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루카8,19-21)

2025. 9. 22. 오후 3: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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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3일 화요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루카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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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하느님의 집을 완공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에즈6,7-8.12.14-20)

7다리우스 임금은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유다인들의 지방관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

8 이제 그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도록 그대들이 유다인들의 원로들을 도와서 해야 할 일에 관하여, 내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왕실 재산 곧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서 받는 조공에서, 지체하지 말고 그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비용을 내어 주어라.

12 나 다리우스가 명령을 내리니 어김없이 시행하여라.”

14 유다의 원로들은 하까이 예언자와 이또의 아들 즈카르야가 선포하는 예언에 힘입어 건축 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명령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와 다리우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건축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15 그리하여 이 집이 완공된 것은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육년 아다르 달 초사흗날이었다.

16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17 이 하느님의 집 봉헌식에는 황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이스라엘의 지파 수에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다.

18 그런 다음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을 저마다 번별로 세우고 레위인들을 저마다 조별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19 돌아온 유배자들은 첫째 달 열나흗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20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일제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돌아온 모든 유배자와 동료 사제들과 자기들이 먹을 파스카 제물을 잡았다.

 

<화답송>시편122,1-2.3-4ㄱㄴ.4ㄷㄹ-5(1)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복음<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에즈6,7-8.12ㄴ.14-20)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16)

 

에즈라기 6장 13-15절은 다리우스 임금의 조서가 내려진 이후, 성전 재건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B.C.516년에 마침내 완공되었음을 보도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에즈라기 6장 16-18절에는 역사적인 성전 봉헌식이 거행된 사실을 보도한다.

 그 가운데서 에즈라기 6장 16절은 성전 봉헌식을 거행한 주체를 밝힌다.

에즈라기 6장 16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거론되는데, 새 성경에는 서두에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말미에 나오는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이 서로 다른 집단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문에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동격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에 해당하는 '베네 이스라엘'(bene israel; the people of Israel; the children of Israel)과 이어지는 부분에 접속사 '와우'(wau)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즈라기 6장 16절의 상반절은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스라엘 자손들, 즉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나머지 돌아온 유배자들의 자손들이'가 된다.

 

에즈라기 저자가 성전 재건을 마치고 감사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의 계층을 사제, 레위인, 기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자의 자손으로 세부적으로 언급하면서,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베네 이스라엘)이라고 통합하여 언급한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계약의 후계자 야곱에게 주신 새 이름이다(창세32,28).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명칭은 하느님과 계약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와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계약을 맺고(탈출19,1), 약속의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여호12,6).

 

이후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을 거스려 끊임없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2열왕17,7)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났지만, 이제 하느님의 은혜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 하느님의 백성의 상징인 성전을 재건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계약적 호칭을 다시 받게 된 것이다(예레50,4).

 

한편 '유배자'에 해당하는 '갈루타'(gallutha)는 '포로'(the captivity), '사로 잡혔던 자'라는 뜻보다는 '추방된 자'(the exiles)라는 뜻에 더 가깝다.

 이것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다'라는 개념보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다'라는 측면이 더 강조된 표현이다.

 또한 '나머지', '기타'에 해당하는 '쉐아르'(shear)는 '남은 자'(the rest)라는 뜻이다.

 따라서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에 해당하는 '쉐아르 뻬네 갈루타'(shear bene gallutha)는 직역하면, '쫓겨난 자손의 남은 자'(the rest of the exiles)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자손'이란 표현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이란 표현은 

하느님의 계약이라는 주제 아래서 본다면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느님의 계약 아래 약속의 땅에서 보호받는 백성이란 의미이고,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쫓겨난 자손의 남은 자)은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하느님의 계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약속의 땅에서 추방된 백성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에즈라기 저자는 에즈라기 6장 1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불순종하여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용서하여 귀환시키시고,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에 대해 강조하였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로 번역된 '카하나이야 웰레와예'(kahanaiya wellewaye; the priests and the Levities)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과  구별되어 별도로 언급된 것은,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인 목적이 제2 예루살렘 성전의 완공 및 봉헌식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측면에서 에즈라기 저자는 사제들과 레위인들들의 직무와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을 따로 언급한 것이다.

 

과거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자신들의 막중한 책임을 도외시한 채, 제사를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인 부를 쌓는 일에만 몰두했었다(2역대36,14; 애가4,13). 그 결과 하느님의 징벌이 내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성전은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히고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에즈라기 저자는 이제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새로 건축된 성전에서는 그와 같은 부정한 일이 행해져서는 안됨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특별히 따로 언급했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봉헌식'이라고 번역된 '하눅카'(hanukka; the dedication)는 '헌신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나크'(hanak)에서 유래하여 '하느님께 받은 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림으로써, 그 모든것의 주권(절대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해 드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연중 제25주간 화요일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에즈라기의 말씀을 듣습니다.

에즈라기는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수많은 유다인이 조국을 떠나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십 년가량 지난 뒤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가 유다인들의 귀향을 허락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에즈 1장 참조),

유배자들은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에즈 2장 참조).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의 우선적 과제는 무너진 주님의 집을 복구하는 일곧 폐허가 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재건 공사를 시작하며 그들이 느꼈던 벅찬 감격과 기쁨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그러나 그 뒤 공사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합니다.

그들을 시기하던 적대자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일을 꾸미면서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였습니다(에즈 4-5장 참조).

그러나 예언자들의 격려로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우여곡절 끝에 중단되었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성전 건축을 무사히 마친 유다인들이 성전 봉헌식을 장엄하게 거행하고성대하게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묵상하여 봅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임마누엘곧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 모시기였습니다.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된 우리도 하느님 모시기를 그 어떤 일보다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신비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영성체로 모시는 바로 우리 각자가 이제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


복음(루카8,19-21)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 성경(聖經)에서 군중의 의미는 말씀에서 진리를 찾고 깨닫기 위해서라기보다, 말씀으로 자신들의 소원(所願)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의 기적(奇蹟)과 표징(標徵)을 소문으로 듣고 찾아온 예수님의 뜻, 길 밖에 사람들이다.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해 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가족들이다.(루가5,15. 11,29참조)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요한12,33-34)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34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율법에서 메시아는 영원히 사실 것이라고 들었는데어떻게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십자가한다고 말씀하십니까그 사람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 자신들의 소원(所願)을 들어 줄, 채워줄 죽지 않는, 기적(奇蹟)과 능력(能力)의 메시아를 환호(喚呼)하며 따랐던 군중(群衆)이다.(마태21,6참조) 그런 뜻(생각)을 갖은 이들은 지도자(指導者)들의 거짓말, 유혹(誘惑)에 넘어간다.

 

(마태27,20.22-23) 20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제사와 윤리, 그 인간의 열심, 의(義)를 부정하고 인간들의 뜨ᅟᅮᆺ(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메시아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22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23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 예수님 밖에 말, 가르침을 뛰어 넘어야 진리(眞理)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실행(實行)-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진리(眞理)로 마음에 간직하여 지키는 것이 실행이다. 어제 묵상했듯이 말씀 안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 곧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 안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진리로 마음에 간직, 지키고 율법, 인본주의 나를 버리고, 부인(否認)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들어가 그분과 한 몸이 되는 것, 하느님의 말슴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지 못한, 내 밖에 분리(分離)된 그리스도로 계속 계시면 그리스도께서 섬김의 대상(對象)이 되어 새 것, 구원의 진리가 되실 수 없다.

 

(마태20,28)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신앙의 목적지,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와 혼인(한 몸)이다. 내 뜻을 위해, 내 밖의 능력의 예수님(神)을 열심히 섬기는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宗敎)가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슬람, 불교 등....

모든 종교는 인간(人間)이 신(神)을 찾아가고 신(神- 인간들이 만들어낸)을 섬기지만, 그리스도교는 창조주(創造主)이신 신(神)이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의 죄(罪)로 죽음으로 인간을 섬겨주는 구원(救援)의 신앙이다.

 

(루가23,39-43)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죄인이 용서(容恕),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죽음의 십자가(十字架)에서 내려오는 기적은 받지 못했다. 목숨을 살려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는 자비(慈悲)는 베풀지 않았다.

 

(요한19,32-34)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신앙의 목적은 세상의 재물, 지위, 병의 치유, 등, 땅의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육(肉)이 죽게 놔두신 것이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육신의 욕망인 내가 죽으면 죽을수록 거기서 구원의 의(義), 옷을 입혀주시는 하느님이 드러나고, 그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신다.(이사61,10 로마,25참조)

그러므로 교회(敎會)에서는 육의 욕망, 그 헛됨을 배워, 육(肉)의 자아(自我)를 죽이는, 부인(否認)하는 가르침을 받아야지, 다른 종교들처럼 육의 욕망을 채워주는 가르침을 받아 ‘섬김의 신앙’을 살면 안된다. 그러면 군중과 예수님의 가족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미사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 ‘생(生)미사’로? 육의 뜻, 소원을 들어주는 그리스도로 섬기면 안된다. 입시(入試)철만 되면 대학입학을 위해, 성당(聖堂)이나 성지(聖地)등에서 다른 종교와 똑같은 헛된 기도(祈禱)를 하게하고 있다. 주님께서 악(惡)하다 하신 세상의 교만의 지식, 지혜가 교회(성당) 안으로 들어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世上)에서는 핍박(逼迫) 받아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칭찬을 받고 있다.

 

(요한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世上)의 핍박(逼迫)이 그리스도의 고난(苦難)에 동참(同參)이며, 구원의 증거(證據)임을 깨닫고, 기뻐할 줄 알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敎)’다(사도5,41)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선악의 가르침을 빈정대는 그 눈먼 지도자와 함께 선악의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된다.(마태15,14)

  

☨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우리의 눈발이 되시며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 천주의 성령님!

사람의 말과 사람에게 매여또한 사람이 주는 상처에 묶여 사는 이 세상 삶에서 자유하게 하소서말씀에 의탁하여 영의 자유안식의 삶을 살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루카 8,19-21)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 실행(實行)~ 말씀을 도덕과 윤리의 계명으로 들어 열심히 지킨 행함, 그것이 아니다.

그 말씀의 실행, 오늘 앞절과 뒷절에 답이있다.

 

앞 16절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등불(그리스도의 빛), 그릇(사람-피조물), 등경(교회-묵시1,20 등잔대).

진리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의 사랑, 그 의로움을~ 인간들의 사랑, 의로움이 덮지 말라고, 가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 

곧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지킨 그 인간의 의로움을 진리로 가르쳐~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의로움을 보지 못하도록 하지 말고~ 십자가의 의로움, 그 구원의 빛 하늘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개짐(똥걸레)일 뿐인 인간의 의로움을 치워 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뒤 22절 22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이르시니, 그들이 출발하였다.

= 배를 타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 교회(배)가 세상(호수)의 저쪽, 곧 하느님나라로 출발하는 그 신앙생활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23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 성경은 죽음의 상태를 잠으로 표현한다. 예수님께서 잠이 드셨다는 것은 그 교회(배)에 말씀이 죽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배(교회)안에 그 제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믿음 없음의 그 잠든, 죽음의 상태를 뜻한다.

곧 배(교회)안으로 호수(세상)의 물(말, 가르침)이 들어와 그 세상의 말(물), 가르침을 더 의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기에, 말씀이 제자들 안에서 일을 하실 수 없는 잠, 곧 죽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24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 세상의 말을 의지하고 믿는 ,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죽음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그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예수님(말씀)을 깨우는, 그리고 자신이 죽게 된 죄인임을 고백 하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그 구원의 진리의 빛으로~ 마음의 풍랑이 잠잠해져 하늘의 평화를 얻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실행인 것이다.

 

(요한6,28-29)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오늘 본문 앞18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하셨고 뒤 2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세상)의 풍랑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 길, 구원의 진리로 들어 하늘의 생명, 그 하늘의 복에 믿음을 두었는지, 아니면 인간의 뜻, 길, 계명으로 땅의 목숨, 땅의 복에 믿음을 두었는지~우리의 믿음을 살펴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늘 성경 말씀을 하느님의 뜻인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 그 복음, 계명으로 들어~그 하느님의 뜻에 믿음을 두는, 그 실천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잠언21,1-2)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 다시 임금(예수님)의 마음은 주님(하느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생명수), 주님(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댜ㅐ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 사람의 길(도덕과 윤리, 규정과 교리)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진리로) 보여도 마음(감추어진 이기적 속셈)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에페3,12)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루카8,19-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21)

 

루카 복음 8장 19~21절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46~50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하고 계실 때 찾아온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영적이 군중들에게 영향을 끼쳐 단순히 소문과 명성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베에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마태12,22~32)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소문 때문에

걱정이 되어 찾아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회당에서 가르침을 하는 도중에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라고 말하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마태12,49)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당신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 불리움을 받은 제자들도 이러한 공적(公的)인 가르침 중에 사적(私的)인 육정(肉情)을 쓰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교육적인 차원에서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 8장 21절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로 나오는 마태오 복음 12장 50절과 병행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혈육적이고 혈연적인 관계보다도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에 해당하는 '메테르 무 카이 아델포이 무'(meter mu kai adelphoi mu)에서 '형제들'에 해당하는 '아델포이'(adelphoi)의 단수는

'아델포스'(adelphos)이다.

 

여기 복음에 나오는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스'(adelphos)라는 희랍어 단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촌 형제들도 그렇게 불렀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요셉 양부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고종 사촌들이나 마리아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이종 사촌들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 친형제들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에 자신의 어머니를 친형제들에게 맡기지, 왜 이종사촌인 제자에게 맡겼겠는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출산하기 전(前)이나 출산시(時), 그리고 출산 후(後)에도 평생동정(平生童貞)이시라는 교리 신덕 도리 이천년 동안 가르쳐오고 믿어온 가톨릭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대처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부정하는  개신교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씀 절대 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이렇게 성경적 무지로 오류을 범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대처주의를 성경을 근거로 해서 합리화시키려고 하니까 터무니 없는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듣고'에 해당하는 '아쿠온테스'(akuontes; hearing)의 원형은 '듣다',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쿠오'(akuo)인데, 이것은 자식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 권위의 대리자들인 부모에게 순종하듯이, 인간들의 삶을 다스리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권위이신 하느님께 대해 자녀로서의 순종은 당연한 도리요 의무라는 뉘앙스를 주는 말이다.

 

 

 

   

20250923일 화요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뵙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가족과 친척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드렸지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만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과 친척들을 매몰차게 대하시거나 적어도 거리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말하는 마르코 복음서를(3,21 참조) 보면 이 부정적인 인상은 더 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 의도하신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가족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그분 어머니와 친척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님께 더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하느님께서 너무나 소중하시기에,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아들과 딸, 곧 가족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직무를 수행하시고자 가족을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에 둔다면 누구나 그들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제자들로 제시합니다(사도 1,14 참조).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는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다.

 

복음(루카8,19-21)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 - 앞절에 지금까지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루카8,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사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 맺으신 분은 예수님뿐이다.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리(眞理)로 받아들여 그분 안에서 좋은 땅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지혜(智慧)다.

 

(1코린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하느님의 지혜, 진리의 말씀을 사람의 뜻, 말이 아닌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진리로,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 바르고 착한 마음, 좋은 땅이다.(1테살2,13참조)

그래서 말씀이 생명, 구원의 열매를 맺으심을 믿고 말씀에 의탁하여 사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십자가) 밖이 아닌 예수님(십자가) 안에 그분과 하나 된 한 가족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받아 생명을 얻어 이웃에게 생명을 전한다.

 

(루카8,16)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등경(燈檠)은 교회, 등불은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빛으로(묵시21,23),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당신의 몸을 태워 내는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시다.

그 빛을 그릇, 침상, 곧 사람의 것(빛)으로 덮어 가리지 말라는 그 말씀을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그릇)을 깨트리고 자신을 치장, 도금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 곧 이웃들에게 사람의 의, 빛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를 빛으로 선포하고 삶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말씀으로 빛(생명)을 얻어 빛을 전한다. 그들이 예수님 밖이 아닌 예수님 안에 그분과 하나 된 한 가족이다.

곧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실행(實行, 킵-깨달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함)- 자신의 마음에 간직한 하느님의 빛(희망의 말씀)을 주는, 곧 이웃과 빌(생명)을 나누는 삶, 올바른 신앙을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것이 오늘 독서 에즈라 6장에 말하는 하느님의 집, 성전(聖殿)의 완성이라 묵상해 본다.(1코린6,19)

 

* 인간의 한계성은 절망으로 이뤄지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그것은 은총(恩寵)을 구하는 자리를 만드시는 참으로 은혜(恩惠)로운 하느님의 간섭(干涉)이다. 이것을 거치지 않고, 확인하지 않고는 감히 신앙을 논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십자가가 중심에 서고, 하느님 사랑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절망적인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곧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십자가(十字架)가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면 십자가를 휘두르게 됩니다. (자싱의 생각, 뜻대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신자(信者)는 착한 행실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신자됨은 도덕적 승리, 윤리적 합격보다도 들보를 깨닫는 회개(悔改)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질그릇(나)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 깨져, 그 안에 보물(그리스도)이 나타나 드러나는 것입니다.(2코린4,5-7참조)

우리가 신앙적으로 좋은 실천을 할 때는 그가 가진 신앙이 윤리적, 도덕적 경지를 만들되 노력하고 애써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깨져서 가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자라났다고 이야기하기보다, 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만 가실 수 있고, 어떤 윤리, 도덕, 신앙의 경지든 그리스도께서만 가시고, 그 안에서 내가 그 자리를 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지는 어떤 성공적인 모습들은 그 자신을 부인(否認)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는 게 아니라 죽어 예수님 안에 묻혔노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보’를 깨닫는 절망을 자신 안에서 확인하는 자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고 그런 차원에서 자기를 죽여, 자존심과, 증오와 파멸을 종식(終熄)시켜, 빛이고 사랑이고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묻을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참다운 빛과 소금의 자리로 나가는 신앙의 큰 비밀, 신비(神秘)입니다.

 

(로마5,10. 8,32)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하느님께서 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게하신 그 사랑, 은총의 사건에 오늘도 매달립니다. 저의 죄악보다 하느님의 용서, 자비의 힘이 더 크심을 믿습니다. 이끌어 주세요~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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