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열두 사도 (루카6,12-19)
제1독서<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에페2,19-22)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화답송>시편19,2-3.4-5ㄱㄴ(◎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루카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제1독서(에페2,19~22)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19~20)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19)
에페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일치의 당위성이다. 에페소서 2장 19~22절은 교회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된 절대 유일한 하나의 구원 공동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였으나(에페2,11~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수평적 평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에페2,13~15절),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하느님과 수직적 평화를 이루었다는(에페2,16~18절) 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페소서 2장 19절 이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11~18절에서 갓 교회에 속하게 된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자기들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제 에페소서 2장 19~22절 단락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을 대상으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여 형성된 단일 공동체라는 중요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케티'(uketi)는 '더 이상 ~이 아니다'(no more)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 부정어이다. '크세노이'(ksenoi)와 '파로이코이'(pharoikoi)는 '외국인' 혹은 '이방인'(나그네)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강조 부정어와 더불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를 반복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느님께 나아감을 얻는 특권을 받았으므로, 이제부터 이방 성도들 역시 더 이상 천국의 시민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동일하게 앞선 부분의 부정을 통하여 뒷부분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우케티~ 알라'(uketi ~alla) 용법을 사용하여 이방 성도들이 '외국인'과 '이방인'이 아니며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고 '하느님의 한 가족' 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갖는 신분의 변화는 첫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 해당하는 '하기온'(haghion)은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사용되던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다(다니7,18).
사도 바오로도 본문에서 성도를 구약적 개념으로서 사용하였다. 즉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 지리적으로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완전히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은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여기서 '가족'에 해당하는 '오이케이오이'(oikeioi)의 원형 '아이케이오스'(oikeios)는 '가족','식구','권속'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임을 자랑하며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한 가족'은 하느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0)
에페소서 2장 20~2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터)위에 세워졌고 그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에페2,20~21),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새로 난(거듭 난) 성도들이다(에페2,22;1코린3,9).
여기서 '사도들'과 병행하여 쓰인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창설한 후에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초대 교회시대에만 있었던 신약 교회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1코린12,10.28.29; 에페4,11).
한편,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란 표현은 다음의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코린토 전서 3장 11절에서는 성전 건물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바로 그 전절인 코린토 전서 3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 자신이 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기초 역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라고 보고,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복음 전파에 의하여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로, 본문의 '기초'를 건물의 '기초'라고 보지 않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지어진 새 성전에 놓인 최초의 돌로서, 그 위에 계속해서 다른 성도들이 돌이 되어 세워질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초'로 번역된 '테멜리오'(themelio)가 '기초','토대','터' 뿐만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또한 친히 교회 구성원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모퉁잇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우'(akrogoniaiu)의 원형 '아크로고니아이오스'(akrogoniaios)는 '끝'(마태24,31), '머리'(히브11,21)를 의미하는 '아크론'(akron)과 '모퉁이'(마태21,42), '구석'(사도26,26)을 의미하는 '고니아'(gonia)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모퉁잇돌'(the chief corner stone), '구석머리'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서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들을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잇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다.
본문은 이사야 28장 16절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교회가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친히 자신이 직접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이사28,16)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우리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의 축일을 지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에 등장하는 이름 말고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어서, 다른 사도들에 견주어 덜 알려진 것이 사실입니다.
시몬 사도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의 곳곳에서 늘 열혈당원으로 소개됩니다.
‘열혈당’은 당대 패권을 쥔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려고 기원후 6년 무렵 조직된 유다 민족주의적 당파로 ‘젤롯파’라고도 불립니다.
시몬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러한 독립 운동에 가담할 만큼 열성적이었고 또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인물로 보입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과 이름이 같습니다.
루카 복음의 열두 사도 명단은 유다라는 이름과 함께 그를 야고보의 아들로 소개하지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 대신에 ‘타대오’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타대오는 아마도 유다 사도의 그리스식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는 함께 선교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라는 초기 문헌에 따르면, 두 사도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함께 여행하며 복음을 선포하였고, 선교 영역을 페르시아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 모두 페르시아 지역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들의 순교에 대하여 여러 전승이 있는데, 시몬 사도는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하였고, 유다 사도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 작품에 두 사도가 표현될 때, 시몬 사도는 톱과 함께, 유다 사도는 창과 함께 묘사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가운데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루카 10,1 참조).
고된 선교 여정 가운데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시몬과 유다 사도는 그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듣고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러 다닌 사도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정천 사도 요한 신부)
10월 28일 [성 시몬 사도 축일]
안식(쉼)인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가?
우리의 죽음을 먹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내 주시는 그리스도~
독서(에페2,14-22)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대속의 죽음)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피(血), 그 새 계약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증언하신다.(로마8,1-16참조)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초로 그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1코린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모든 길(道), 방법은 성경에 주님 말씀에 있다.
복음(루카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祈禱)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빛으로)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 예수님께서 밤(죽음)을 기도로 품으시고(먹고) 당신의 생명(빛)을 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품으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빛, 생명을 받은 이들이 완성을 뜻하는 열둘(12)이며 사도다.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 배신자 유다도 열혈당원 이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 사람들, 더러운 영의 거짓 가르침으로 하늘의 대속인 구원의 새 계약, 그 진리의 말씀을 몰라 온갖 질병(죄 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우리, 나)을 모형한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 죄인, 질병, 그 어둠을 품으시고 곧 대신 죄와 질병으로 죽으시고 주신(나은) 주님의 생명의 빛, 그 힘이 고쳐주신 것이다.
(이사53,5)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 십자가의 대속, 그리스도의 죽음, 그 피의 새 계약으로 나았다. 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목숨을 값으로 치르시고 죄, 질병, 죽음에서 속량 해 주셨음을, 그러므로 자신들의 치유, 용서 받은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자신의 뜻, 이름, 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유다 이스가리옷 만이 배신자라 하신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렸다. 그런데 성경은 왜 유다만 배신자라 하는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유다 이스가리옷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독립투사답게, 멋지게 자결해 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진짜 배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 번씩이나 심한 말을 하며 배반했던, 그러나 염치 없이 돌아온 베드로를 의(義), 선(善)이라 한다.
그리스도께 돌아옴, 그것이 죄인들이 의인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착하게, 의롭게 살라고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려는 구원을 주지 못하는 그 자기 의로움의 길에서 (버리고) 돌아서 구원의 계약, 약속인 하늘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 복음인 십자가의 당신(그리스도)께 돌아오라고 회개를 선포하시러 오신 것이다.
*회개-메타노이아- 가던 방향(方向)에서 돌아서 옴.
(마르1,14-15) 14 요한(구약, 율법의 의로움)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로마3,20-21)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신 예수~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베드3,18)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약속)에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보호자 성령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복음 (루카6,12-1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2~13)
루카 복음 6장 12절에서 1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임명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공관 복음서(마태10,1~4; 마르3,13~19)에 다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사명이 복음 전파에 있음을 보여 주는 문맥에서 12사도의 명단이 나오는 반면에, 마르코와 루카 복음에서는 제자들을 택한 이유가 예수님께 임박한 고난과 핍박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이 부각된다.
루카는 마르코와 같은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산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 토 오로스'(eis to oros; into a mountain)라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열두 사도를 택하기 직전의 장면을 다르게 소개한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의 임명 전에 홀로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셨다는 사실은 루카 복음사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은 특히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종종 나타난다(루카3,21; 9,18.28.29; 11,1; 22,41).
그렇기 때문에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은, 열두 사도를 선택하는 일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너무나 중요한 일어라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강림 이후에는 복음 전파의 주역이 되며 또한 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신 후 그 다음 날에 제자들을 부르셨으며, 이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다수의 제자들의 무리 속에서 열두 제자를 특별히 구별하신 것이다.
여기서 '뽑으셨다'에 해당하는 '에클렉사메노스'(ekleksamenos; he chose)의 원형 '에클레고마이'(eklegomai)에 남성 단수 주격 접미어가 붙어 있어서 예수님 당신 자신이 택하심의 명백한 주체임을 보여 주고 있다.
특별한 자격 요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깊으신 과 은총으로 부름받은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직책을 주셨다.
'사도' 즉 '아포스톨로스'(apostolos)라는 단어는 '어떤 자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어 파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아포스텔로'(apostello)의 명사형이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는 전권대사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선포할 사람에게 붙여졌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루카9,10; 11,49; 17,5; 22,14; 24,10), 이렇게 사도직에 대한 잦은 언급은 예수님의 지상 선교 활동과 예수님 구원 사업의 동역자로 부름받은 제자들에 의한 교회 시대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있다.
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이찬우 다두 신부)
어떤 학원 선생님이 잘 가르치고 똑똑하다고 합시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찾아다니겠습니까? 아니면 학생들이 선생님을 찾아가겠습니까? 당연히 학생들이 찾아갈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명한 라삐나 스승에게는 제자들이 먼저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제자들을 뽑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을까요?
‘산’이라는 장소를 생각해 봅니다. 산은 조용하고 한적하여 외롭게 느껴지는 곳이지만, 그렇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시고자 산에 올라가시어 하느님을 만나셨듯이, 우리에게도 혼자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곳을 찾기 힘듭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옛날에는 가족이 다 함께 모여서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요즘은 바쁘다는 이유로 제각각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밥을 먹습니다.
또한 카페에 가서도 함께 이야기 나누기보다는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그 안의 세상만을 바라봅니다.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누워 하루를 정리하기보다는 스마트폰을 보다가 잠이 듭니다.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본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까닭일까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고독과 외로움과 친해져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보다는 조용한 침묵을 선택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2025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독서(에페2,19-22)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 땅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됨이다.
복음(루카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 예수 밖에 타자(他者)로 계신 하느님께 기도하심 아니라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신 것이다. 곧 하느님의 뜻을 확인 , 깨닫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워야할 기도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 12사도 안에 배반이 있음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 교회에서 열의 하는 사도, 제자의 신분에 만족해 하며 자랑스러워하는데 멈추면 안된다. 말씀으로 질병을 고치려 애를 쓰는 열심한 신자로 남아도 안된다. 왜? 사도, 제자, 신자, 그들 안에 죄(罪)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는 하늘의 사람, 성전,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죄(罪) ‘하마트리아’- 과녁을 벗어나다. 과녁, 목적을 보는 눈이 없어서(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눈이 없어서) 목적을 잘못 보고 그곳으로 쏴 버리는 것, 하마트리아 죄다.
‘하마트리아’ 단어를 풀어보면 ‘하’(부정 접두어) ‘마르티아’(마르투스-메로스)의 합성어로 마르투스- 증인, 증거 + 메로스 - 한쪽 부분, 그리고 마르투스는 말티온에서 온 단어로 같은 증인, 증거인데 말티온은 ‘법궈 안에 십계명’ 이라는 단어로 쓰인다.
그러니까 그 계명이 아닌 것, 그 계명의 진의가 아닌 것, ‘하말티온’ 죄(罪)다. 말씀, 계명을 하느님의 진의가 아닌 법으로, 곧 율법을 내 짝, 남편으로 붙들어 버리면 하마트리아, 하말티온으로 죄가 되는 것이다. 한 쪽 부분(메로스)이 엉뚱한 남편으로 붙어 버라면 ‘하메로스’ 죄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 도덕과 윤리로 곡해해 붙들어 버리면 그 남편과 생산해 내는 것이 행위만 나오는데 그것이 죄다.(로마3,20 갈라3,10)
인간의 의로움, 행위를 진리로 여겨 그것에 멈추면 하늘의 용서, 의(義), 생명을 받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義)는 완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선악의 법을 깨고 선악에서 벗어난 그 진리를 짝으로 붙들면 자유, 생명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하가르라는 율법을 만나 이스마엘 이라는 죄를 낳았듯이(갈라4,25), 자유부인 사라이라는 은혜를 붙들면 하늘의 어머니가 된다. (갈라4,22-26참조)
죄의 이름은 선악이다.(창세2,17) 하느님께서 주신 나무(말씀) 열매를 보기에 좋은 선악과로 보게 되면, 선악의 법으로 먹고, 죄만 출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세상, 율법의 세상에서는 그 선악으로 출산 되는 행위의 열매들이 멋지게 보인다. (죄를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안된다.)
이 아담(사람)들, 율법의 세상에서는 죄가 멋지게 보인다. 깨끗하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순결해 보인다. 왜? 율법과 결혼해서 낳은 행위라는 열매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럽고 추한 것, 도덕과 윤리를 어긴 것이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도 죄다. 그러나 우리가 깆고 있는, 세상이 보편적으로 정해 놓은 상식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것은 죄가 아닌데 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다.
(루가16,15)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루가18,11-14)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의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성전, 아들이 된다.
(1티모1,15) 15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마음, 귀를 열어주시어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