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2025. 10. 5. 오후 7: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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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7일 화요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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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요나.3,1-10)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화답송 시편130(129),1-2.3-4.7ㄴㄷ-8(3) ◎ 주님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주님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 깊은 구렁 속에서주님당신께 부르짖나이다주님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애원하는 제 소리에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 주님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주님감당할 자 누구이리까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풍요로운 구원이 있네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복음<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38-42)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제1독서(요나3,1~10)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5-6)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촘; tso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존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는 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6)

 

당시 니네베 왕은 아시리아 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샬만에셀 4세(Shalmaneser IV; B.C. 782-773), 혹은 앗슈르단 3세(Asshurdan III; B.C. 772-755)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나서 3장 6절은 니네베 왕이 주 하느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진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 대전에 더 이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권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왕복까지 벗고 대신 자루옷 입었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에 잿더미위에 앉았다.

 

'재'에 해당하는 '하에페르'(haeper)의 원형 '에페르'(eper)는  흩어 뿌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물질이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매우 가벼운 분말 상태의 찌꺼기인 재(ash)를 의미한다(민수19,10).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재 위에 앉거나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심적 고통을 나타내거나(2사무13,19; 욥2,8),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다니9,3).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를 자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자루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는 것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 누구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서쪽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온, 이름없는 한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위를 하느님 대전에 내려놓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에게 은총을 구했다.

 

이러한 아시리아 왕의 태도는 실로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구하는 자, 회복을 간구하는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 누구나 마땅히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온 국민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7-8)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에 매우 큰 위기가 닥쳤거나 최고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성이 없는 우매한 가축들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네베 성읍 전체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모두 다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통해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7~8절은 니네베 읍성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법 네 가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음식 뿐만 아니라 물까지 입에 대지 않는 완전한 단식, 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 것,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각기 악에서 떠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네번째 사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즉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8)

바로 이것 때문에 심판이 닥쳤으므로 백성들에게 악과 폭행을 버리고 선한 길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돌아서야 한다'에 해당하는 '웨야슈브'(weyashubu)의 원형 '슈브'(shub)는 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폭행'에 해당하는 '훼하마스'(whehamas)의 원형 '하마스'(hamas)는 어원상 강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악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죄악이었다(창세6,11.13).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등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또한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서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과 자연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른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해야만 한다. 옷이 아니라 심장을 찢으며 진실로 회개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인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와마리아

(루카10,3​8-42)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율법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읽어 행위의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여자와 그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찾고자 들음의 신앙을 사는 여자의 이야기인 것, 사람의 규정과 교리의 신앙은 예수님께 다가가 사람의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기도)

그런 이들은 마르타 처럼 말씀에 열중하는 이들을, ‘활동에 열심 하지 않는다‘ 비난하며 싫어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말하면 개신교 신자 같다느니 하니,  언제부터 성경이 개신교의 것이 되었는지 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교회 다닌다’하면 개신교 신자로,~ ‘기독교 신자’라 해도 개신교로 듣는다. 그 만큼 우리 신자들은 성경의 단어와도 멀어져 있고 말씀도 모르고, 말하는 것도 어색해 한다.

그러니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보다, 3~40분 걸리는 미사를 제사로 드리는 그 종교 행위에 만족해 하고, 좋아해 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聖 예로니모)

그리스도를 모르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그래서 죄인인 내가 그분과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모른다면, 믿지 못한다면, 그래서 내 밖에 그리스도로 시중드는, 섬기는 그 신앙을 不義라 하신 것이다.(마태8,21-23참조)

어느 사제께서는 ‘성경보다 교리가 먼저’라고 여기 굿뉴스에 묵상글을 올려 신자들을 헛 갈리게 하는데, 아무래도 그분은 성경을 모른다는 결론이다. 성경을 올바로 보셨다면 그런 묵상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신자들이 얼마나 있겠냐는 것이다. 대부분 사제의 글이라면 맹종으로 신자들은 그냥 ‘딸랑 딸랑’이니 말이다.

 

(신명12,28) 28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

= 말씀을 듣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 좋은,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하느님의 눈(뜻, 지혜, 계명)으로 보고 듣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관점)으로 보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마르타 신앙이 된다는 것이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좋은 일, 옳은 일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일 한 가지 뿐인 것, 예수님께서 그 한가지 일을 하셨을 뿐이라 하셨쟌은가(요한7,21)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하느님의 일은, 그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길(십자가)을 구원(생명)의 진리로 믿는 그 한 가지 뿐인 것이다.(요한6,29참조)

그러나 천주교나 개신교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기 위한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본당(창4동)의 경우 많은 단체, 심지어 취미 단체도 많지만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단체가 없다. 

참으로 답답해서 주임사제께~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단체를 부탁드렸더니 사정상, 여건상 힘들다 하신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그분의 말씀 공부가 다른 단체들(세상적)에게 밀려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말라1,10) 10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너희 손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으리라.

= 지금은 제사 드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감사의 잔치(미사-에우까리스티아-①용서하다 ② 감사하다 ③ 이해하다.)를 드릴 때인 것이다.(히브서10장참조)

 

(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 된 곳(십자가)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 ! 오늘 같은 날에 주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고, 이웃과 매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 <한재호 루카 사제의 묵상글>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위치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는 ‘다가갔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 ‘에피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본디 그 뜻이 ‘위에 서다.’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실 때 마르타는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신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아래에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위치에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결과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다그치기에 이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느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그분 사랑에 맞갖은 사랑법입니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을에 머무르기로 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초대로 그의 집을 방문하여 마르타와 그녀의 동생 마리아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고마르타는 여러 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곧 마리아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

마리아는 오로지 한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시선을 향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는데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곧 봉사에 헌신한 마르타는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르타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자신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에 따라 예수님을 모시려고 하였습니다(10,40 참조). 

초대받은 예수님께 집중하였던 마리아와 달리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지만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기보다 그분을 그저 손님으로 모시려는 데만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를 되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제자의 삶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핵심이고그 밖의 모든 것은 이차적일 뿐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이루는 관계 정립을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7주간 월/화요일] 묶어서

 

좋은 몫을 빼앗기지 말자.

복음(루카10,25-42)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 문자 그대로 율법(律法, 제사와 윤리)으로 읽었느냐? 율법의 실체인 진리(眞理)로 읽었느냐? 다시- 인간의 의로움을 위한 율법으로?, 하늘의 대속으로 거저 받는 의로움, 그 은총(恩寵, 은혜)의 복음으로 읽었느냐? 물으신 것이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그렇게 하여라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마음, 정신, 힘,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면 당연히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율법(律法)으로는 불가능(不可能)하다’고 야고보서(2,8-10)는 말한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 이웃을,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比喩) 말씀으로~

3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强盜)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요한10,8)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强盜)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진리이신 예수님 이전의 율법 자들이 도둑이며 강도들이라 하신 것이다, 곧 율법(제사와 윤리)을 열심히 지킨 그 인간의 의로움을 지켜라 강조하여, 율법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그 진리를 헛되게 하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로 얻는 하늘의 의로움을 받지 못하도록 빼앗아 버리는 도둑이며 강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이 옷(의로움의 옷)을 빼앗긴 것이고, 그것이 죽음의 상태인 ‘초주검’인 것이다.

 

(1코린15,56) 56 죽음의 독침(毒針)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로마3,20)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자신을 돌아보라고, 알아들으라고 비유로 생명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 자들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나빠서, 못되서가 아니라 율법은 그 초주검의 사람을 도울 방법(길)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스폴랑코니조마임- 慈悲),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을 비유(比喩)한 사마리아인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기름- 성령. 포도주- 계약의 피. 율법, 그 옛 계약으로는 돌볼 수 없는 진리(眞理)이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새 계약의 피(血)다.

 

(마태26,28) (聖餐禮) 28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두 데나리온- 신. 구약을 뜻하는 것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얻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곧 하늘의 영원한 생명,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

 

(요한5,39)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로마3,24) 24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요한4,9)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앞 28절에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마음, 정신, 힘,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람하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타(異他)의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으로 다가오신 사마리아인의 자비(慈悲)를 받아라’다. ‘너도 그렇게 하여라. 받아라.’ 하신 말씀이다.

 

(1요한3,18) 18 자녀 여러분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 그리스도의 진리의 자비, 사랑을 먼저 받아야 그 구원의 자비(慈悲), 사랑을 이웃에게 주어 이웃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자비, 사랑이 너무 감사(感謝)해서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現象)이 이웃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 마음 까지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결과인 것이다. 나는 그 이웃 사랑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하늘의 자비(慈悲), 사랑을 더욱 깨달으려 매일 성경(聖經)을 묵상(黙想)하고 기도(祈禱)한다.

결론(結論)<책-황금률 중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기에 앞서, 우선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을 만났기에 생명을 구했듯이 너도 사마리아인을 만나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또 율법(제사와 윤리)주의 신앙을 열심히 하면 천국(天國)간다고 여기는 열심신자 일수록 초주검의 과정을 통해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려는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참뜻이다. -이상-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사마리아인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돌보심, 곧 그분의 기름(성령), 포도주(새 계약의 피)를 깨닫기 위한 신앙이 아닌 자신의 소망, 뜻, 의로움을 위해 그분을 섬기려는 신앙(信仰)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마르타이다.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마리아는 예수님의 영(靈), 새 계약을 얻기 위해 말씀을 열심히 듣는다.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르타 처럼 섬기는 신앙을 말하면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는 곧 하느님의 은총(恩寵), 은혜(恩惠)로 거저받는 신앙(信仰)을 말하면 싫어한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知慧)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로 깨달아야하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해야한다고 하면 싫어한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方言)한다’고 핍박한다. 그러나 깨달은ㅁ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필요한 그 한 가지, 그 몫을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 ‘다가가’ 34절에서처럼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면 하느님의 뜻인 용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마르13,1- 외 다수) 그러나 마르타 처럼 인간이 예수님께 다가가면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불만, 불법, 불의가 된다. (마태26,49와 다수) 그래서 성경(聖經)은 34절에 ‘다가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40절의 ‘다가가는 마르타’의 모습을 대조(對照)하여 보여준다.

 

* 즈카리야의 노래중~

(루가1,68-69. 78-79)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인간은 구원자를 찾아갈 수가 없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자께서 다가와 주시는 것이다. 다만, 다가와 주시는 그 그리스도를 율법(律法)으로 섬기느냐?, 다 이루어진 진리(眞理)로 깨닫느냐? 그것이 문제(問題)다.

 

☨ 보호자 성령님! 저희 모두가 좋은 몫인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이 다가오시어 기르치시고 의탁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0,38-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

 

루카 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앞의 10장 25~37절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루카 복음 10장 27절에서 언급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보기를 역순으로 하나씩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의 교훈은 '이웃 사랑의 모델'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느님 사랑의 모델'은 '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대의 랍비의 문헌들은 여자들을 탐욕스럽고 호기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며 수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여,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은 '불신자나 야만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예수님 당대의 여자들은 그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과 이야기하고'(요한4,27), '여자들을 가르치고'(루카10,39), 그리고 '병든 여자를 치유하기도'(루카13,10; 마르1,31)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버림받고 소외받은 대표적 계층인 여자들을 수용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남녀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루카19,10).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타라는 여자가'에 해당하는 '귀네 데 티스 오노마티 마르타'(gyne de tis onomati Martha; a woman named Martha)에서 '여주인'이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여성형 고유명사 외에 '한 여자'에 해당하는 '티스'(tis; certain)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gyne; a woman)는 처녀든, 기혼이든, 그리고 과부든 모든 연령 계층의 여자를 일컬들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루카는 '한 여자'라는 기록을 첨가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0장 39절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앉아'에 해당하는 '파라카테스테이사'(parakathestheisa; sat)는 '옆에 놓다'를 뜻하는 '파라카티죠'(parakathizo)의 수동태 분사이다.  

수동태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발치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말씀을 들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은 당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즉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당대의 통념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여인들의 지위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인 하느님의 말씀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 민족 등의 모든 구분과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전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되는 '에쿠엔'(ekuen; and heard; listening)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kuo)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마리아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루카 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분주하였다'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periespato; was distracted; was cumbered)의 원형 '페리스파오'(perispao)는 '둘레',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 '당기다'를 뜻하는 동사 '스파오'(spao)의 합성어로서,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마르타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분주하고 들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10장 41절과 42절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마르타는 음식 준비도 하면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즉 마르타의 마음은 현재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신경을 뺴앗겼던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40절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의 말 속에는 음식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혼자서 편안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 얄미운 심정이 들어 있다.

마르타의 이러한 요청의 뉘앙스는 몹시 바쁜 와중에 있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과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연민을 품은 애정 가지고(반복된 호칭의 의미), 마르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여기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에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메림나스'(merimnas; you are orried; you are careful)는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마르타는 음식을 무엇을 준비할까, 좌석배치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지금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걱정하는구나'로 번역된 '토뤼바제'(thorybaze; upset; troubled)도 '어수선하다', '어지럽다'를 뜻하는 '토뤼바조마이'(thorybazomai)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서, 음식 준비로 인해 분주하고 어수선한 마르타의 심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택한, 말씀 경청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당시 마르타가 했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주도록 일러달라는 마르타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선택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has chosen)은 항상 중간태로만 사용되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마이' (eklegomai)의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혹은 '그녀 자신을 선택했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에는 마리아가 '좋은 몫'('아가텐 메리다'; 'agathen merida'; what is better; good part)을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파이레테세타이'(uk aphairethesetai; will not be taken away)는 부정어 '우크'(uk; not)와 '제거하다', '가져가 버리다'의 뜻을 지닌 '아파이레오'(aphaireo)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 나란히 쓰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타의 항의조가 담긴 요청이나 예수님의 권고로 인해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몫을 선택하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타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0251007일 화요일

[연중제27주간 화요일] (이찬우 다두 신부)

 

때때로 가정 방문을 하면, 신자분들은 신부님이 오셨으니까 …….’라고 하면서 아주 바빠집니다.

신부인 저에게 무엇인가를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남는 집 축복식이 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조심스럽게 축복식을 부탁하셨고 저도 고민하다가 수락하였습니다.

축복식을 마치자 신자분이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셨는데 봉투였습니다.

같이 식사도 할 수 없고 따로 준비한 것도 없어서 뭐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한사코 거절하고는 시원한 물 한 잔을 청하여 보답으로 받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신부가 방문할 때 음식 등을 준비해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교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가정 방문을 하는 까닭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향한 마음과 그분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분들은 늘 바쁩니다.

그래서 가정 방문을 나갈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도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을 위하여 노력하는 그 마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야기해 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

무엇보다도 소중한 예수님이신데, 마르타는 정작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음식과 집안 정리에 가 있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가 미워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옆에 와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나의 열심은 믿음을 낳지 못했다.

 

복음(루카10,37-42)

먼저본문 앞절로~(어제 마지막 절)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율법의 섬김은 진리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고자비를 베풀지도 않았음으로, ‘율법 교사야 가서 너도 사마리안의 이웃으로그 자비를 받아라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그 그리스도의 자비를 먼저 받아야 그 그리스도의 자비를 이웃에게 전해이웃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다.’까지 공부했다.

그러나 그 주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먼저 자신이 자비를 베풀기 위한 율법의 사람과말씀을 알아듣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얻기 위한 사람곧 진리의 길을 벗어난 율법의 섬김의 길과진리의 길을 걷기 위한 깨달음의 길그 두 길을 두 여자의 모습으로다른 관점으로 오늘 말씀하신다.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말씀과 영원한 생명에 관심(關心)이 있는 여자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율법(제사와 윤리)의 시중, 섬김은 ‘깨닫고자 말씀에 머무는 꼴’을 못 본다. 열심히 본당(本堂)활동하시는 교우가 말한다. ‘성경은 안다면서 왜 본당에서 활동은 안 하십니까?’ “성경(聖經)을 알기에 안합니다.”라고 답한다.(로마10,1-3 에페2,9-10)

말씀을 깨닫기 위해, 믿음을 낳기 위해, 곧 묵상(黙想)글을 쓰기 위해, 말씀을 보고, 묵상하고, 기도(祈禱)하기를 반복, 반복(反復)한다.

다른 분의 글, 강의를 찾아서 기본 4시간, 그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사도(使徒)가 그랬듯, 나에게도 산고(産苦)으 시간이다. 나 또한 외롭지 않게 교우(敎友)들과 함께 말씀으로 시중드는, 섬기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본당(本堂)에 말씀을 위한, 깨닫고 믿기 위한 단체가 한 곳도 없다. 그래서 못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레지오 1~2시간, 성령기도회 2~3시간, 그리고 매일미사 1시간, 그 본당에서의 시간, 활동은 편했고 쉬웠다. 외롭지도, 산고의 시간도 없었다. 모임이 끝나면 교우들과 함께 식사, 커피타임, 등 인간 애(愛)로 즐겁고 재미있었다. 열심한 신자(信者)라는 자부심과 뿌듯함도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나의 열심은 믿음을 낳지 못했다. 마르타처럼 염려(念慮)와 걱정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 율법(律法)의 섬김은 믿음과 상관이 없기에 열심 할수록 염려와 걱정은 그대로 남는다.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 예수님께서 하신 ‘한 가지’일을 믿는 것이다.(요한7,21) 곧 우리의 죄(罪)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시고 부활(復活)하심으로 당신의 의로움을 전가(傳家) 시켜서 구원(救援)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요한6,29)

어느날 폭풍(暴風)갈은 시련(試鍊)이 왔고 고통(苦痛)에 시달렸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죄의식 이었다. 형제, 친구, 교우, 그리고 사제(司祭)들을 찾아 간절히 바랬지만 도와주지 못했다. 아니 도와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모두 진리의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렸다. 말씀에 머무르며 살았다. 그리고 깨달음과 믿음으로 자유하게 되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죄인(罪人)들을 섬겨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알았다. ‘사랑은 받는 것, 하느님의 사랑을~’ 수시로 변하고 변질되는 인간의 감정,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말씀으로 섬겨 살려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회개(悔改)란 반성이 아니라 자기의 의(義)를 위한 신앙에서 ‘하느님의 의(義)를 위한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삶으로 돌아서는 것(유턴)이 회개라는 것.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폭풍(暴風)같은 시련(試鍊)이, 그리고 내 안에 죄(罪)가, 말씀으로, 믿음으로, 자유로, 이끌었던 하느님의 은총(恩寵), 은혜(恩惠), 관용(寬容)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살게 되었다.

 

(로마5,20-21)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3,24-26)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 지금, 이 시대는,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교리(敎理)를 열심히 지킨 그 인간의 행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열심,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代贖), 그 십자가(十字架)의 의(義)를 진리(眞理)로 믿기 위한, 깨달음을 위한 신앙(信仰)을 살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 날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 욕망(慾望)을 위한 삶에서 자유(自由)롭지 못하기에 더욱 그렇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종입니다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게 하시소말씀을 깨닫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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