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06일 목요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잃은 양을 찾아서 (루카15,1-10)
제1독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7-12)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화답송>시편27,1.4.13-14 (◎13)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1-10)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14,7-12)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7)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14,10.12) 오늘 로마서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른 말씀은 필리피 서간 1장 20절이하 였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 될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1,20-24)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이 없다. 마치 박해 시대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처럼, 고통과 박해 속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을 찬미하며,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천국은 우리의 본향, 우리가 본래 있던 곳이므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도,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실재를 체험하고, 주님께서 나의 삶을 항상 동행함을 느낄 때는 빨리 주님께 가고 싶다.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공동선익을 위해, 영혼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복음을 전하고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니까 이 땅에 사는 것이지, 정말로 주님 대전에 빨리 가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사도 바오로가 <살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것은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뜻이다.
<주님 안>에서는 삶(현세적 삶)이 죽음(영신적 죽음)이요, 죽음(이땅에서의 죽음)이 삶(영신적 삶)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주님 안에서는 삶과 죽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면, 요한 복음 12장의 예수님 말씀과 이순신 장군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4-25)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말이 떠오른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의 전국시대 병서인 오기병법(吳起兵法)에 나오는 말이다. "대체로 병사에게는 전쟁터가 한번의 실수로 죽음의 땅이 된다. 죽기로써 싸우면 반드시 살고,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는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卽生 幸生卽死)
이순신 장군은 오기병법의 말을 인용하여, 사는 것과 죽음을 하나로 생각하는 임전훈(臨戰訓)을 삼고,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고, 일기(정유년 9월 15일자)에도 기록해 두었다.
그날 일기를 요약해 보면,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모두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특별히 교회력의 마지막 달을 위령성월로 보내면서, 죽음과 심판을 묵상하는 시기이기에 오늘 말씀이 채택된 것 같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다.
육신은 물질이라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비물질적 실체라 물리적 파괴나 화학적 분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불사불멸하여, 이 지상에서의 자유를 시험하는 기간 동안 저지른 죄를 심판받고, 천국, 연옥, 지옥이 결정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오늘 특별히 강하게 와 닿는다. 영육이 분리되면,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자기 스스로 자기 죄를 이야기하고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심판이라 한다.
현세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세가 결정되는 종말론적인 삶(eschatological life; 이미 하느님의 통치가 이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삶;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에 개방되어 있는 현세를 지금 이자리에서(now & here)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리는 상황입니다.
첫째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다닙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비효율적이고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며 이웃들이 자신의 기쁨에 함께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어서 은전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되찾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은전 열 닢을 가졌던 부인은 잃어버린 한 닢을 찾으려고 집 안을 샅샅이 뒤집니다.
‘은전 열 닢’은 ‘열 드라크마’인데,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 은전 한 닢은 로마의 한 데나리온, 곧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과 비슷한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를 전 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두 번째 비유 속 부인에게 한 드라크마는 재산의 십 분의 일, 곧 적지 않은 손실을 뜻합니다.
은전 한 닢을 되찾은 부인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며 이웃들을 초대합니다.
이처럼 잃었던 양과 은전을 되찾은 비유에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초대가 반복됩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이 초대는 죄인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답변을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질문합니다. 나는 죄인의 회개와 이웃의 기쁨에 공감하는가?
내 기준에 사로잡혀 함께 기뻐하지도, 함께 슬퍼하지도 못한 채 ‘나만의 섬’에서 쓸쓸히 지내지는 않는가?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회개는 하느님께서 찾으심으로 시작.
복음(루카15,1-10)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죄에서 구하시러 오셨다. 의인이 되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죄인은 그분의 음식(성찬)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어 투덜거릴 수밖에 없다. 사실 하느님만이 선, 의로우시다.(루가18,19)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 주인이 자신을 찾았을 때 길을 잃은 자신의 잘못(죄)을 인정하고 주인을 따라 돌아온 양이다. 그것이 ‘메타노이아’ 회개다.(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오는 것) 곧 회개는 하느님께서 찾으심으로 시작된다. 당연하다. 인간은 땅(세상)이 말하는 선악의 논리가 죄인 인줄 모르기 때문이다.(창세2,17참조)
그 선악의 법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깨고, 그 선악의 법에서 벗어난 것이 진리이며, 진리의 하느님이시다.
“죄(罪), 하마트리아’(과녁을 벗어나다.)는 하느님의 뜻, 길을 벗어나 인간의 뜻, 길을 고집하는 것이 죄다. 그러니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뜻,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죄도 모르고 올바른 회개도 할 줄 몰라 헛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 유턴(U-Turn), 그 회개가 아닌 반성의 차원으로 끝내버린다.
미사(Missa) 드릴 때, ‘죄를 반성합시다.’로 시작하는데, 내 뜻을 위한 삶에서 하느님의 뜻으로 방향 전환을 하겠다는 목적, 그 회개로 시작되는 ‘미사(Missa ‘보내다’, ‘파견하다’)여야 한다. 그것이 길을 잃었던 나를 찾을 때까지 찾아주신 주인이신 하느님을 따라 돌아오는 회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아흔 아홉이 진리가 된 의인이 아니라, 광야, 곧 물(진리)이 없는, 율법(제사, 윤리)을 열심히 지킨, 자칭 의인이다. 그 자기 의를 고집하는 이들은 회개를, 곧 자기 의가 참이라 고집하며 버리지 않기에 회개를 못한다 하심이다.
(로마10,3)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 당시에 신랑이 신부에게 패물로 준 열 닢이다. 그 중 한 닢을 잃으면 큰일이다. 이혼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 하나를 찾아 열을 채워야 한다. 그 비유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를 잃으면, 곧 열 계명을 하나로 깨닫지 못해 하나를 갖지 못하면(갈라5,14) 법이 되어 하느님과 이혼이다.
열 계명, 그 각 계명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 그 하나를 품고, 말한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성경전체의 핵심이다.
(1요한4,10)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사랑, 그 하나로 깨닫지 못해, 갖지 못했다면 ‘등불’, 곧 하느님께서 보호자로 보내주신 성령께 의탁하여 열을 하나로 깨달을 때까지 말씀 안에 머물러 찾아야 한다.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 은전은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몸값이다.(마태26,15) 곧 옛 계명, 그 옛 계약의 법, 심판, 그 죽음의 길에서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길을 찾았고, 돌아왔다, 회개 했다는 것이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 약속하신 성령께 의탁해야 할 수 있는 유턴, 회개다.(1코린2,9-13)
십계명을 열 개의 계명, 법으로 가지면 심판으로 죄, 죽음이지만, 십계명을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느님의 사랑, 하나로 간직하면 생명이다.
(히브10,20)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찢는)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대속)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 안에서 늘 충만 하심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5,1-10)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 혹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애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거부하므로(루카14,18~20), 그들은 단 한 명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루카14,24).
그래서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식사를 즐기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거리가 먼 이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루카14장).
여기서 '받아들이고'로 번역된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 receives; welcomes)의 원형 '프로스데코마이'(prosdechomai)는 어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로마16,2; 필리2,29). 즉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는 도움을 얻거나 존경하기 때문에 맞아들이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실 때, 마치 유대인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하듯 하신 것이다. 경멸받으며 기피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루카7,34).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들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필리2,7).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청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카 복음 15장 6절과 10절이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의 결론이 되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 루카 복음 15장 10절의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속한 천사들도 기뻐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2025년 11월 06일 목요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7-8).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느껴서 이렇게 고백할까요? 오늘 복음을 읽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리며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또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지혜 11,24)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해 보일지라도 창조주이신 아버지의 눈에는 모두 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자녀요 피조물입니다.
그들을 내치는 이들을 얼마나 못마땅해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로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선하신 마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착한 목자의 선택은 사랑의 논리를 따릅니다.
그러나 경제 논리와 합리적 사고만을 따르는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이 없다면, 이런 종류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의 기쁨을 불편해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편과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당신 사랑의 걸음을 멈추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한결같은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2025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말씀으로, 회개로 찾아오시는 주님.
복음(루카15,1-10)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 판단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이들이 한다. 죄인임을 자각하는 이는 남을 판단할 수 없다. 예수님을 의지하며 말씀만을 갈망할 뿐이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양(羊)이 무슨 회개를 했나? 주인이 잃은 양을 끝까지 쫓아가 찾아 데려온 것을 ‘회개했다’고 하신다. 주인이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왔음을 기억하자.
(요한1,29)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죄를 없애시는- (직역하면) 죄를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곧 세상의 모든 죄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짐으로 없애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니까 양의 주인(주님)은 그 양의 죄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짐으로 없애셨고, 그 양은 그 주인(주님)을 믿고 따라왔던 그것을 회개라 하신 것이다.
회개는 하느님의 찾으심으로 시작된다는 말씀이다. 양은 그렇게 자신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없애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늘 간직하고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러나 온갖 유혹과 거짓 가르침으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길을 쫓아가 헤메일 때가있다. 곧 인간의 방법으로 잃었던 예수님을 찾게 된다.(루가2,43-45참조) 그러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인, 여자, 마리아(쓴물)처럼 된다. (루가2,50참조) 그래서 연결된 비유를 더 주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성령)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 잃어버린 한 닢, 곧 잃었던 은전을 찾았는데 ‘회개했다’ 하신다. 대속, 그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은전 ‘열 닢’은 십계명으로 그 열 개의 계명 하나하나 모두가 하늘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을 담고, 진리로 말하고 있다.
은전또한 우리 죄로 죽으신 예수님의 몸값을 뜻한다. (마태27,5) 곧 그 대속의 사랑, 그 하나를 깨닫지 못한 것이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린 것이고, 성령께 의탁하여 그 열계명을 사랑의 계명, 하나로 깨달아 믿게 된 것이 은전을 찾은 회개인 것이다.
십계명을 열 개의 계명으로 지키면 법이 되어 심판을 주지만, 대속 그 이타의 사랑, 그 하나로 깨달으면(믿으면) 하늘의 용서, 자유다.
회개( 메타노이아)란 뉘우치고 반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곧 하느님께서 죄인을 찾아주시고, 그 죄인은 자신을 찾아주신 그 주님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회개다.
하늘에서 땅으로 죄인들을 찾아오신 구원자 예수님~
(루가1,67-69) 67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요한1,9-11)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예수, 말씀)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사와 윤리의 신앙으로 스스로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며 애쓴다.
구원의 진리인 십자가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을 잃어버렸기(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이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로만 이루어진다. 죄인임을 자각하고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 그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회개한 (용서받은) 이들이다.
우리 또한 자신의 뜻, 소원, 의무(의로움)를 위해 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죄의 속죄 제물로 내 주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제사 제물로 드리며 완성하신 ‘다 이루어졌다’ 하신 그 사랑의 하느님과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찬미의 미사’를 드리러 모여야 한다.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찾으시고, 그들로 기뻐하신다.
(요한4,23-24)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1,11-12.14)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사랑을 진리로 깨닫게 하시며 구원으로 이끄시는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