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 (루카10,13-16)

2025. 10. 2. 오전 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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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3일 금요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 (루카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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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바룩1,15-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화답송>시편79,1-2.3-5.8.9(9ㄴㄹ)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 유산의 땅에 쳐들어와,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나이다. 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땅 위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주었나이다.

그들의 피를 물처럼, 예루살렘 둘레에 쏟아부었건만, 묻어 줄 이 아무도 없나이다. 저희는 이웃에 우셋거리가 되고, 주위에 비웃음과 놀림감이 되었나이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진노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의 격정을 불태우시렵니까?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 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복음<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10,13-1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제1독서 (바룩1,15ㄴ-22)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바룩서는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을 통해서 전해졌다. 히에로니무스는 유다인들이 읽지도 않고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이유에서 바룩서를 라틴어로 옮기지 않았다.

히브리어로 '바룩'은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다.

 

6장의 예레미야의 편지를 빼고는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바룩은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며, 동시에 예례미야의 비서 겸 제자요 친구로서, 예언자의 삶과 신탁을 후대에 전해 준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와 저작 연대와 집필 장소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문의 정보가 신빙성이 없어서 바룩서의 저자는 바룩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작품으로 본다.

 

작중연대는 바빌론 유배 기간이지만, 주요 부분의 저작연대는 이르면 유배 이후 시대부터 늦으면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200-60년)까지 폭넓게 생각한다.

집필장소도, 바룩서의 원문이 히브리어로 쓰였고, 그 내용이 바빌론 포로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권고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티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바룩서는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1장 1-14절은 도입부로서 저자나 저술 장소와 시기, 저술 상황을 밝힌다.

둘째, 1장 15절-3장 8절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

세째. 3장 9절-4장 4절은 지혜와 율법에 관한 성찰이다.

네째, 4장 5절-5장 9절은 유배의 신학적 반성과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다섯째, 6장의 예례미야 편지는 예례미야가 바빌론으로 유배살이를 하러 떠나는 포로들에게 써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 독서 1장 15ㄴ-22절은 바로 둘째 부분에 해당되는 산문으로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 저자는 여기서 신명기 신학을 전개한다.

곧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하고(1,15-2,12),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한다(2,13-3,8). 과거에 대한 반성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중점을 두고, 간절한 청원은 현재 바빌론 유배 상황에 촛점을 둔다.

 

이스라엘은 과거 이집트 탈출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역을 일삼았다. 그 결과 모세를 통하여 주님께서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신명기27-30장)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재앙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이다. 하느님은 자애롭고 공정한 분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하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 대신 그 땅의 잡신들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경고를 듣지 않아 결국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애가에서처럼 제 자식의 살을 먹는 끔찍한 상황을 언급한다(2,3; 신명28,53-54참조).

이스라엘은 이제 공정하신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분의 자애에 매달릴 뿐이다(3,1-2).

 

이같은 신명기적 신학사상과 관련하여 바룩서의 저자는 세 가지 점을 부각시킨다.

 

첫째, 유배의 진정한 의미이다. 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이름과 계약을 다시 기억하고, 자신들의 죄악에서 유일한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둘째, 토라(모세오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은,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지혜의 샘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토라를 저버린 탓이다. 바룩서는 토라를 소유한 이는 다른 지혜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세째, 바룩서의 저자도 애가의 저자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인격화한다. 다만 애가는 시온(예루살렘)을 딸로 표현한 데 반해, 바룩은 홀어미를 표현한다. 이 홀어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자식들마저 낯선 땅으로 떠나 보내고, 지금 큰 슬픔에 잠겨 있는데, 바룩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낯선 땅에서 돌려보내시리라고, 절망에 빠진 홀어미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들어 올리시고, 정의와 평화와 거룩함의 새로운 소명을 주실 것이라 선언한다(5,3-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 분을 거역했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바룩 1,15ㄴ-22참조)

 

오늘 복음 루카 10장 13-16절에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도시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신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도시들의 모습은, 바로 내 자신과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교회와 사회와 나라와 이 시대에 적용하면 영신적으로 무난하다.

복음의 세 도시는 라삐들의 종교교육이 성행하고, 상업이 번창했던 부유한 도시였다. 그러나 오만과 자기식의 의, 고집과 자기도취에 빠져,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시며 사랑을 쏟았건만, 주님 말씀에 귀를 막고 돌아오지 않아, 지금 나무람을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평소 생활은 어떤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계시켜 묵상해 볼때, "돌아오라 ~~사랑한다~~" 외치는 기도 공동체 성가 386장 "주의 성심을 바라 보아라" 의 가사가 절절히 들리는 듯 하다.

회개하도록 외치시며 사랑을 쏟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 자신이 거역했을 때, 그 사랑은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로, 다른 공동체로 흘러감을 알아야 한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파견되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줍니다.

16절은 파견되는 제자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를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이에 따르면 파견 받는 이는 파견하는 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여야 하는데예수님께서 당신을 파견하신 분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13절과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역에 속하는 마을들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코라진벳사이다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능력과 기적 행위를 체험한 마을입니다(4,23; 9,10; 7,1 참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행하신 활동을 회고하시면서 회개하지 않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하여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코라진벳사이다카파르나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놀라운 행위를 목격하였지만 믿음을 거부하였고반면에 예언자들에게 비판을 받아 온 이교도 마을 티로와 시돈의 주민은 참회하면서 변화를 위하여 힘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펼치신 갈릴래아 지역과 이방인 지역 마을의 비교는 이방인 선교를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회개하지 않았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면우리는 회개하고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말씀을 한자 한자 읽고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독서(바룩1,15-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 다른 신(神)들이란 없다.(요엘2,27참조) 하느님의 뜻,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마음, 생각에서 나온 내 뜻을 위해 살려는 우리 자신이 악(惡)이며 다른 신(神)이다.

 

모세를 통해 경고하신 말씀을 보자. 한 말씀 한 말씀을 곱씹어보자.

(신명8,1-20) 1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여라그러면 너희가 살 수 있고 번성할 것이다그리고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며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광야40년은 우리 전인생을 뜻한다)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하느님의 계명 지킴은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것, 사는 것이다)

이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해진 적이 없고너희 발이 부르튼 적이 없다. 5 너희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단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아 두어야 한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그곳은 물이 흐르는 시내와 샘이 있고골짜기와 산에서는 지하수가 솟아나오는 땅이다. 8 또 밀과 보리와 포도주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9 그곳은 너희가 모자람 없이 양식을 먹을 수 있고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땅이며돌이 곧 쇠이고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 10 너희는 배불리 먹고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 때문에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11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고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계명과 법규와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2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들을 짓고 살게 될 때, 13 또 너희 소 떼와 양 떼가 불어나고 너희에게 은과 금이 많이 생기며너희가 가진 모든 것이 불어날 때, 14 너희 마음이 교만해져너희를 이집트 땅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15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너희를 위하여 차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시다. 16 또 그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몰랐던 만나를 너희가 먹게 해 주신 분이시다그것은 너희를 낮추고 시험하셔서 뒷날에 너희가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18 그러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19 만일 너희가 정녕 주 너희 하느님을 잊고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한다면내가 오늘 분명히 경고하는데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20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주님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처럼 너희도 멸망할 것이다.”

= 다른 신(神), 마음이 교만(驕慢)해져서 하느님의 뜻,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마음, 그 악한 생각(生覺)에서 나온 인간(人間) 자신의 뜻을 위해 살려는 다른 신의 성전(聖殿)이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성전, 신앙)이다.

 

복음(루카10,15-16) 15 “너 카파르나움아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으로 당신 아드님을 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0, 13~16)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14)

 

'코라진'(chorazin)은 '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오늘날 발견되는 유적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라진'은 예수님의 초기 활동 지역이었던 '카파르나움'(Capernaum)에서 약 3km 이내에 인접한 도시였다.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벳사이다'(Bethsaida)는 '어획 장소'(고기잡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동북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성읍이었다. 원래 명칭은 '벳사이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서, 헤로데 필리보 임금이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붙여졌다.

 

이곳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의 고향이기도 했다(요한1,44; 12,21). 특히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곳이었다(마르8,22).

하지만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가장 큰 이유의 배경에는 루카 복음 9장 10~17절의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으며(루카9,11), 또한 황량한 빈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루카9,13~17).

 

이것을 볼 때,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였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과 기적을 베푸신 활동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믿음에는 보잘 것 없어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에 해당하는 '우아이 소이'(Uai soi; Woe to you)에서 '우아이'(uai)는 엄숙한 경고나 고통, 분노 그리고 동정심 내지 연민의 감정이 서려 있는 탄식을 표현하는 의성적 감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심판과 보복만의 선언이 아니고, 불신앙에 대한 책망 속에는 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안타까운 심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마태15,21; 마르7,24.31),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완고하고 사악함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 선고를 받은 사악한 이방 도시였다(이사23장; 에제26~28장; 요엘4,4~8).

'티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방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티로'는 B.C.2750 년경에, 그리고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서 유명하며,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아모1,9; 요엘 4,4~6)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이사23장; 에제26~28장)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보다 갈릴리의 도시들이 더 사악하고 완고한 곳이라고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티로'(Tyro)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라는 지명을 거론하시면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이 바위보다도 더 마음이 굳어지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비가 와도 조금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바위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루옷'으로 번역된 '삭코'(sakko; sackcloth)는 낙타의 짧은 털과 같은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이며, 흔히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맨 살 위에 바로 입었다(2사무3,31; 1열왕21,2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인 회한(悔恨)을 표현하기 위해 '재'(먼지; ash)를 머리 위에 끼얹거나(애가2,10),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3,6), 재 위에 드러 눕기도 하고(에스테르4,3), 그 위에 뒹굴기도 하였다(미카1,10).

 

이렇게 구약에서 회개의 행위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던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 '티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완고하고 사악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0장 14절에서 '심판 때에'에 해당하는 '엔 테 크리세이' (en te krisei; at the judgment)라는 말로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관으로 재림하셔서(사도17,31; 2베드2,9) 죄악에 대하여 엄격히 심판하시지만, 허락되었던 특혜와 특권을 감안하셔서 더 많이 받은 그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는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도시는 나 자신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하면 된다.

인간이 회개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 대전에 언제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은총과 현세적 축복과 영적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더 큰 내세의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의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불행하여라(루가 10,13-16)

- 유 광수신부-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베싸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치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의 회개를 위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부모가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식에게 "이제 제발 정신차려라. 너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 말은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요, 안타까움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듯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그 화를 끼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 16-17)라고 말씀했지만 아담과 에와는 그 말을 듣지 과일을 따 먹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고통을 겪고 죽어야 했다. 

하느님은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런 희생을 치루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에와가 야훼 하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나의 부모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까지 불행해진다. 즉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내가 회개하면 나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개로 받는 축복이 나만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내 주위에 있는 분들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복을 받는다.

 

다음 글은 신달자 시인의 글이다.

-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계속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의 길 거리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4번이나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즉 물리침으로써 정말 내가 불행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행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되는지 어디 한 번 4 번 말씀을 물리쳐 보라.

 

 

 

 

  

20251003일 금요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이찬우 다두 신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좋아합니다.

모든 일을 빨리하려는 문화 덕에 전 세계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빨리빨리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출세도 빨리하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도 쉽게 빨리 모으고 싶어 복권은 늘 동이 납니다.

차량 한 대가 차선을 위반하면 다른 차들도 줄지어 그 뒤를 따르고, 교통질서는 금세 흐트러집니다.

이런 문화는 자신이 놓인 상황을 눈치껏, 재주껏 해결하라고 우리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정작 자신은 손해를 보지는 않지만 규칙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또한 천천히 노력하는 것의 소중함을 잊게 만듭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 잘되기만을 바라는 태도가 과연 우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면 마음이 편할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주무대인 갈릴래아 호숫가의 도시들입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가장 많이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도 가장 많이 들은 고을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곳이며,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려 내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에 있던 사람들이 왜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토록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도, 그저 하늘 나라에 가고 싶어 하기만 하였지 자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고 되새겨 깨달은 바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각 제자리에 앉는 것이 眞理安息이다.

 

복음(루카10,13-1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너 코라진아불행하여라너 벳사이다야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회개(悔改) - ‘메타노이아’ ☞ 가던 방향(方向)에서 돌아서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코라진베싸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곳이며 티로시돈은 지중해 주변에 있는 도시로 당시 이 두 도시는 이방인들을 상징했고하느님께 심판 받을 도시로도 상징했다.

중요한 것은 어제, ‘나타엘처럼 예수님 쪽으로 돌아옴(회개)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1,47)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집고을성전), 하느님의 말씀 대신 인간 자신들의 노력힘으로 안식처의 집성전을 짓는 카파르나움이다곧 카파르나움은 하느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말을 전했기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신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6ㄴ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사제께서 ~

<성인 예로니모는 평소 꿈꾸어왔던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갑니다그곳에서 여러개의 수도공동체를 건립한 그는 34년 동안 성경(聖經)과 관련된 번역과 저술작업에 몰두했으며 성경에 관련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많은 주해서를 남겨 교회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 공부와 묵상에 우선권을 두라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시오 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성경을 흠모 하시오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을 감싸줄 것입니다성경을 파고드시오성경 안에서 찾으시오거기서 모든 것을 다 얻을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하느님의 지혜도 모르는 사람입니다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삶에 의문이 생길 때난데없는 예기치 않았던 고통이 찾아올 때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억울할 때다른 모든 것 다 제쳐두고 성경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의 지혜진리의 영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깨닫고 믿게 해 주세요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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