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1일 토요일<19-2구역미사 봉헌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말씀을 듣는 이의 행복 (루카11,27-28)
제1독서<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요엘4,12-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민족들은 일어나 여호사팟 골짜기로 올라가라. 내가 사방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려고 거기에 자리를 잡으리라.
13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와서 밟아라. 포도 확이 가득 찼다. 확마다 넘쳐흐른다. 그들의 악이 크다.
14 거대한 무리가 ‘결판의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결판의 골짜기’에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15 해와 달은 어두워지고 별들은 제 빛을 거두어들인다.
16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
17 그때에 너희는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사는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다시는 이방인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리라.
18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9 이집트는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되리라. 그들이 유다의 자손들을 폭행하고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유다에는 영원히, 예루살렘에는 대대로 사람들이 살리라.
21 나는 그들의 피를 되갚아 주고 어떤 죄도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주님은 시온에 머무른다.”
<화답송>시편97,1-2.5-6.11-12(◎12ㄱ)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
복음<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7-28)
2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요엘4,12-21)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8)
요엘서 4장 16절과 17절에서 장차 도래할 주님의 날에 큰 파괴가 있을 것이지만 선민 이스라엘은 보호받는다는 사실이 예언되었다. 이제 요엘서 4장 18절과 19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의 복락은 회복될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멸망할 것이 예언된다.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백성과 이방 민족들에게 이루어지는 극히 대조적인 상황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남쪽에 위치한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이집트와 동쪽에 위치한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에돔은 각각 황무지와 황량한 광야로 변하고 말 것이지만, 하느님의 백성이 사는 곳에서는 새 포도주와 젖과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등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요엘서는 주 하느님의 혹독한 심판의 예언으로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 부분에서는 회복과 축복의 예언이 주어진다.
이런 차원에서 요엘서는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혹독한 고난을 겪고 있던 남부 유다 백성에게 죄를 멈추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명하는 준엄한 말씀과 죄를 회개했을 때 주어질 벅찬 희망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예언의 말씀이 잘 어우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엘서 4장 18절의 서두에 나오는 '그날에는'에 해당하는 '웨하야 바이욤 하후'(wehaya baiyom hahu)는 문자적으로 '그날에는 ~이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와 대명사의 표현은, 없어도 의미 전달에 전혀 이상이 없지만, 이처럼 사용된 것은 주님의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문구는 요엘 예언자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그는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선민 이스라엘의 복락 회복과 멸망 예언이 주어지는 요엘서 4장 18-19절 및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의 평화 정착과 복수의 종결을 예언하는 요엘서 4장 20-21절로 이루어지는 요엘서의 마지막 예언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놀라운 상황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같은 문구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날에 하느님의 백성이 경험할 것으로 제시된 이러한 축복들은 요엘서에서 메뚜기 떼의 재앙과 가뭄의 재앙으로 폐허로 변했던 남부 유다 땅이 완전히 온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임을 조망하게 된다.
특히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는 예언은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소개되었음을 (탈출3,8; 신명6,3) 연상하게 한다.
'젖이 흐르리라'에 해당하는 '텔라크나 할라브'(thellakna hallab; will flow with milk)는 가축들이 내는 젖의 양이 엄청나게 많을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서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본문은 언덕마다(작은 산들이) 젖이 흐르리라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과장법적인 표현이지만, 심판 후 회복의 축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앞의 전반절에서는 포도주와 젖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장차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이 누릴 복락을 예언한 반면에, 후반절인 본문은 샘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이 누릴 복락을 예언한다.
즉 본문에서는 하느님을 근원으로 하는 생명의 물이 흘러 넘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진다.
본문에서 예언되는 주님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구원사적 측면에서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지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회복할 때, 그들은 그 성전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하깨1,5-11).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성전의 진정한 원형이신데(요엘2,21; 히브8,5), 그분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축복의 진정한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요한7,37-38).
셋째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궁전으로서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1코린3,16; 에페2,21).
넷째는 종말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받은 모든 이들이 생명의 물을 마실 것이라는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묵시21,6).
이 네 가지 경우는 다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란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집에서는'에 해당하는 '밉베트 예흐와'(mibbeth yehwah)라는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나는데, 이것은 회복될 성전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 에제키엘의 환시 가운데에도 회복된 성전의 문지방 아래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제시된다(에제47,1.2). 요엘 예언자의 묘사와 에제키엘 예언자의 묘사는 이와 같이 일치하는데, 그들이 말하는이 주님의 집(성전)은 사실상 주 하느님 자신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주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물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샘'에 해당하는 '마얀' (mayan)은 어원상 물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솟구쳐 나오는 샘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물을 중단없이 지속적으로 흘려보내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그 물은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고 예언된다. '시팀'(shittim)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아카시아 나무'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요르단 강 동편에 있는 고대의 성읍 명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카시아 나무는 흔히 알려져 있듯이 자생력과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가문땅에서도 잘 자란다.
만약 '시팀골짜기'가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아카시아 나무만이 자라는 가뭄의 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면, 본문은 하느님의 생명의 물은 그와 같이 바싹 말라 있는 땅에까지도 흘러 들어가 비옥한 땅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 된다.
또한 여기서 '시팀골짜기'는 요르단강 동편의 한 땅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사해 바다까지 이를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진술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완전히 죽어 있는 것들에게까지 흘러 넘쳐 그들을 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히쉬카'(wehishiqah; and will water)의 원형 '샤카'(shaqah)는 물을 들이키거나 토지에 물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을 의미하며(창세2,10; 19,32),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강한 의지로 그런 불모지에까지도 물을 적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신적 행위를 보여 주셨고, 이에 군중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힘의 원천을 비판하고 부정하였습니다(어제 복음 참조).
위태로운 예수님의 위치를 바라본 한 여인이 군중 속에서 나와 예수님의 신적 지위와 역할을 알리려고 합니다.
군중 속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칭송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여인의 선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두 개의 행복 선언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찬미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 행복 선언을 교정하시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십니다.
마리아께서 ‘행복하다’고 칭송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낳아 키우셨다는 사실에서 생각하여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1,45 참조), 실행하는 이들(8,21; 사도 1,14 참조) 가운데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향한 모성애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마리아께서는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지나치기 쉬운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제자 또는 참신앙인이 되려면 먼저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들은 바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참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
복음(루카11,27-28)
27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킵)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말씀 안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내용, 진리를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는 그 지킴이다. 그랬을 때 온갖 두려움에서 자유(自由)하게 된다.(마태10,26)
(필리2.16)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티토1,9)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진실)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대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 행복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여자의 목소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선생님(예수)을 배었던 모태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내 안에 간직한 것이 복이다.
(로마8,9-10)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아멘
=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젖을 얻어먹고 간직한 이가 복이다. *젖, 히브리어 ‘헤레브’(최상의 기름)에서 나온 단어다. 기름☞ 진리☞ 말씀, 성령.
(요한12,7)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기름이다.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구원의 진리로, 증언하실 진리의 성령이다.(요한15,26)
(이사55,1-2) 1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2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 사 먹는데, '돈 없이’다. 인간의 돈, 수고로 살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제사와 윤리, 그 인간의 수고다.
말씀을 좋은 것, 진리로 들어 간직하면 ‘마음이 기름이 된다’는 것이다. 곧 성령의 성전, ‘하늘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으로서의 젖’이 아닌 ‘아기가 먹는 젖’에 머무는 신앙이면 안 된다.
(히브5,12-14. 6,1-3) 5,12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14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훈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6,1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를 놓아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다시 기초를 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기초는 곧 죽음의 행실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 2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입니다. 3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성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보내신 지혜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성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음이다. 곧 하느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초보적인 것, 죽음(肉)의 행실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세례(육의 죽음), 안수,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 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회개, 믿음, 세례, 안수, 부활, 심판이 필요 없듯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있음을 믿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가 젖을 떼면 아버지가 큰 잔치(축제)를 벌인다.
(창세21,8)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 잔치, 축제(카니발)는 ‘고기가 없어 기쁘다’는 뜻이다. 곧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에 어린 희생 양(예수)의 고기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잔치다. 젖(헤레브)인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내 안에서 생명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마음에 간직(킵)했을 때 말이다. 세상의 영(말, 지혜)을 버리고, 부인하고~~~
(1코린2,12)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 인간의 의로움을 위한 가르침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에페2,8-9) 신앙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의를 진리로 믿기 위한 가르침 만을 받아야 한다.(마태6.33)
(1요한2,26-27)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간직)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 매일 미사(제사) 드린다고 받는 성령이 아니다. 독서(牘書), 복음(福音)말씀 안에 머물 때, 내 안에 계신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심(살으심)을 깨닫게 된다.(요한8,31-32)
☨ 하느님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깨닫고 믿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봉헌,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루카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젖과 말씀이 대조를 이룬다. 젖을 낸 가슴보다 말씀을 가슴(마음)안에 지킨, 간직한 그가 복이라는 것이다.
(1코린3,1-2)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영적인 말씀으로, 곧 하느님의 뜻으로 받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인간의 뜻으로 받는 그 dbr(肉)적인 사람, 그는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어제 묵상했듯 육(肉)적, 그 인간의 뜻을 위한 가르침이 더 멋져 보이고 진짜 같아 보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하는 신자(마리아)보다 바쁘게 활동하여 예수님을 시중드는 그(마르타)가 사람의 눈에는 더 진짜 같아 보인다.
(히브5,12-13) 12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 그래서 어미(육)의 젖을 떼야 하는, 곧 그 젖을 떼는 것이 잔치를 할 만큼 기쁜일 인 것이다.
(창세21,8)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시편131,1-2) 1 <다윗의 노래>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2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 육의 그 욕망의 자리를 버리고(떼고), 오롯이 하느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게 되어 아버지로 얻는 마음의 평온, 쉼, 안식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사, 기도, 활동 등 나에게서 나가는 나의 종교 행위를 의지한다면 육의 젖을 먹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구원의 진리, 그 약속의 말씀으로 내 안에 있다면~하늘의 용서로 하늘의 자유, 평화, 그 복을 누리는 영적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젖은 기름을 뜻하기도 하고, 그 기름은 성령을 뜻한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젖의 단어가 가나안이다.
(레위20,24) 24 너희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그 땅을,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겠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
=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말씀)을 젖과 꿀로 주신다. 곧 하느님의 약속(뜻)을 믿고 따르는 삶은, 젖의 축복의 삶이 되는 것이고, 꿀 같이 내 입맛에 맞는 곧 내 열심, 내 의로움이 진짜 같고, 맞는 것 같아 그 자기의 뜻(말)을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렇듯 말씀을 축복과 저주로 주셨다.(신명11,26~참조) 그러니까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축복(젖)과 저주(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뜻(지혜)으로 읽으면 제사와 윤리, 그 법이 되어 죄(저주)의 심판을 줄 것이고, 하느님의 뜻으로 읽으면 죄의 덮으심, 대속, 그 하늘의 진리를 깨달아 용서와 구원(축복)의 판결을 받는 것이다.
(야고2,12) 12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 제사와 윤리, 그 육의 젖을 먹는 사람들 앞에서 자유(십자가)의 법을 말하고, 그 자유의 법을 의지하고 누리는 삶을 사는 그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실행인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약속), 그분의 마음, 그 사랑이 흘러나와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 그것이 신앙 생활이다. 아멘!!!
~♡ ♡~
원죄없이 잉태된, 그 神의 자리, 그리고 천주의 모친이신 그 신의 자리에 성모님이 아닌, 쓴물(마리아)이 십자나무의 대속을 진리로 받아 마음에 지킨, 그래서 단물(은총)이 되신 성모님!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당신을 사랑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그 마리아처럼 되게 하소서~~아멘!!!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복음(루카11,27~28)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27.28)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베엘제불 논쟁을 마치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축복하였다.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축복한 이유는 그 어머니를 축복함으로써 그 자식을 축복하고 찬양하는 유대 관습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를 축복한 엘리사벳의 찬양에도 나타난다(루카1,42.43).
또한 이 여자의 외침은 당시 예수님을 적대하던 일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능력의 말씀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하지 못했던, 그때 모인 군중들 대부분의 감정을 대표해서 나타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배었던'으로 번역된 '바스타사사'(bastasasa; bare)는 '옮기다'를 의미하는 '바스타조'(bastazo)의 부정 과거 분사이다.
여기서는 '태어나게 했던'(that bare; gave you birth)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등장하고 있는 한 여자는 예수님께 '당신을 낳은 어머니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으며, 이것은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라고 노래한 마리아의 찬양(루카1,48)이 직접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루카 복음 11장 27절의 한 여자의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1장 28절에서 참된 행복의 조건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음을 밝혀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결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하는 '아쿠온테스'(akuontes; hear)는 '듣다'를 뜻하는 원형 '아쿠오'(akuo)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단순하게 듣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몰두하여 듣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지키는'에 해당하는 '퓔랏손테스'(phylassontes; keep it; obey it)는 '지키다', '보호하다'를 뜻하는 '퓔랏소'(phylasso)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참된 행복이라는 것은 육적 혈통이나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 복음 11장 28절에 나오는 '오히려'에 해당하는 '메눈'(menun; rather)이라는 단어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참된 행복의 조건이 오히려 영적인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 자신이 결국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예수님을 낳고 양육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켰기에 가능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타당한 진실인 것이다.
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찬우 다두 신부)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계속 지켜보던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보며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와! 저렇게 훌륭한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저런 아들이 있어서 틀림없이 기쁠 거야!’
보통 어머니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잘되어서 나중에 부양 받기를 바란다거나 자녀 덕에 사회에서 어깨에 힘주고 대접 받으며 다닐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예수님을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
오늘 복음을 읽고, ‘그렇다면 성모님께서는 행복하시지 않았다는 말씀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당신을 낳으신 성모님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실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성모님께서도 “하느님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생각하[신]”(41항)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나의생각을 하느님 말씀으로 채우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진짜를 가짜로 살게하는~
복음(루카11,27-28)
2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眞義) 곧 밀씀(로고스) 안에 속(레마)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여자가 한 소리다. 인간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진리(眞理)의 의로움을 치워 버렸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기적(奇蹟)과 능력의 주님으로 보고 한 소리다. 곧 진리를 말할 줄 모르는 자기 열심, 의(義)를 위해 신앙(信仰)하는 여자의 말이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많은 이들이 세례(洗禮)받기 전(前) 세상의 가치관, 그 세계관 그대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성경을 온전히 배우지 못하고 교리(敎理)와 사람의 규정(規定)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니 진리가 뭔지도 모르고 말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전례(典禮) 행위에 열심을 부리며 미사를 제사(祭祀)로 드릴 줄 밖에 모른다.
전례, 미사의 의미와 상관없는 때우는, 해치우는 젖먹이 신앙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말씀을 다시 듣고, 그 말씀 안에 진리를 깨달아 올바른 신앙을, 곧 ‘진리를 살아라, 지켜라’ 하신 오늘 말씀이다.
‘말씀을 듣고 지킨다(킵)’는 것은 깨달은 진리를 밖으로 흘리지 않고, 잃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는 지킴을 말한다. 그 마음에 간직한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1코린3,1-2)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히브5,12-13) 12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1코린2,4-7)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세상 창조(創造) 전, 미리 마련하신 지혜는 십자가(十字架)의 그리스도시다.
(1코린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진리)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1코린2,8) 8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 우리는 세례 받기 전 힘의 원리인 세상의 지혜(知慧) 그 세계관이, 또 세상의 복(福)이, 영원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임을 배우고, 버리고, 부인(否認)하는, 그 방법을 배웠어야 했다. 그러면 누가 세례를 받겠는가? 아니다 선택받은 진짜는 남는다.
세상 창조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은 남는다. 그리고 세례(洗禮)를 올바로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 진짜들이 가짜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로고스)을 다시 배워 그 말씀 속(레마)에 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말씀을 지킬 수도, 살 수도 있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세상, 그 힘의 원리로 살아온 나 자신을 버리고, 내 죄를 대속하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리로 지고, 그분의 이타의 삶을 진리로 말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10,42-45)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그러나 그 진리의 삶은 세상의 원리와 차원이 다르기에 우리의 힘으로는 어렵다. 협조자, 보호자이신 성령(聖靈)의 도우심, 이끄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두드리며 찾고 청하면 반드시 성령을 주신다’ 약속하신 것이다.
성령(聖靈)의 이끄심을 받은 사도(使徒)의 고백~
(2코린6,6-10) 6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진리의 말슴)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9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세상 사람들 눈에 우리는 ‘속이는 자, 인정받지 못하는 자, 죽어가는 자, 발 받은 자, 슬퍼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사라질 것이 아닌 영원한 있음, 그 진리에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