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0일 목요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루카13,31-35)
제1독서<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1ㄴ-39)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화답송>시편109),21-22.26-27.30-31(◎26ㄴ) ◎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원하소서.
○ 하느님, 당신은 저의 주님.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돌보소서. 당신의 좋으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저는 가련하고 불쌍한 몸, 마음속에는 구멍이 뚫렸나이다. ◎
○ 주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당신 자애로 저를 구원하소서. 당신 손길을 그들이 깨닫게 하소서. 주님, 당신이 이루셨나이다. ◎
○ 나는 입을 열어 주님을 한껏 찬송하고, 많은 이들 가운데서 그분을 찬양하리라. 그분은 불쌍한 이의 오른쪽에 서시어, 심판자들에게서 그를 구원하시네. ◎
복음<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루카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8,31ㄴ-3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5)~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37~39)
성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을 이어주시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에서 드러난 그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는 게 무엇인가? 성부 하느님 대전에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공격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끊어 버리도록 우리를 공격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탄이 공격하는 가능성에 대해 일곱 가지 도구를 지적한다.
1) 환난(anguish)-외부로부터 오는 압력, 재난과 시련, 영적 고통을 말한다. 이 환난과 시련은 내 잘못으로 올 수도 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환난이 오면, 왜 나에게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원망과 의심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극복하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고 미래의 영광과 축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
2) 역경(distress)-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곤고(困苦;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뜻- 보통 '좁은 장소' 혹은 '여유가 없다'라는 의미로 쓰임)라고 번역했다. 역경이 닥칠 때, 곤고할 때, 내가 마치 새장같은 아주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불안하고 외롭고 고독할 수 있으며, 믿음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3) 박해(persecution)-이것은 환난과 시련과는 조금 다르다. 노골적으로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거부하고 방해하며 공격하는 핍박을 말한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했다.
4) 굶주림(famine)-이렇게 신앙때문에 믿음의 진리를 추종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고,어디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굶주림, 기근이라 한다.
사도 바오로도 복음을 전하다 이것을 겪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느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도 그곳에서 기근을 겪게 되어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고, 아내 사라이를 빼앗길 뻔하고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굶주림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에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5) 헐벗음(nakedness)-우리가 복음을 갖고 복음에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다 보면, 가끔 사도 바오로처럼 헐벗음(赤身; 적신)을 경험하게 된다. 헐벗음은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함을 말한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11,27)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존재이지만 사는 동안 만이라도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하고 수행하다 보면, 이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위험(peril)-이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을 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질병과 생존의 위기, 죽음의 협박 즉 원수로부터의 살해의 위협을 받고 모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히브11,36-37참조).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지 않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함을 깨우쳐 준다.
7) 칼(the sword)-칼은 죽음과 전쟁을 상징한다. 사람은 누가 죽이겠다고 하면 사람은 죽음앞에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국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한다. 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고, 흔들리기 쉽다.
칼이란 우리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 동정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순결(정결)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등반을 통해 완덕의 산을 오르면서 힘이 들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캐면서 완덕의 산 정상에 올라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선언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8,37)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흔들려고 하는 7가지 장애물들이 있었듯이, 사도 바오로는 이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흔들려고 하는 10가지 장애물들을 열거한다.
1) 죽음(death)-육체적 죽음과 죽음에 따르는 고통을 말한다(1코린15,55). A.D. 2세기의 순교자인 성 뽈리카르포는 화형대의 기둥에 묶여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87년동안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찌 그 이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불태워 죽인다 해도, 나는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은 나의 기쁨입니다." 라고 말했다.
2) 삶(life)-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의 삶을 말하며, 죽음과 반대 개념이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특권, 쾌락, 즐거움이 이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광야의 유혹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나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던 그것이다."
3) 천사(angels)-여기서 말하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악한 천사, 악한 영들을 말한다. 이 악령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들고, 질병을 가져다 주고 우리를 파괴한다. 하지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악령들이 집요하게 방해하고 못 살게 굴더라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신앙이다. 죽음을 통해, 마치 단련을 통해 풀무불에서 정금이 나오듯 고난없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4) 권세(principalities)-통치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높은 자, 지존자를 의미한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인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살했던 악한 통치자들과 독재자들이 많다. 그들 뒤에서 역사하는 세력들이 바로 악한 영들이다(에페6,12참조).
5) 현재의 것(present things)-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한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고통 등, 현재 손해를 보는 고통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일도 피하고 싶은 유혹이 오는 것이다.
6) 미래의 것(future things)-현재와 상반되는 '장래일'을 말한다. 미래에 오게 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을 지금 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구에 오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면으로 고통을 대결하게 한다.
7) 권능(powers)-악한 천사나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어떤 힘을 말한다. 마귀도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제한적으로 사용한다(점, 점성술, 타로 etc.).
8) 저 높은 곳(height)-위에 있는 어떤 힘(power above)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모든 것들-권세,부, 명예, 높은 지위 등을 말한다.
9) 저 깊은 곳(depth)- 아래에 있는 세상(power below)을 말한다. 가장 침체되고 낮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가난, 멸시,천대, 낮은 지위 등등. 8)과 9)는 아주 좋거나 아주 낮고 비천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10) 그밖의 어떤 피조물(any other creature)-이것은 위에 열거한 9가지 외의 모든 것을 말한다.
영적 세계의 어떤 악령들도, 우주의 어떤 세력도, 어떤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리3,8ㄴ)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계속 가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계속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의 의미는 뚜렷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이미 죽음과 부활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그러한 맥락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아십니다.
헤로데가 교활하지만 막상 힘은 없어 여우와 같다고 하시면서도,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은 여우 같은 헤로데 한 사람의 탓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예언자의 운명임을 받아들이십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박해와 거부를 피하여 도망가는 것이고,
제1독서에서도 나온 표현을 빌린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에페 6,19) 선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6,19-20 참조).
이 ‘담대함’은 드러내 놓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비유를 쓰거나 모호하게 돌려 말하지 않고 숨김없이 밝히는 것,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뜻하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4,13.29.31 참조), 바오로(9,27.28 참조), 바오로와 바르나바(13,46; 14,3 참조) 등에게 적용됩니다.
특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바오로가 로마에 잡혀가서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1)라고 말합니다.
죽음도 막지 못하는 담대함, 반대를 받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망설임 없이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아야 할 때, 우리에게도 이러한 담대함을 주시기를 청하여 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자(루카 13,31)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2-33)
바리사이들이 하는 말은 '유혹'일 수도 있고, '협박'일 수도 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목숨부터 지켜라." 라는 뜻이라면 '유혹'이고, "살고 싶다면 이곳을 떠나라." 라는 뜻이라면 '협박'입니다. (그들의 말을, 예수님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충고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유혹이든지 협박이든지 간에 그들이 하는 말은 예수님의 일을 막으려고 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어떤 것도 내가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또 어떤 것도 그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조금 방해할 수는 있겠지만 막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여우'는 교활하고 간사하고 비겁한 사람을 뜻합니다. 당당하게 추방령을 내리지 못하고, 바리사이들을 시켜서 유혹, 또는 협박이나 하는 헤로데는 여우같은 자입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여도 백성들이 반발하지 않으니까 마음 놓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뜻합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 일을 마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은 활동의 중단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는 '그렇기 때문에'로 바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라는 말씀은,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를 "나의 일은 계속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느님의 일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님"이신 분이고,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입니다(묵시 1,8). 그러나 사탄은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히 멸망하게 될 존재입니다. 주님을 충실하게 섬긴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고, 사탄의 하수인이 된 자들은 사탄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멸망하게 될 자들이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즉 '진리'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일을 마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예언자는 무조건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도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신다는 말은,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렇지 않아도 나는 지금 이곳을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중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헤로데든지 다른 누구든지 간에 예수님께 떠나라고 할 수도 없고, 떠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당신의 길을 가시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말린 것은(마태 16,22),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베드로 사도의 진심을 당연히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 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랑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일을 막으려고 한다면, 그 말은 '사탄의 말'이 됩니다.
지금 이 내용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것이고, 이방 민족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한 예언자가 있었습니다(사도 21,10-11).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그곳 사람들과 함께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권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
바오로가 단념하지 않자 우리는 포기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만 말하였다(사도 21,12-14)."
신자들이 바오로 사도를 말린 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말린 것처럼 사랑이었고 진심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유혹'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박해를 받을 때도 있고,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굳은 믿음과 의지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는 권고(설득, 호소, 애원)입니다. 그 경우에도 믿음과 의지로 극복해야 하는데, 첫 번째로 할 일은 '기도'입니다(마르 9,29).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 말씀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흔들림 없이 신앙의 길을 계속 가야 합니다.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3,31-35)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어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2ㄴ~34)
헤로데의 살해 음모를 전해들은 예수님께서는 헤로데에 대해 공식적으로 책망하시며, 루카 복음 13장 32절과 35절에서 헤로데가 당신의 사명을 막을 수 없음을 예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헤로데의 간교함 때문에 그를 '여우'라고 표현하신다.
아마도 루카 복음 13장 31절에서 바리사이들을 사주하거나 합세하여 예수님을 쫓아내기 위해 위협하는 자가 바로 헤로데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헤로데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B.C.4~A.D.39)를 가리킨다.
그는 한때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예수님을 보고 싶어한 적도 있었지만(루카9,7~9), 이제는 예수님의 선하신 행동과 명성에 부담을 느끼고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13장 32절의 '오늘', '내일'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완성하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리고 13장 32절의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사목의 모습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마친다'에 해당하는 '텔레이우마이'(teleiumai; I will reach my goal;I shall be perfected)는 '텔레이오오'(teleioo)의 현재형으로서 여기서는 미래적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될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결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확실성을 보여 준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완성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과 사흘 후의 부활로 성취될 것임을 예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루카 복음 13장 33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플렌'(plen; nevertheless; in any case)은 13장 32절의 후반부에서 말하고 있는 구속 사업의 완성에 앞서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필연성을 묘사하기 위해 '~해야 한다'는 뜻의 동사 '데이'(dei; must)를 사용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고 번역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성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인류 구속 사업을 완성하심으로써,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사명을 성취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13장 33절에서 '예언자'에 해당하는 '프로페텐'(propheten; a prophet)은 단수인데,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많은 예언자들을 전제한 상태에서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이기 때문에 예언자로서 예수님 역시 거기서 죽는 것이 타당하다는 당위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예루살렘아 ~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카 복음 13장 34절과 35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13장 31절~33절에 이어 당신 자신의 구속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하고 죽이고 말 예루살렘의 멸망을 매우 애통스러운 어조로 예언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문장이 마태오 복음 23장 37절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말하고 있다.
13장 34절은 죄악으로 가득차서 심판을 눈앞에 둔 예루살렘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달해 줌과 동시에,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대해 예루살렘 도성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아'에 해당하는 '이에루살렘'(Ierusalem; O Jerusalem)은 예수님께서 도시를 마치 사람인 것처럼 의인화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이런 표현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대표적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면서, 그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보셨기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반복해서 부르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만군의 주님이 예루살렘을 지켜 주리라. 지키고 건져 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31,5)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가 둥지를 공격해 올 때, 어미새가 날개를 크게 벌려 그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주체는 예수님 자신이다.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환난에 처한 예루살렘을 실제로 보호하신 적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영원으로부터 선재(先在)하신 성자 하느님으로서 육화하시기 이전부터(요한1,1~4; 17,5) 예루살렘을 계속해서 보호해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본다.
여기서 '날개'로 번역된 '프테뤼가스'(pterygas; her wings)의 원형 '프테뤽스'(pteryks)는 '새의 날개'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안전한 피난처와 보호의 그늘을 상징한다.
그리고 '암탉'으로 번역된 '오르니스'(ornis; a hen)는 '새'(bird)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구약에서 이 두 단어는 모두 당신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시편17,8; 91,4; 이사31,5).
또한 '모으다'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게이'(episynagei; gathers)는 현재 시제 동사인데, 이것은 어미새가 그 본성상 습관적으로 그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는 생태를 묘사한다.
하느님 역시 당신 백성들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불문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보호하시는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여기서 '내가 ~ 하였던가?'로 번역된 '에텔레사'(ethelesa; I would; I have longed)의 원형 '텔로'(thelo)는 '원하다', '바라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 여기서는 직설법 부정과거로 쓰였다.
이 동사는 여기서 부정사로 쓰인 '모으려고'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가게인'(episynagagein; to gether)을 목적어로 받고 있다. 따라서 '에텔레사 에피쉬나가게인'(ethelesa episynagagein)은 '내가 모으는 것을 원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에 해당하는 '포사키스'(posakis; how often)는 '얼마나 자주', '몇 번이나'라는 뜻을 지닌 부사로서, 여기서는 '상당히 자주'라는 의미를 강조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은 그 보호하심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표현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고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하셨던 하느님의 실제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도 변함없이 당신 백성들을 그 안전한 날개 아래 모으려고 애쓰신다.
2025년 10월 30일 목요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이찬우 다두 신부)
오늘 복음 첫머리에서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헤로데가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시라고 합니다(루카 13,31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13,33)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저는 이 복음 말씀을 읽을 때면 우리나라 신앙의 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의 삶이 생각납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증언하면 반드시 혹독한 고문과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끝까지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갔을까요? 아니면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갔을까요? 그 길을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생각만 해도 무섭고 떨립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을 이겨 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 죽음이 어떤 뜻을 지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에서 도망치시지 않고, 당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면서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잘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 제 방식대로, 자신이 편한 대로 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하루 자기가 편한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으셔야한다.
복음(루카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마귀(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법으로 먹어 심판으로 모두 죄인이라는 질병에 걸려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선악의 행위가 죄인임을 모르고 있다. (로마3,20 10,3)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밝히 드러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 계약대로 그들의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심으로 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일, 곧 진리를 다 이루시는 마침이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예루살렘, 곧 율법에 의해 죽으셔야한다. (마태6,21)
율법, 그 선악의 옛 계약으로 드러난 모든 죄를 예수님 당신께서 대속으로 없애시고 하느님의 용서, 구원의 새 계약을 이루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율법, 그 옛 계약을 완성하여 치우셔야 했기 때문이다.(히브10,9)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 날개 밑으로 모으듯 - ‘라히프’
(창세1,2)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감돌고 있었다. - ‘라하프’ 곧 비어있어 어둠인 땅을 하느님의 영이 감돌며 품어 생명을 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죄인(땅)들을 품어 당신과 하나되어 살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어둠, 곧 인간의 힘을 지키려 예수님 품안에 들지 않으면~
35 보라, 너희 집(율법의 성전, 신앙)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말씀)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 ‘복(바라크)’ - 창조(바라)에서 파생된 단어다. ‘나’- 예수님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진리, 하느님의 말슴이다.(요한1,1-5. 9-14 참조)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 복(생명)이심을 깨달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요한14,9)
비어있어(처녀) 어둠인 땅, 쓴물(마리아)들이 말씀을 진리로 먹는 것, 받아 들이는 것이 복되신 예수를 잉태하는 것이며 그 예수로 복이 된다.
(루가1,42)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당신, 그 안에 반드시 내가 들어가야 한다.(묵시21,27) 복(바라크), 창조(바라), 복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복이 된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먼저 말씀을 받아(잉태) 예수(구원)를 깨닫고(낳고) 그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내 죄로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 승천하시고 하느님 오른편(진리)에 앉으셨다가 다시 진리의 성령으로 오셔서 내 안에 함께 하심, 그것이 옛 것이 사라진 새로운 피조물, 새 것이 되는 이루심이다.
복(福)이신 예수님으로 마리아(쓴물)께서 은총(단물)이 가득하셨듯이 쓴물들인 우리(나)들도 예수님으로 단물(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자녀(딸, 아들)가 된다.
곧 비어있는 땅의 본질인 어둠의 힘, 그래서 말씀을 율법, 선악의 법으로 받아 지킨 인간의 의(義), 욕망, 그 쓴물들이 그 쓴물에 빠지는 하나의 희생, 십자나무를 구원, 진리의 나무로 받아들여 단물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법규, 규정, 계명이다.(탈출15,23-26)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마음, 귀를 열어주시어 오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믿음으로 자라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