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먹보요 술꾼 (루카7,31-35)

2025. 9. 16. 오전 6: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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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7일 수요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먹보요 술꾼 (루카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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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1티모3,14-16)

14 나는 그대에게 곧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15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화답송>시편111,1ㄴㄷㄹ-2.3-4.5-6(2)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그분 업적은 엄위롭고 존귀하네. 그분 의로움은 영원히 이어지네.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네. 위대하신 그 일들 당신 백성에게 알리시고, 민족들의 소유를 그들에게 주셨네.

 

복음<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1-35)

주님께서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제1독서 (1티모3,14-16)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5)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전서 3장 15절에서 자신의 에페소 방문이 늦어지게 될 경우, 티모테오로 하여금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본 서간을 집필한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티모테오 전서 3장 15절은 티모테오 전서의 기록 동기를 밝히고 있다는 점과는 별도로 사도 바오로의 교회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사목하고 있는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관을 세 가지로 피력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느님의 집이요둘째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요, 셋째는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이다.

 

우선 사도 바오로가 첫번째로 제시하고 있는 교회관은 '하느님의 집' ('오이코 테우'; oiko theu)으로서의 교회이다.

여기서 '집'으로 번역된 '오이코스'(oikos)는 통상 '건물로서의 집'이나  또는 '그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로서의 집안(가족)'을 뜻한다.

 

코린토 전서 3장 16절이나 베드로 전서 2장 5절은 교회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성전'으로, 히브리서 3장 5절이나 베드로 전서 4장 17절은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집안'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에페소서 2장 19절 이하에서는 이 두 개념이 결합되어 진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이코'(oiko)는 이미 티모테오 전서 3장 4절과 5절,그리고 12절에서 줄곧 일관되게 '집안'(가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 15절에서도 '건물'의 의미가 아니라 동일하게 '집안'(가족)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교회는 한 분 하느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영적 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하느님의 집안(가족)인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라고 번역된 '에클레시아 테우 존토스' (ekkllesia theu zontos)가 사도 바오로가 피력한 두번째 교회관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이 섬기는 생명없는 우상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해 자주 주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표현하였다(신명6,15).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도 나온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전서 1장 9절에서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명백하게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것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여호3,10)와 같은 선언은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계약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머무를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의 될 것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같은 사상은 성경 계약의 기초를 이루며(탈출25,8; 29,45-46; 레위26,12; 시편114,2; 에제키엘37,27), 사도 바오로의 신학 사상에서도 두드러진다.

 

사도 바오로는 실제로 코린토 후서 6장 16절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라고 선언한 뒤에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교회관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과연 하느님의 충만한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필요하고도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라고 번역된 '스튈로스 카이 헤드라이오마 테스 알레테이아스' (styllos kai hedraioma tes alletheias)가 사도 바오로의 세번째 교회관이다.

 

여기서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스'(alletheias)의 원형 '알레테이아'(alletheia)는 부정사 '아'(a)와 '숨기다'(마르코7,24)라는 뜻의 동사 '란타노'(lantha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숨길 것이 없는 진심'이라는 뜻에서 '진리'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인 진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에페4,25; 로마9,1) 더 많은 경우에는 그리스도교에서만 발견되는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에페4,21; 콜로1,5).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한다(요한1,14.15; 14,6).

여기서도 그리스도교 특유의 구원의 진리나 그리스도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기초'(터)로 번역된 '헤드라이오마'(hedraioma)는 본래 '굳게 하다', '견고케 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헤드라이오오'(hedraioo)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건물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대지'를 의미한다.

 

교회에 대해 이러한 의미의 '기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단이나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지켜야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기둥'으로 번역된 '스틸로스'(styllos)는 신약에서 여기와 갈라티아서 2장 9절, 묵시록 3장 12절에서만 등장한다.

 

사실 기둥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서 건물의 외양을 높이 드러냄으로써 멀리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한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 '이라는 뜻은 기둥이 건물 안쪽에서 건물을 높이 떠받들듯이 교회도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내세우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는 은유적 표현으로서진리를 견고하게 지지하여 거짓 가르침의 공격으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높이 쳐들어 세상에 진리를 알려야 하는 교회의 두 가지 책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7,30 참조)

이 세대 사람들이라 일컬으시며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장터의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너희는 춤추지 않고우리가 곡을 하여도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것은 혼례식과 관련된 놀이이고곡을 하며 우는 것은 장례식 놀이입니다.

문제는 한쪽에서는 놀자고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데다른 쪽에서 전혀 호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피리를 불어 대도 춤을 추어 주지 않고,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곡을 하여도 우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에서 비유의 뜻은 더욱 명확하여집니다.

놀이를 제안하는 이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시고,

그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던 요한은 마치 장례식 놀이를 제안한 격이지만,

그들은 요한의 금욕주의적 태도를 비난하며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먹고 마시는 일에 비교적 자유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혼인식 놀이를 제안하신 격이나,

그들은 예수님을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먹보나 술꾼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배척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에곧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단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초대에 혹시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응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교회야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울지도 말라

 

(루가7,31~35)

31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가리켜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했어요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요이방인이요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성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바로 고 마음 이 세상에서 대장 되고 싶어 하고 이름 남기고 싶어 하는 고 마음단단한 마음을 갈아엎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주시는 거예요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그걸 자아 해체작업이라고 하고자기부인의 삶이라고 하고그 전체를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은 자기부인의 절정인 이름 없음의 삶으로 끝나야 되는 거예요성도의 죽음이에요그게이름 없음 점점 자기 이름에 대한 그 가치를 놓아가다가 결국에는 다 뺏기고 김종업이란 이름을 뺏기고 그리스도인하느님의 아들작은 예수라는 이름을 받아서 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터 아이들의 놀이를 들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해 주세요장터에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서 혼인잔치의 놀이를 하는데 어떤 아이가 그 피리 장단에 춤을 추지 않아요그래서 아이들이 애곡을 하면서 장례식 놀이를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그 놀이에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가르쳐도 세상이 따라하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세상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절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그 말씀을 쫓아서 살 수가 없어요그걸 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리가 없잖아요?

인간들은 종교조차 자신들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종교조차 자신들의 이름과 인기와 평판과 힘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섬긴다고 하는 신들까지 이용해 먹는게 인간인 거예요그래서 그들은 철저한 금욕적인 삶 도덕적 윤리적 바른 삶 등을 내어 놓기도 하고 엄격한 종교 행위를 내어 놓기도 해요그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었어요.

그것이 바로 현대의 실용주의합리주의인본주의로 이름을 바꾸어 나타난 유대주의이며 율법주의인 거예요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요인간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봐요그리고 하느님은 자기들만 축복해줘야 된다고 믿어요그리고 과연 그렇게 되었어요예수님의 말씀처럼 '과연 그러하리라그렇게 살았더니 세계의 경제권을 유대인이 다 쥐어 버렸어요.

그러면 뭐합니까그 유대주의가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지금도 테러로 죽이고 있어요지금도...

그들은 서슴없이 이야기해요우리는 2천 년 전에 태어난 그 예수를 쓰레기처럼 버렸다유대교는 그를 쓰레기처럼 버렸다그런데 다른 종교인 다른 이방인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어서 예수교를 만들었다라는 거예요우리가 예수를 쓰레기처럼 버린 거처럼 이 땅에 예수교가 들어와서 우리를 개종시키려고 할 때 쓰레기처럼 죽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아직도 무서워요그런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이들처럼 살고 있어요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자들도 유대인입니다아르헨티나 브라질 남미에 자본은 전부 유대인들이 갖고 있어요꼼짝을 못합니다.

자기들이 종교 행위를 하면서 아니 종교놀이를 하면서 애곡을 하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면서 애곡하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나는 이렇게 단식하고 있다나는 이렇게 금욕적인 삶을 살아나는 하루에 열두 번씩 씻는데 애곡하는데어떤 놈이 나타나갖고 자기들의 애곡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같이 울어주지 않는 거예요창녀들과 술만 마시고 있어안식일날 밥도 먹고...그게 본문 34절인 거예요.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부정한 것과 멀리하여 이렇게 종교적으로 훌륭하게 잘 사는데 저놈은 와서 죄인들과 창녀들과 먹고 마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더라는 거예요애곡에 참여 안하는 거예요뿐만 아니라 인간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사는 이 세상 무리들은 진화론에 근거한 역사 낙관론에 빠져 살고 있어요.

역사는 계속 진보하여 결국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라는게 역사 낙관론이에요마치 유대인들이 엉터리 선민사상에 빠져서 자신들의 결국은 반드시 화려한 다윗 왕국의 회복으로 끝이 날것이다라고 믿었던 것과 똑같은 거예요유대주의에요그게.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라는 자가 와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 밖의 광야에서 예루살렘 밖에서 그 성에서 나오라는 거예요성에서는 지금 혼인잔치가 준비되어 있어요선민이거든요.

예배드리면서 제사드리면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야 우리에게 이제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국이 회복될거야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그 밖에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광야에서 '웃기지 마라 회개하라!'를 외치고 있어요.

회개하라는거 그거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그리고는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있네잔치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자신들은 역사 낙관론과 선민사상으로 하느님과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어떤 놈이 계속 거기다 초를 치는 거예요고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자 요한이 유대주의 곧 인본주의의 역사 낙관론에 초를 치면서 회개해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아니면 니네는 모두다 가짜다라고 외치고 있어요그런 의미에서 예수교인의 역사관은 프로페틱 페시미즘(예언자적 비관주의)이어야 하는 거예요.

회개하지 않는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대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에요그런데 택함을 받은 소수의 하느님 백성들 이외에는 절대 회개할 수 없다가 성경의 진술이죠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된다멸망한다에요그래서 우리 성도의 역사관은 페시미즘이 맞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끝내 회개하지 않고 멸망할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 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싶다유명해지고 싶다힘을 갖고 싶다'라고 하면서 세상의 놀이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그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지금은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유명한 자됨을 꿈꾸며 아주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진짜 큰 자는 믿음으로 예수를 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하고 세상에 초를 치는 사람이어야 되는 거예요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함께 맞춰서 춤추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 이야기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러죠구약의 예언자들이 전부 뭘 준비하다가 간 사람이라 그래요메시아 예수를 증거하다가 간 사람이라 그랬잖아요. '메시야가 온다.' 하고 다 갔어요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와서 '이가 그이다!' 하고 예수님을 봤다 말입니다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자예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큰 자의 의미가 뭐예요예수님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보았느냐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이에서 동행했느냐로 판단되는 거예요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세례자요한이 가장 작은 자다 그러죠교회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 안에 뚫고 들어와 있는 존재인 거예요그렇다고 세례자요한이 교회가 아니란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탄생이 된 교회가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큰 자인 세례자요한도 교회 중에서는 가장 작은 자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육신의 눈으로 못 봤으니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다 본 자이기 때문에 그게 큰 자인 거예요그 큰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유대주의가 오늘날 인본주의 실용주의 꿩잡는게 매란 뜻이에요실용주의는 쉬운말로 나에게 유익만 되면 괜찮다는 거예요실용주의 진리가 뭔지 상관없어 나에게 유익만 되면 된다라는 거예요합리주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아니에요성경이 합리적으로 해석되는게 몇 가지나 있습니까아니란 말입니다그 모든게 다 땅의 것이에요착하게 살아서 하느님께 칭찬받자 땅의 것이에요기특한 이야기인 거 같지만... 착하게 사는게 나쁜게 아니라.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지고 그 은혜를 너무나 깊이 깨닫게 되어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삶으로서의 착한 일은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내가 이 착한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기와 명성을 챙기겠다는 착한 일이 악이란 말입니다그것이... 그게 유대주의인 거예요그게 율법주의인 거예요그게 인본주의라는 거예요그게 땅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바오로가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요약을 해주는 거예요

3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당시 교회 안에 들어온 율법주의를 가리켜서 이야기하는 거예요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거래요그게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유대주의의 마침은 멸망이에요인본주의에 마침은 멸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이름과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힘과 평판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아 사는 자아 숭배의 삶인 것이고그것은 전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며 그들이 지옥에서 멸망당할 사람이다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골로사이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해요. 3장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엣 것은 예수와 예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엣 것 인본주의 인간의 노력 열심 이야기하는 거예요여러분은 이미 죽었고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에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어요.)

마치 공동묘지의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감을 할 수가 없어요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어요. '어휴 두렵다무섭다공포스럽다안된다 말입니다그게... 그 자리로 변해가는 거예요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어시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늘의 시체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한 성공이나 승리 소유의 다소 이런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그들에게는 세상이 요구하는 율법의 행함도 무용한 것이 되고요시체들이 행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해요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시체니까...

아무리 콜라병을 던져도 그 시체가 일어나서 '너 다시한번 그러면 혼난다이런 말 못한다 말입니다세상에 대해서 죽은 시체들에게는 그러한 세상의 놀이에 재미가 전혀 느껴질 수가 없어요가난해도 괜찮고못생겨도 괜찮아요.

시체는 자기 몸에 명품을 두르는 것도 시시해지고... 자기들은 살았다고 빡빡 우기는 이 좀비들에 세상에서... 성경은 분명 이 세상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러는데 자기들은 살았다고 우기니까 좀비지 뭐예요그게 강시지콩콩거리면서 다니는 강시그죠?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야 돼요공포영화나 만화영화 같은데 보면은 좀비들이 막 살아서 자기들끼리 뭐 싸우기도 하고 뭐 투표도 하고 별거 다하죠그때 그런거 보면서 '야 쟤 참 좋겠다 좀비들의 세상에서 대장 됐네그게 부러우세요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고 세상의 애곡에 따라 울지 않는 하늘의 사람들의 삶인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실에 직면했을 때에 그것에 대한 반응이 줄곧 한 가지로 나오지 않잖아요한가지 사건에 대해 어떤 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어떤 때에는 불쾌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잖아요그러니까 내 자아라는 것은 고정적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동일한 사건을 직면하면서도 그 사실을 매 순간 다르게 주관화하여 인식을 해요그게 무슨 자아입니까여러분 그걸 애벌레 자아라고 한 거예요인간은 그렇게 진짜 자신의 자아가 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런 존재에요.

인간은 그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을 크고 질긴 막으로 이렇게 감싸 버려요그 막을 방어기제(디펜스 매커니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인간은 그렇게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애벌레 자아들을 방어기제 같은 막으로 감싸고는 이것이 나의 자아야라고 근사하게 연극하는 거예요이게 나야!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인간은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많은 선행과 착한일과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 놓으면서 바로 이게 나다라고 하면 세상이 다 속습니다. '와 착한 사람 청렴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세상에 의해서 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막이 그 사람의 자아로 평가를 받고 그 자신에게도 그게 자아가 돼요그런데 하느님은 절대 거기에 안속습니다그리고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백일하에 폭로시키세요.

꿈틀꿈틀 거리는 그 구더기같은 우리의 자아 그 애벌레 자아를 폭로시켜 버린다고요그리고는 '이걸 갖고 너희들이 영생을 살 수 있어아니지그래서 내가 죽이러 온 거야!' 그걸 우리의 인생 동안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신앙생활을요.

그 꿈틀거리는 애벌레 자아가 의식의 표면으로 끌려 나와 하느님에 의해 도말되는게 신앙생활이에요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 2장에서 시메온이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한 거예요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왜 오셨어요여러분이 원래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어떤 존재로 타락이 되었는지를 폭로시키려고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오신 거예요따라서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 속의 애벌레 자아를 둘러싸고 있던 그 자기방어기제 그 막 그 가면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셔야 돼요폭로되야 돼요'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7,24)라는 이 고백을 매일 하셔야 돼요.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 그랬잖아요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사망의 몸이라고 고백을 했다니깐요.

고대시대 때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면 그 시체를 살인자와 꽁꽁 묶어 놓는 거예요그 시체가 썩어가는 그 과정을 다 보면서 '아 이렇게 무섭고 더럽고 지저분한 걸 내가 계속 달고 달아야 돼누가 이거 좀 떼어죠이게 죽음의 몸이란 말입니다그렇게 자기를 보더라는 거예요예수님을 만나더니 이 사도 바울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미성숙하고 더럽고 조변석개하며 탐욕에 가득 찬 자기 밖에 모르는 진짜 자신을 폭로당해야 돼요그리고 그 더러운 자아로는 그 어떤 노력과 열심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절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도 처절하게 경험해야 돼요.

그리고는 그 무능력과 불가능함 속으로 뚫고 들어 오서셔 자기 배라는 이 신을 향해 꿈틀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옛 자아를 조금씩 죽여가는쉬운 말로 자기부인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다가 수많은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뺏기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하게 되는게 신앙생활이에요그게 성도(聖徒)의 육신의 죽음입니다성도는 죽으면서 그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다 뺏기는 거예요이름을 뺏기는 거예요옛사람을 뺏기는 거예요그리고 새것으로 전부 받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거예요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죽음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주인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또 빼앗기다가 결국 주인이 왔을 때 모두 다 빼앗기는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그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이 주인의 명령을 받들고 주인의 장사를 해주기 위해 자기 유익을 위해 아무것도 못했잖아요.

빼앗기는 삶이란 말이에요계속 빼앗기다가 장사해서 얻은 유익까지 다 뺏기는 거예요주인한테... 주인이 오자마자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그러나 그렇게 다 뺏겨야 진짜 좋은 하늘의 것으로 채워주는 거예요절대 자신의 이름을 위해 호화로운 무덤자리 마련을 위해서 이 땅을 사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도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그 화려한 무덤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거 알게 되죠그러면 그 하느님의 은혜를 그렇게 충분히 공부하여 안 사람들은 세상이 피리를 불 때 '야 돈은 이 정도 벌어야지니 나이에 이정도 수준의 명예는 있어야지야 너 망했구나이렇게 피리를 불 때 혹은 애곡하라고 할 때 거기에 부하뇌동할 수 없어요!

'넌 나 망했다고 하는데 뭘로 망했다고 하는거야돈이 좀 없어졌다고그거 망했다고 하는거야? '나는 아니야 그로 말이암아 나는 하느님 더 많이 알게 됐다난 망한거 아니야!' 애곡 안하는 거예요.

왜 세상의 힘의 원리에 쫓겨 살아요여러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거예요그런데 그 세례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각에서 시작이 되어서 "나는 불가능한 죄인이므로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대신에 우리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것처럼 당신 자신이 저주의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정작 죽어야할 내가 살아났습니다!" 라는 복음의 이해로 이어지는 거예요그리고 왜 나를 대신하여 예수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내 안에서 무엇이 죽어야 되는지를 이렇게 폭로당하는 거예요그리고 그게 조금씩 죽어가는걸 경험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럼 도대체 무엇이 짤라져야 되길래무엇이 물에 빠져 죽어야 하길래예수가 죽었을까?를 애벌레 자아를 폭로당하고 그게 하나하나 예수님의 도끼에 의해 까이는 삶을 사는 거예요그런데 뭐가 그렇게 실망스러워서 뭐가 그렇게 불만족 스러우세요뭔 불평이 그렇게 많습니까?

여러분 나만을 사랑하고내 가족만을 사랑하고내 집내 교회내 나라우리팀내 재산 이런 것만을 사랑하며 살았던 나의 애벌레 자아들을 폭격당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지어져가는거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이에요.

그 삶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기 위해 여러분의 삶에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거든요그리하여 그 모든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거예요다 복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여정이 있는 자들은 세상이 환호하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외로워하게 되는 거고 세상이 애곡하고 슬퍼하는 현실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렇게 심심한데 이렇게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고작 그런게 그렇게 기쁘고그런게 그렇게 재미있는데 이 세상에서 이름나겠다고 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겠다고 하니 너무 세상이 불쌍해졌어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 이름 남기는거 아니에요더욱더 털리고 비워져서 하느님이 여러분을 점령하게 해야 돼요여러분의 마음이 하느님께 송두리채 뺏기는 삶 그 삶을 살아야 돼요그래서 그건 세상이 아무도 이해를 못하기에다 미친놈이라 그러니까그거는...

연약해지고 용서해주고 섬겨주는게 어떻게 강한거에요아니잖아요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게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만 그 지혜가 옳다 인정함을 받아요다른 이들에게는 미련하다 인정받는다구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스인들 히브리인들 전부에게 다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말입니다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지혜가 옳다라고 안다는 거예요여러분의 삶에 하느님의 도끼가 들어오면 "하느님 또 어떤게 짤려 나가야 되나요?" 그리고 그 하느님의 도끼질을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실력자가 되세요그때 여러분은 진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요.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루카7,31-35)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1-32)

 

원문은 결과 접속사 '운'(un; then)으로 시작되어 '그러므로(그렇다면) 무엇에 비유할까?'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결과 접속사 '운'(un)이 루카 복음 7장 31절이 29절과 30절에 이어 계속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써, 7장 29절과 30절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세례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거절하고 저버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31절부터 34절까지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비기랴?'로 번역된 '호모이오소'(homoioso; I can compare)의 원형 '호모이오오'(homoioo)는 형태나 성질 면에서 유사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이다.

 

보통 '비유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파라발로'(paraballo) 동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다'라는 뜻으로서, 하나와 다른 하나를 견주어 비교하여 어떤 현상을 쉽게 설명해 주는데, '호모이오오'(homoioo)는 '파라발로'(paraballo)에 비해 매우 직설적 표현이다.

 

'호모이오오'(homoioo) 역시 어떤 두 대상을 놓고 비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비유'라는 말보다는 '~와 같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춤추어야 할 자리에 춤추지 않고, 애곡해야 할 자리에서 애곡하지 않는,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아이들과 같았던 것이다.

 

또한, '이 세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며, 더 넓게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저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한편, 루카 복음 7장 32절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내어 노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피리와 애곡으로 상징된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쁨과 슬픔을 대표하는 날이다.

이것은 당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연관지어져 있다.

 

즉 세례자 요한이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외치는 것은, 그의 금욕적인 생활과 더불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과 무시를 받는 것이었다.

 

마땅히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죄사함의 세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로부터 천국 복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비난과 냉담의 태도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그들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듣고도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가요? 복음말씀을 들으면 천국에 관해서 관심이 가나요?

바리사이들과 다른점이 있나요? 나는 아냐!!!!!)

 

 

 

20250917일 수요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루카 7,34)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만으로는 비난과 멸시의 어감이 있지만, 왠지 너무 근엄하고 거룩하셔서 우리와는 동떨어진 듯한 예수님을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고 더 친근하게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고 계셨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함께 먹고 마시는 분, 곧 친교를 나누시고 흥과 기쁨을 누리시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얼굴은 크게 웃으시는 모습에 가장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와 계신 것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듯이(5,34 참조), 지금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 기쁨과 행복의 때임을 온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누구도 가리시지 않고 모든 이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멸시와 미움을 받던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보는 파격적이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환영도 받으셨지만,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미움과 반대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삶을 사시지 않고, “지혜”(7,35)라고 표현하신 하느님의 뜻에만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당당하시고 주체적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이 옳다는 것이 드러나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시면서 모든 이에게 열린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0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악세살이 신앙(信仰)

 

(1티모3,16)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독생자)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진리, 참)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화답송 (시편111,2.5) 2 주님께서 하신 *일들 크기도 하시어 그것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친다. 5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당신의 *계약을 언제나 *기억하신다.

=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十字架)의 복음, 그 계약(십자가)을 기억(記憶)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구원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복음(루카7,31-35)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ㄱ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 장터- 거래를 위한 종교놀이를 했다는 것, 곧 자신의 유익을 얻어내기 위한 신앙이다. 무슨 스팩처럼 삶에 좋다는 것을 한 가지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32ㄴ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축제-카니발)추지 않고 우리가 *곡(제사)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카니발은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 곧 고기(제물)를 바치는 제사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신약의 새 계약,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그 피의 제사로 새 계약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히브10,9)

구약(舊約)의 율법이 주는 ‘죄를 통회하며 울고, 그 죄를 대속하신 신약(新約)의 새 계약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구원, 새 생명을 받았음으로 기쁨의 축제를 벌이는 것,’ 신앙생활이다.

스팩, 악세살이 신앙은- 회개로 슬퍼할 줄도, 용서로 받는 의(義), 생명에 기뻐할 줄도 모른다.

 

*아이들은 장터에서 이 놀이를 할까, 저 놀이를 할까하며 서로 다투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은 결혼식을 흉내 내는 놀이고, 곡을하고 우는 것은 장례식을 흉내 내는 놀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금욕주의자인 요한에게는 춤을 추라고 요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께는 곡(哭)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청개구리 같은 마음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아들까지 내어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고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그분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어디서 무엇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바오 사도는 말한다. “ 우리 신앙의 신비(神秘)는 참으로 위대합니다.”(1티모3,16) 이런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 사람의 육신(肉身)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시어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들을 친구(親舊)로, 곧 친구들의 죄를 다 가져가신 그 의(義),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당신과 함께 그들의 죄를 못박아 없애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 하느님의 지혜(智慧)다. 성령의 이끄심, 도우심 없이는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하느님의 지혜(智慧)다.

 

(1코린1,21-24.30)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지혜3,4-5)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 맞갖은 길들이기에 시험하셨다는 것, 왜? - 성숙으로 올리시기 위해(시험으로 상급학교에 입학시킴)....

 

(지혜3,6)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예수님처럼 나를 번제물로 인정, 대우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힘들 수밖에 없다.

 

<사제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하고, 자기 목숨을 잃고,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이 목숨을 구한다고 하니 누가 이 말을 반기겠나. 우리의 신앙이 이러하고, 믿는다고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삶이 나아지는게 아닌데도 여전히 신앙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선물을 주셨다는 증거다*

곧 그리스도로 의롭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리고 환난이다.(로마5,1-3) 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환난을 겪지 않고는 절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 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현세의 세상이 주는 영광에 만족하여, 하느님의 영광 곧 자신의 생명, 영광을 죽이고 하늘의 새 생명에 대한 바램, 치열함, 진지함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4,25.5,1-5)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히브6,19)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성소-하늘)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 천주의 성령님!

어느 목자께서 ‘하느님께서 묻혀있으라 하시면 묻혀 있어라 하느님께서 드러내실 때까지’ 라고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낮아지고 당신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세우실 때까지 인내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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