55), 비유적으로는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하느님과 동의어로 나타나기도 한다(루카15,18.20).
따라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은 죄인들이 결코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없음에 대한 경고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피할수 없는 진노는 '모든 불경(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난다. 여기서 '불경'에 해당하는 '아세베이안'(asebeian)의 원형 '아세베이아'(asebeia; godlessness; ungodlines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예배하다'라는 뜻이 있는 '세보마이'(sebomai)의 합성어로서 '예배하지 않음','신(神)을 믿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상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을 가리키며,'불의'의 발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의'로 번역된 '아디키안'(adikian)의 원형 '아디키아'(adikia; nrighteousness; wickedness)는 이처럼 '경건치 않은', '불경(不敬)한' 자들의 당연한 결과로서 '부도덕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즉 '알레테이아'(alletheia; truth)는 문맥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명백히 계시된 하느님의 업적과 자취이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바로 바른 삶임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불의'(아디키아)로 억누르고 있어서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억누르는'으로 번역된 '카테콘톤'(katechonton; hold; suppress)은 '~을 하지 못하게 억누르다','막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테코'(katecho; 루카4,42; 2테살2,6.7; 필레몬1,13)의 현재 분사로서, 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버릴 수 없어서 명백히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억눌러 불의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자들에게는 당연히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이것은 '나타나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칼륍테타이'(apokallyptetai; is being revealed)가 계속됨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로 쓰였다는 데서 암시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노가 최종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하게 나타나지만, 지금 현 시점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공의(정의)의 속성이 범죄를 방치할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범죄하는 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자선(慈善)을 베풀어라
복음 (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 율법(律法), 옛 계약의 집에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심이다. 곧 하늘의 용서(容恕), 생명(生命)께서 들어 앉으심 이다. 구원(救援)의 모습이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 율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함이다.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 계명을 열심히 지켰던 사람이기에~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만드실 때 속에 담긴 것?,
(창세2,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우리 속에 하느님의 생명, 숨이 있음이다. 그 하느님의 숨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킨 인간의 의(義)로 존재할 수 앖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욕망(慾望)을 위해 뱀(사탄)의 거짓말을 먹었듯,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한 삶, 신앙(信仰)을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숨, 생명의 자리에 죽음인 탐욕(貪慾), 사악(邪惡)이라는 더러움이 차 버렸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 어둠 속에 갇힐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숨,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곧 구원을 위한 자선(慈善)을 베풀어라 하심이다.
우리 속에든 더러운 죄(罪)를 깨끗이 씻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사람, 새 것으로 새 창조하실 하느님의 새 계약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진리(眞理)로 주는 것이다. 그것이 참 자선이며 이웃 사랑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내 뜻, 소원을 들어 주시는 주님으로 보고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라고 이웃에게 전(傳)해주면 자신과 이웃 모두 자신들 속에 남아있는 더러움 때문에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으로 없애시기 위해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 힘없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명, 구원의 길, 진리로 전해주면 모두가 깨끗해져 영원한 빛으로 들어갈 수 있음이다.
(1베드3,20-21)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 우리의 죄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이다. 곧 약속(約束)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더러운 양심이 씻겨, 바른 양심이 되었음을 청(請)하여 찾는 것이다.
(예레31,33)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시작하시고 끝맺으신다. 우리의 소원, 욕망을 위한 제사(祭祀)와 윤리(倫理)의 신앙을 멈출 때, 버릴 때....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 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 물은 진리의 성령(聖靈), 새 계약의 피, 생명수인 말씀이다. 우리의 구원이다.
(갈라5,6)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믿음을 위한 사랑의 행동이다. 곧 이웃사랑이다. 우리에게는 이기적(利己的)사랑이 있을 뿐이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어줄 사랑이 없다. 곧 십자가의 대속,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어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리로 마음에 새겨, 마음에 지키게 하는 그 행(行)함, 행동(行動)을 말함이다.
그것이 이웃을 나자신처럼 사랑하는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은총,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이 아닌,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것이 됨을 깨닫고 믿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봉헌,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를 꾸짖으시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어떤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고 새로운 사건이 시작됨을 알려 줍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손 씻기를 규정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유다교 전통에서 중요한 관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손 씻기는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표지이자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는 관습을 벗어나는 행동은 손님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리사이는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에 바리사이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들은 손 씻기와 같은 제의적 정결에 관심을 쏟았지만,
외적 행위를 내면의 상태와 일치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용하는 잔과 접시는 깨끗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릇의 겉을 씻는 정결 예식을 강조하고 내면의 더러움을 감추려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선의 실천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 행위로 탐욕과 악을 씻고 하느님 앞에서 정결한 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규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되돌아보도록 요청합니다.
바리사이의 율법 이해와 적용은 우리에게 부정적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땅은 나를 위해 살라하고, 하늘은 너를 위해 살라 하신다.
복음 (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율법)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 하늘(빛)이 땅(어둠)에 내려앉으신, 곧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음을, 하늘에서 찾아내려 오심을 다시 보여주심이다. 율법(律法)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용서, 생명,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속(代贖)으로 완성하신, ‘다 이루신’ 진리(眞理)의 주님이시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 깨달음이 아닌, 자신을 위한 율법(律法)의 의로운 행위(行爲)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 진리를 싫어한다.
(마태6,1)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갈라5,4)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 의로운 행위는 많이 하지만 자기자랑, 자기이름,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탐욕, 사악한 마음으로 앞 35절에서 어둠의 빛이라 하신 것이다.
(루가11,35) 35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법)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율법지킴, 탐욕, 사악함, 그 속셈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를 살리시기 위한 드러내심이다.
(히브4,12-13)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 사람(아담)이 죄를 짓고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이 자신의 죄,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어린양을 죽이시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셨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자신의 열심(熱心), 의로움은 죄를 가리지 못하는 벌거숭이 일 뿐이다.
영원한 용서(容恕), 생명을 주는 하늘의 대속(代贖), 그 하늘의 의로움을 주지 못하는 땅의 의로움은 벌거숭이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깨달아야) 셈을 할 수 있다. 율법(제사, 윤리)의 의로움과 인간들의 계명에 의한, 척(擲)하는 그 스스로의 의로움은 개짐(걸레, 똥)일 뿐이다.
(1요한1,9) 9 우리가 우리 죄(탐욕)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의롭게) 해 주십니다.
(로마3,23-25)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 대속, 그 사랑의 힘인 용서를 믿기에~
(이사61,10-11)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 땅에 새순, 생명의 싹이 난다는 것은 땅에 씨가 들어와 죽었기 때문이다. 곧 땅인 우리, 내 안에 예수께서 들어와 죽으심(대속)으로 나(쓴물)에게서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자기 사랑이 아닌, 진리(眞理) 안에서 이웃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1요한3,18)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2요한1,1) 1 원로인 내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인사합니다. 나는 그대들을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1코린10,24) 24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
(공동번역성서) 24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도모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힘을 주소서, 아버지의 뜻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매일 미사책 사제의 묵상글로 마무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조되는 이미지들을 보여줍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겉과 속, 탐욕과 자선’이 그것입니다.
바라사이들이 적용하는 율법은 외적인 모습에만 적용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함(바름)과 부정함은 손을 씻었는지, 잔과 접시는 깨끗한지, 먹으려 하는 음식이 정(定)한자, 부정(不定)한지가 중요하였다.
자연스레 율법은 하나의 기준 만을 제시하였다. ‘맞고 틀림, 합당과 부당, 정함과 부정함’을 나누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에 율법을 완성하려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본질(진리)을 기억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이 내면을 향하고 마음을 움직여 내 것 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축복과 구원을 자동으로 가져다주는 장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의무,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하는 주님의 법이 지닌 본질을 잊는다면, 우리의 모습도 바리사이들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나를 죽이는 탐욕의 자리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 (진리로) 앉아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1,37~41)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38~41)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행위는 당시 유대 사회의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으며,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다.
이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사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철저하게 지켜온 규범이었다(마르7,3.4).
사실 식사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지 의식적인 차원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무슨 거룩한 계명인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적 정식을 왜곡한 유대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강하게 책망하시기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식사 전에 손도 씻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 등 거룩하고 고결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왜곡하고, 그 속마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하는 등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기서 '탐욕'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greed)는 '억지로 끌고 가다', '탐심을 가지고 붙잡다'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조'(harpazo)에서 온 말로서 '강탈', '약탈', '착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히브10,34; 마태23,25).
루카복음 16장 1~13절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끝난 다음에 바로 루카복음 사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16,14)이라고 하면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는 바리사이들이 돈에 대한 탐욕으로 '과부들의 가신을 등쳐' 먹는 행위까지 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속마음은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악'에 해당하는 '포네리아스'(ponerias; wickedness)는 '악한 성품의', '타락한'이라는 뜻을 지닌 '포네로스'(poneros)에서 유래하여 '시기심', '악의'(로마1,29)를 의미한다.
루카 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되찾은 이들의 비유'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큰 아들은 분명히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실과 또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잔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루카15,28).
이처럼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지독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과 시기심으로 인해 그들이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바리사이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적 행위만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꾸미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내면세계도 아름답게 보아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아프로네스'(aphrones; you foolish people)는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을 뜻하는 '아프론'(aphron)의 복수 호격이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과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고,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자칭 타칭 의인이요, 존경받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겉 뿐만 아니라 속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 형식 준수를 통해 겉만 거룩하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1장 41절의 '속에 담긴 것'에 해당하는 '타 에논타' (ta enonta; what is inside)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음식, 마음, 재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루카복음 11장 39절의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그런 탐욕과 사악의 마음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기에 그런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에서 부정한 재물을 되돌려 줄 뿐 아니라, '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alms)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는 말씀은 자선의 결과 그들 자신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판타'; panta; all thing; everything)은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는 죄의식을 비롯한 하느님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선하게 되면, 재물을 옳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가 그들을 더러운 탐욕과 사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찬우 다두 신부)
여러분은 어떻게 식사합니까? 인상을 쓰거나 울면서, 아니면 짜증 내면서 식사합니까?
사실 먹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로써 우리의 생명을 얻고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은 그와 함께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뜻입니다.
나의 밥,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음식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식사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손을 씻으시지 않는 것을 보고는 놀랍니다.
그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나누는 식사보다도 율법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살다 보면 자신만의 원칙들이 생겨납니다. 이 원칙들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올바른 삶을 꾸려 가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을 생명을 나누는 일로 소중히 여기기보다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들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 원칙이 사랑에 기초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남을 위해 써라’
독서(로마1,16-20)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과 신성인 사랑, 그 크신 힘을 갖은 하느님의 창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매 순간 사랑이신 하느님의 품속에서 그분의 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창세2,7)으로, 곧 아버지의 생명으로 숨 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입당송>“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과 독생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노라.”(갈라2,19-20)
<화답송>(시편19,2) 2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복음(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바리사이 이기에 놀랐던 것이다. 곧 자시의 의(義), 영광, 자신이 바라고 바랬던(에삐뚜미아- 탐욕) 것을 위한 신앙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현세의 것을 위한 신앙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곧 자신의 욕망을 위한 열심한 활동과 기도하는 삶이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속에 담긴 것, 곧 하느님께 자신을 위해 바라고 바랬던 것들을 ‘남을 위해 써라’는 말씀이다.
(필리2,3-4) 3 무슨 일이든 이기심(탐욕)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마태18,10)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더 잘 돌보라’ 하심이다.
(1코린12,12.20.23-27)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성령님!
저희 모두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품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의 아픔을 보게 하소서. 하느님의 사랑, 용서의 힘인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