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16일 화요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7,11-17)
제1독서<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합니다.>(1티모.3,1-13)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화답송>시편101,1-2ㄱㄴ.2ㄷㄹ-3ㄱㄴ.5.6(◎2ㄹ) ◎ 저는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 자애와 정의를 제가 노래하오리다. 주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저에게 언제 오시리이까? ◎
○ 저는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불의한 일을 제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
○ 제 이웃을 몰래 헐뜯는 자, 저는 없애 버리고, 거만한 눈 오만한 마음, 저는 참지 않으오리다. ◎
○ 제 눈은 이 땅의 진실한 이들에게 머물리니, 그들이 제 곁에 살고, 흠 없는 길을 걷는 이, 그런 이가 저에게 시중을 들리이다. ◎
복음<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7,11-17)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제1독서 (1티모3,1-13)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됩니다." (8)
티모테오 전서 3장 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감독 직분(훗날 주교직에 해당)을 수행하는 일을 독려하고, 감독의 자격 요건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어서 이제 3장 8-13절까지 봉사자(훗날 부제직에 해당)의 자격 요건과 봉사자의 직분을 잘 수행한 자가 받을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서 '마찬가지로'로 번역된 '호사우토스'(hosautos; likewise)는 이제 사도 바오로가 감독의 요건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내용으로서 봉사자의 요건에 대해 말할 것을 나타내지만, 이것 역시 앞의 감독의 요건과 유사할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봉사자'로 번역된 '디아코누스'(diakonus)의 원형 '디아코노스'(diakonos)는 본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요한2,9)을 뜻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봉사하는 자'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서 16장 1절 및 콜로새서 1장 7절 등에서는 교회 및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코린토 전서 3장 5절에서는 '일꾼','사목자'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것을 볼 때, 이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단어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포괄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3장 8절에서 말하는 '디아코노스'(diakonos)는 사목자 이외에 교회의 업무를 담당하는 일꾼을 말한다.
신약에서 이들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사도행전 6장에서 등장한다.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명이 교회의 일꾼으로 간택되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는 장면에 나오지만, 거기에서는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곱 명이 부제 직분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사도행전 6장에 의하면, 이들의 교회안에서의 임무는 주로 실무적인 것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들을 실제적인 일과 행정에 있어서의 교회내의 전문가들로 인식하기도 한다.
한편 본 단락에서 주목할 것은 감독의 요건과 봉사자의 요건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같다는 점이다. 다만 봉사자의 요건으로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일구 이언하지 않는)것이나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는 안된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로 번역된 '딜로구스'(dillogus)의 원형 '딜로고스'(dillogos)는 본래 '두 번'(마르코14,30.72)이라는 뜻의 부사 '디스'(dis)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고'(leg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 폴리카르포스는 이것을 '남을 중상하다'라는 의미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어떤 것을 말하면서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또 어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놓고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서 교묘히 처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는 3장 3절의 '술꾼이 아니라'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보면된다. 여기서 '빠져서도'에 해당하는 '프로세콘타스'(prosechontas)의 원형 '프로세코'(prosecho) 역시 '관심을 가지다'라는 소극적 의미에서부터 '전념하다', '열중하다', '빠지다', '인박히다' 등의 적극적인 의미도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많은 술에 열중하여 빠져 있지 아니하는'(not indulging in much wine)이 된다.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구제하고, 교회 재정을 관리해야 하는 봉사자(부제)에게 있어 이것은 치명적인 결격 사유이다.
술에 인이 박혀 살아가는 이들은 판단력이 분명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이 부족하므로, 이런 자들에게 봉사자의 직분을 준다는 것은 교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한편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pursuing dishonest gain)로 번역된 '아이스크로케르데이스'(aischrokerdeis)의 원형 '아이스크로케르데스'(aischrokerdes)는 본래 '은밀한'이란 뜻을 지닌 '아이스크로스'(aischros)와 '유익한' 이란 뜻을 지닌 '케르도스'(kerdos)의 합성어로서 단적으로 말해 '은밀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이득을 취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약에서 본문한 동일한 표현으로 티토서 1장 7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봉사자의 자격 요건으로 제시되는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되고'와 3절에서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돈 욕심이 없으며'라는 어구는 물질적 측면에서 깨끗해야 함을 권고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불법적인 돈, 곧 깨끗하지 못한 돈을 뜻하고, 후자는 합법적인 돈이란 뉘앙스를 나타낸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봉사자(부제)의 자격 요건을 거론하는 8절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물질을 모으기 위해서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횡령자나 착복자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정당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물질을 모으지 않고,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에게 맡겨져 있는 양떼 즉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다만 그 성도들을 통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삯꾼이라고 하셨고, 이리가 공격해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자라고 하셨다(요한10,12).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 이야기는 엘리야 이야기(1열왕 17,8-24 참조)와 많이 유사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라는 성읍에 들어서며 과부 한 사람을 만났듯이(1열왕17,10 참조), 예수님께서도 나인이라는 고을의 성문에서 어떤 과부를 만나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었듯이(1열왕 17,22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만나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특히 다시 살아난 아이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공통된 장면에서, 두 이야기의 표현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함에서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하려는 루카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엘리야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 엘리야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아이를 살리려고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세 번에 걸쳐 자기 몸을 아이 몸 위에 펼친 다음, 다시 주님께 부르짖는 등 조금은 복잡한 치유 과정을 거치는데(1열왕 17,20-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요청(1열왕 17,18 참조)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부도, 고을 사람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이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애처로이 울고 있는 과부에게 느끼신 그 연민의 정이 죽었던 이를 살아나게 한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어떤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까?
이미 그 딱한 사정을 굽어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주님의 위로 속에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참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연민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는 이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성경은 땅의 말을 하는 사람을 '죽었다.'한다.
복음(루카7,11-17)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율법, 세상적)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교회의 모습이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 13절, 이곳에서만 주님으로 칭한다. 예수님의 본질이신 주님의 일을, 곧 세상에 속해 영원한 죽음의 땅에 갇혀야 할 죄인들을 살리시는 그 하느님의 뜻, 구원의 일을 하실 것을 뜻한다.
그 주님 앞에 울어야 할 죽음은 다시 일어나야 할 잠일 뿐이다.~
(루가8,52) 52 사람들이 모두 아이 때문에 울며 가슴을 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또한 죄는 주님 앞에 용서 받아야 할 은총일 뿐이다.~
(로마5,20)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또한 온갖 시련은 주님 앞에 다시 받을 하늘의 생명, 영광의 재료일 뿐이다.~
(야고1,12)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베드4,12-13) 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ㄱ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 주검이 주님의 손, 곧 창조, 구원의 손이 닫자, 주검이 정지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이 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새 것으로’다.
14ㄴ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 되 살아 난 것에 감격해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가 아니라 ‘말하기 시작했다.’를 성경은 먼저 알린다.
어제 앞 절에서 확인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인 ‘한 말씀’으로 살아났고, 그 하늘의 말을 한 것을 성경은 전하고 싶으신 것이다. 오늘, 그 백인(百人)대장의 믿음을 다시 보게 하심이다.
⁜사제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아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지만>하고 올리셨는데,
성경(聖經)을 앞 뒤 문맥을 연결하여 깨닫지 않고 단락으로 봐버리면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을 수도 없고, 하늘의 말을 할 수도, 전할 수도 없다.
땅의 말을 하는 사람을 땅에 갇힐 자로 죽었다고 하고, 하늘의 말을 하는 사람을 하늘에서 영원히 살 자로, 살았다고 한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단순히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로 들으면 신앙(信仰)이 아니다. ‘다시 죽을 사람이 아닌가’~ 오늘 되살아난 이가 ‘외아들’이다. *‘외아들,’ ‘모노게네스’는 ‘하나로 갖은 이’라는 뜻이다. 곧 선악(善惡)의 둘(2)의 법(法)이 아닌, 선악을 생명(生命), 그 하나로 가졌다는 뜻이다.
성경(聖經)은 하느님의 외아들, 곧 선(善)이 악(惡)품고 죽어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남자, 씨(제라- 후손- 아들- 말씀)가 없어 부끄러움과 고난(苦難)으로 살아가야 할 과부(寡婦)에게 외아들(그리스도)을 돌려주어 과부가 그 외아들로 거저 의로운 이로 다시 살아나, 일어나(로마3,24) 그리스도의 ‘한 말씀’으로 살아있는 새 생명이 되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 우리가 꼭 받아야 할 멧세지다.
(갈라3,22)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편114,1-2) 1 이스라엘이 이집트(세상)에서 나올 때 야곱 집안이 *이상한 말을 하는 민족을 떠나올 때 2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왕국이 되었네.
= 유다지파의 후손(後孫)으로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만 죄(罪)의 세상(世上)에서 나올 수 있다.’ 곧 우리의 모든 죄(罪)를 품고 죽으시고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주시는 ‘십자가(十字架)의 그리스도’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힘의 원리인 세상의 말이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 ‘주님의 말씀 만을 생명의 소리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한다.
(요한10,27)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보호자 성령께서 도와주신다. 말씀 안에 머무를 때.............
☨말씀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영원한 보호자로, 탄식의 기도로 가르치시는, 또한 생명으로 늘 함께 해 주시는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목소리, 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과부로 살아가는 저희 안에 충만 하소서. 오늘 과부가 외아들을 돌려 받았듯이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7,11-17)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3~14)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직접 예수님께 대해 '주님', 곧 '퀴리오스'(kyrios)를 사용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 전에 사용된 '퀴리오스'(kyrios)는 다른 이들의 고백이나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사용한(루카6,5) 것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7장 11~17절에 이르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그전까지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처음으로 '퀴리오스'(kyrio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요,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여기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는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의 마음이 동정으로 흔들렸다', '가슴앓이를 했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 과부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 과부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7장 13절은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과부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뼛속 깊이 동감하시고 계시는 장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이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2위 천주 성자이심과 동시에 불완전하며 연약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친히 겪고 이해하실 분이심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당장 아이로의 딸이나 라자로의 소생 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과부를 보시며, 창자까지 뒤틀려질 정도로 깊게 공감하시며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 특히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인간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를 멘 자들이나 과부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셨다. 그리고 죽은 젊은이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셨다. 하지만 유대인의 정결법에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 또는 주검에 관계된 것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레위22,4; 민수19,11.16).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 자체만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기에 딱하고 안쓰럽게 여기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 율법에 대하여 초월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말의 '관'은 시체가 들어있는 사방이 닫혀 있는 나무 상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소루'(soru; bier; coffin)의 원형 '소로스'(soros)는 시체를 지탱하는 '들것'(bier)이나 작은 버들가지로 만든 뚜껑이 없는 '위가 뚫린 관'(open coffin)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을 때 사람이 따로 관 뚜껑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4)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12절에 '죽은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는 '테트네코스' (tethnekos)라는 완료 분사로 쓰인 이미 '죽은 이'와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이미 죽은 시체를 향해 '젊은이야'(네아니스케; neaniske; young man)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체를 향해 '너에게'('소이'; soi; to you), 곧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도 생명의 주님의 되신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025년 09월 16일 화요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된 시대에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과부의 법적, 정신적, 물질적 삶을 유지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처지를 보신 예수님께서 그 과부에게 “울지 마라.”(루카 7,13)라고 말씀하시고 관에 손을 대십니다.
그 당시에 관이나 죽은 사람에 몸이 닿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민수 19,11.16 참조)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죽은 젊은이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시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것을 마치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여기시는, 당신의 굳건한 의지와 믿음을 보여 주시는 듯합니다.
그러고서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주님의 이 말씀은 잃었던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 강한 힘을 지닙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젊은이를 살리시면서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에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출발점이 측은지심, 다시 말해서 자비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비로운 마음과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하느님 현존이 드러나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이 자비심은 인간의 선행이나 믿음보다 앞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선행이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만으로 먼저 다가가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내 안에 비우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복음(루카7,11-17)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 백인대장의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라는 그 말을 칭찬하신 바로 그 뒤에 들어가신 나인(헬라어-황폐한)이라는 고을(폴리스-산위에 도시), 곧 율법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을 뜻한다.
앞7장 1절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와 같은 모습이다. 곧 율법에 젖어있는 나인이라는 고을이나 카파르나움(나를위한 고을, 성전)이나 모두 죽음을 향해가는 신앙의 고을, 성전이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 울게 한 일을 없애 줄 테니 ‘울지 마라’는 주님의 약속이다.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죽음을 멈추게 하는 손, 죽음에서 되살리시는 손이시다. 곧 새 창조다. (새 생명을 주시는 새 창조의 주님이시다.)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 죽이가 되살아나 말을 한다. 곧 ‘말 못하는 것이 죽은 것이다.’를 보여주심이다. 어떤 말일까? 앞 7절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곧 말씀이 죽은 이를 살리신다는 그 ‘진리의 말을 할 줄 아는 이가 산 자’임을 성경은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12절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 성경은 외아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안위, 평안을 위해 스스로 열성을 부리는 그 율법과 카파르나움의 선악의 법, 그 두 법을 하나로 갖은, 곧 심판이 아닌 생명 하나로 갖은 하느님의 외아들(모노게네스-하나로 갖은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사람을 되살리시는 그 진리의 그리스도를 보여주심 이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고 있는가? 내 뜻을 위해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예수님? 곧 대입 입시철에 묵주 100일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예수님? 우리의 안위와 평안, 건강을 위해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예수님?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복주시는, 그 기복(祈福)신앙 생활의 예수님을 믿으면 부수신다.
(마태10,34-35)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 예수님은 우리의 뜻을 부수신다. 그리고 당신의 대속(代贖)으로 당신의 생명을 넣어 살리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루가2,34)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 예수님의 대속, 그 죽음으로 죄의 저주에서 풀린 시메온의 고백이다.(창세49,5- 여호수아19,1- 참조)
곧 우리가 전(傳)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우리의 뜻에서 쓰러지게도 하고, 하느님의 듯으로 일어나게도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 선택받은 이만이 믿을 수 있는 진리의 말씀 이야기, 곧 복음(福音)이다.
* 신앙생활이란 하느님 앞에 나아가 영적인 씨름을 하는 것, 곧 하느님 통치 아래 순종하는 법을 배우며, 거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자신의 영성의 가난함을 울며불며 고백하며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통치 아래서 신앙을 유지하는, 곧 거룩한 인생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틈에 세상의 것으로 만족해 하며 안주하여 하느님과 나와의 정체성 그 깨달음의 치열함이, 내 문제가 아닌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된 것은 아닌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나인성의 과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다양한 슬픔과 시련, 작은 죽음을 맛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서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하느님- 창조 주, 나-피조물, 곧 창조 주의 죽음으로 피조물인 내가 사는 것. 하느님과 나와의 정체성이 아닐런지요. 우리, 나 자신의 스스로의 힘, 열심히는 살 수 없음입니다.
☨ 천주의 성령님!
나인과 카파르나움의 그 우리의 힘, 욕망, 이기심을 비워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힘, 생명, 사랑으로 채워 다시 살리심을 믿습니다.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