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예리코 소경 치유 (루카18,35-43)

2025. 11. 15. 오후 7:43:35

글자

20251117일 월요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예리코 소경 치유 (루카18,35-43)


뷰어 이미지


1독서<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1마카1,10-15.41-43.54-57.62-64)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13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화답송>시편119,53.61.134.150.155.158(88)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악인들 때문에 분노가 치미나이다. 그들은 당신 가르침을 저버렸나이다.

죄인들의 올가미가 저를 휘감아도, 저는 당신 가르침을 잊지 않았나이다.

사람들의 억압에서 저를 구하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지키리이다.

당신 가르침을 멀리하는 저들, 사악한 박해자들이 다가왔나이다.

악인들은 당신 법령을 따르지 않았기에, 저들에게는 구원이 멀리 있나이다.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저들, 그 배신자들 보며 저는 역겨워하나이다.

 

복음<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마카1,10-15.41-43.54-57.62-64)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1마카 1,54~57.62~63) 

 

마카베오 상권은 '왕조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마카베오 상권은 B.C. 2세기 3세대에 걸친 유다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이 가문은 마카베오(유다의 별명인 '망치'에서 유래함) 가문 또는 하스몬 가문이라 불린다.

한 가문에만 초점을 모으는 것은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카베오서의 구조에서 책의 목적이 드러난다.

마카베오 상권은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야기된 위기와 마따디아에 의해 시작된 저항을 묘사한 뒤에(1,1-2,70) 유다 마카베오(3,1-9,22),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9,23-12,53)과 시몬(13,1-16,24)의 반란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사용하시어 셀류코스 왕조의 억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유다의 대사제가 이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왕조를 대표한다.

 

마카베오 상권의 전망은 5,61-62에서 밝혀지는데, 여기서 요셉과 아자리야는 군사적인 용맹을 떨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제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이다.

 

이 책은 유다와 요나단과 시몬을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로 제시하는데, 이때의 구원은 적대적인 정치적, 군사적 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해된 구원을 가리킨다.

 

세 형제는 군사, 종교, 정치 문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요나단은 빈틈 없는 정치가이다. 시몬은 새로 세운 유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조직화한다.

 

이 책의 설화 문체는 성서의 역사서들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영웅들과 마카베오 왕조 사이의 지속성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는 '성서적인 재창조', 곧 마카베오 왕조의 행위들이 성서의 초기 영웅들의 말과 행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주축이 되는 메시지는 마카베오 왕조가 이스라엘의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한다는 것이다.

 

마카베오 상권의 주요 본문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본디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족화된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본문은 '성서 그리스어'로  씌어 있으며 그리스어 성서의 초기 역사서들의 그리스어 본문과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은 B.C.134년부터 104년까지 유다의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의 공적을 요약하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요한 히로카누스 재위 당시나 그 직후, 곧 기원전 1세기 초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공적' 문서들(8,23-32;10,18-20,10,25-45;11,30-37; 11,57-59; 12,5-23;13,36-40 참조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의 진정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최근 학계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문헌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 담론, 기도는 저자가 자유롭게 작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성서의 예들을 본보기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 1-7장과 마카베오 하권 3-15장에서 저자들이 공통되는 원천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카베오 상,하권의 복잡한 전승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원천이 된 본문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상권의 제1부는 1장 1절 -2장 70절까지 이며, 위기와 저항을 다루고 있다.

위기(1,1-64)의 발단은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할례를 실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336-323) 부터 안티오쿠스 4세(B.C.175-164)에 이르는 헬레니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오만("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오만해졌다")과 죄악("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안티오쿠스는 무엇보다도 악인이지만, 1장 11-15절에서는 그의 계획에 동조한 유다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1,11).

 

그의 계획은 율법 대신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경기장을 세우며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전통적인 유다 종교)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기는 1장 16-40절에서 커진다

B.C.169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약탈한다.

그 결과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8).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167년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하여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고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25년 이상 괴롭히게 될 군사 요새, 곧 성채를 쌓는다.

그 성채는 "성소를 위협하는 복병이 되고 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는 흉악한 원수가 되었다"(11,36).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근처에 성채를 쌓은 안티오쿠스는 1장 41-50절에서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축제들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남자 아이들을 할례 받지 못하게 하고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장 51-61절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이 칙령을 내린 뒤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유다 전역에 분향 제단들을 세우며, 율법서를 찢어 불태워버리고  제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여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과 자기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있었다(1,62-63).

 

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1,64).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이번 주는 제1독서로 마카베오기 상권을 읽습니다이 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마카베오기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기원전 176년부터 134년까지 펼쳐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계 왕조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의 즉위까지 해당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던 비유다계 출신 왕조의 통치부터 유다계 왕조가 재정립되는 역사적 종교적 과정을 서술하기 때문에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한편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계 왕조에 대항하였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두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 드라마입니다.

오늘 제1독서(1마카 1)는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곧 이교 풍습을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불경한 작태를 고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부터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세 아들(유다 마카베오요나탄시몬)의 반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과 율법을 수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방 출신 왕조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계약의 수혜자가 되는 길은 철저한 율법 준수와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교 풍습의 거부로 제시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준수처럼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복음 정신과 반대되는 현대의 이교 풍습은 모든 것을 돈과 실적으로만 환산하려는 세속적 유혹이 아닐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루카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다윗의 자손이시여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 간절함은 망설이지 않는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 어떤 장애(障碍)도 간절한 마음을 말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신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 예전에는 볼 수 있었던 눈 먼 이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ㄱ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 하느님께 찬미(讚美)로 영광을 드리는 것, 믿음, 치유, 구원의 완성(完成)이라 했다.

 

43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오늘 본문 눈 먼 이의 이야기 전(前), 앞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 곧 구원의 진리를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

(루가18,34) 34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 말씀 안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눈 먼 것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 계명이 아닌 사람의 뜻, 계명으로 받아 지키는 이들을 눈 먼 이라 하신다.

 

(마태15,8-9.14)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9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14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는 종교(宗敎)행위에 열심인 것, 눈 먼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도~

(1마카베1,10-15)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 교회(敎會)가 세상(世上)과 하나된 형국(形局)이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그는 그들에게 이민족(사람)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 교회 안에 세상의 풍습(風習), 사람들의 뜻에 맞춘 여러 프로그램이 들어와 있는 것과 같다.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새 계약)을 저버렸다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 요즘 우리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얻은 의로움, 곧 하늘의 용서(容恕), 구원(救援), 그 새 계약을 진리(眞理)로 지키는가? 아니라고 사도(使徒)가 미리 알려 주었다.~

 

(2티모4,3-4)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 사도(使徒)는 오늘날 교회(敎會)에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뜻(이름, 욕망, 의로움,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信仰生活)에 열심(熱心)하는 눈 먼 이들이 많아질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나는 하느님의 뜻인 진리(眞理)를 얼마나 깨닫고 믿는가(요한1,17 ⇀ 14,6참조)

나는 그 진리(眞理)의 예배(禮拜)를 얼마나 드리고 있나(요한4,23-24참조) 그 진리로 이끄실 성령(聖靈)이 함께하심을 믿는가?(요한15,26-16,13참조) 그래서 보이는 것을 위한 보이는 신앙생활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는지,(2코린4,18참조) 그렇다면 눈 먼 신앙(信仰)이다.

 

(요한9,40-41)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 율법(律法, 제사와 윤리)의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지킨다고, 안다고, 보인다고 하니, 죄(罪)의 용서(容恕)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사람의 열심, 의로움으로는 죄의 용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3,20-24참조)

 

본문 42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하고 이르시니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 말씀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다른 태생(胎生) 눈 먼 이를 고치실 때~​

(요한9,6-7)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실로암의 물, 곧 죄인들의 속죄(贖罪)제물로 파견되신 그 대속(代贖)의 그리스도의 피(새 계약)에 씻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다 하시고 ‘씻어라’ 곧 ‘믿어라’ 하신 것인가.(6절)

땅(태생 눈 먼 이)에 침(말씀)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서(눈 먼 이와 하나됨) 고치심, 곧 구원의 진리이신 그리스도, 그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아니, 예수님(진리)께서 새로 낳으신 것이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3,3.5-6)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 보이는 육(肉)의 뜻을 위해 신앙하는 사람, 눈 먼 사람이다. 그는 보이는 예수님 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곧 자신의 뜻(욕망)을 위해 능력(能力)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닌 자신의 영(靈)을 위해 속죄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復活)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1ㄴ)

 

마르코 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조차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다(마르10,50).

 

즉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외침에 응답해 주시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밤에는 이불이 되고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 수 있는 유니폼이며 생계 수단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달려 갔던 것이다.

 

그렇게 달려 온 바르티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다.

 

이에 대하 바르티매오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태20,33; 마르10,51)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희랍어에서 '보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가 '블레포'(blepo)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접두사 '아나'(ana)가 붙은 '아나폴레포'(anablepo)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르티매오가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I want to see)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의 용례는 단순히 '보다'는 뜻보다는 '다시 보다'(see again)는 을 지닌다(사도9,12.17; 22,13).

 

이것으로 보아 그는 전에는 소경이 아니었지만 소경이 되었고, 따라서 눈을 뜨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는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동사 '텔로'(thelo; want, desire)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 '텔로'(thelo) 접속사 '히나'(hina)앞에 있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소경이 이렇게 '텔로'(thelo)를 생략하고 짧게 말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급했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갈망해야 할 것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눈먼 이가 그분께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18,38).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18,39).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시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8,41)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원의대로 다시 보게 해주십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다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18,37)로 보았던 군중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님"(18,39.41)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이 다시 보기를 바란 것은 실은 주님과의 일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알아뵙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현세 물질이나 권력과 명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 집중해봅시다. 예수께서는 수난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가시면서도 길가에 버려진 이들을 보고 계셨고, 군중의 환성에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이들의 외침을 ‘멈추어’ ‘다가가’ 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이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의 거룩한 목마름을 지나치지 않으셨지요. 

우리네 삶이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런 처신과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순례가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이끄셨듯이, 우리도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을 품은 천상순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곧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인 셈입니다. 이 순례는 다른 이들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한 사랑의 순례입니다. 
늘 사랑을 품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견디고 기다리면 사랑을 낳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 갈망을 주고받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가던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멈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하느님의 사랑을 내 안에 모셔들이도록 멈추고, 애정 어린 눈길로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한숨소리를 보고 들으려고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멈춤으로써 다른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갈망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멈추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분으로 보지 말고, 내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실 주님으로 고백하며 갈망해야겠습니다. 

그분을 갈망하기 위해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그분의 갈망을 발견하기 위해 멈춰야겠지요

멈추어 자비이신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분을 갈망하고 이웃의 갈망에 다가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251117일 월요일

[연중 제33주 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유명 관광지를 여행하다 보면 관광 체험 상품 가운데 마차 투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마차를 끄는 말의 두 눈 좌우에 작은 가리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양옆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여 말이 달리는 도중에 놀라는 것을 예방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가게 하려는 것이랍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비슷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두루 살피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신앙으로 눈을 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의 역사 곳곳에 배어 있음을, 우리의 삶 곳곳을 꿰뚫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완고함을 꿰뚫어 주변에 고통 받고 상처 받아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이웃들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은 신앙의 사건이요 눈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라고 간청합니다.

다시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인 마카베오기 상권에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 시절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변절과 불충실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부러워하여 거룩한 계약과 그들만의 고유한 관습을 저버린 채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온갖 악을 저지르고 이방의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힙니다.

세상에 대한 관대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퇴색 되고 변질되어 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도 예리코의 눈먼 이를 따라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블랙보우냐, 호라우냐.

 

복음(루카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 시련, 고난의 삶을 살고 있는 자다.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신이 낮아졌다는 선포다. 곧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사제☞ 마치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을 때, 그러한 비판에 직면해서 더욱 작아지는 우리에게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라고 깨우쳐 주는 것 같습니다. 비판에 직면하면 할수록 더욱 굳건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줄 아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깨우쳐 줍니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믿음이며 구원이라 하심이다. 군중 가운데 자신의 고난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바램은 믿음, 구원과는 연결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앞절로 가보면~

(루카18,31-34) 3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침 뱉을 것이다. 33 또 채찍질하고 나서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4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 말씀 안에 감추어진 뜻을 보게 해달라고, 곧 깨닫게 해달라고 한 것이 구원의 믿음인 것이다.

 사제☞ 많은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보아도 본 사람마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한 느낌이 다름을 봅니다. 자신의 눈으로 다 보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보다’에는 네가지가 있다 ① 옵타노마이 - 보이는 대로 보는 것. ② 아이돈 - 놀라워 우상삼아 보는 것. ③ 블랙보우 - 고난, 생각 중에 보는 것. ④ 호라우 - 깨달음으로 보는 것.

본문에 눈먼 이는 ‘블랙보우’ 상태에서 ‘호라우’를 청한 것이다. 곧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그 자신을 버리는, 부인한 자로서 청한 것이다. 그래서 얻은 믿음, 구원인 것이다. 군중은 예수님을 기적과 능력, 힘 있는 큰 사람으로, 곧 ‘아이돈’ 우상 삼아 보았기에 믿음, 구원을 얻지 못했다.

눈먼 이는 하느님의 뜻,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청했고 응답을 받은 것이다.

 사제☞ 인간의 성숙과 변화는 어떠한 것이든 내가 갖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를 알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43 (그래서)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 기도 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먼 이의 블랙보우 상태, 곧 눈먼 상태에서 사람들의 눈총, 괄시를 견디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노력했을 그 시련의 시간이 길었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고난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으면 주님을 큰소리로 부르짖었고,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소리도 개의치 않았다. 그 블랙보우(고난, 훈련)의 상태에서 인내로 생각하는 시간을 사는 것, 그리스도 인의 삶일 것이다.

 사제☞ 요술 같은 행운이나 극적인 눈물의 화해는 영화에나 있는 것 같다. 그런 바램 대신 시련을 겪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인생을 다르게 보는 마음의 눈을 뜨면 신앙의 눈이 더 밝아진다.

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수난, 죽음을 ‘호라우’하자!

 

(이사52,13-15. 53,1-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 가장 낮은자리,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십자가)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아훼)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1요한4,9-12)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인간의 지각(知覺)으로는 깨달을 수도, 믿기도 힘든 사랑이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1코린13,4), 곧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버림으로 하는 것이다.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고,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에 할 수 있다고 한다.(1요한4,13) 하느님께서 약속 하셨기 때문이다.

 

(에제36,26-27)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보게(호라우)하시어 아버지의 뜻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미나의 비유 (루카19,11ㄴ-28)25.11.17조회 8[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예수와 자케오 (루카19,1-10)25.11.16조회 11[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예리코 소경 치유 (루카18,35-43)25.11.15조회 8[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18,1-8)25.11.13조회 7[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인자(人子)의 날 (루카17,26-37)25.11.13조회 10[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 (루카17,20-25)25.11.12조회 12[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나병 환자 열 사람 (루카17,11-19)25.11.10조회 11[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종(奴) 의 자세 (루카17,7-10)25.11.09조회 11[연중 제32주간 월요일]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라 (루카17,1-6)25.11.09조회 9[연중 제31주간 토요일] 하느님과 재물 (루카16,9ㄴ-15)25.11.06조회 9[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불의한 집사 비유 (루카16,1-8)25.11.05조회 8[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잃은 양을 찾아서 (루카15,1-10)25.11.05조회 9[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루카14,25-33)25.11.04조회 11[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하늘잔치에 초대받은 당신 (루카14,15-24)25.10.31조회 10[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부활 때에 받을 보답 (루카14,12-14)25.10.31조회 8[모든 성인 대축일] 眞福 八段 (마태5,1-12ㄴ)25.10.30조회 8[연중 제30주간 금요일] 水腫 병자 치유 (루카14,1-6)25.10.29조회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