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 월 10일 월요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라 (루카17,1-6)
제1독서<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1,1-7)
1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2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3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4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5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6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7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화답송>시편139,1-3.4-6.7-8.9-10 (◎24ㄴ) ◎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제 말이 혀끝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당신은 이미 다 아시나이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저를 감싸 주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시나이다. 너무나 신비한 당신의 예지, 저에게는 너무 높아 닿을 길 없나이다. ◎
○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
○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 ◎
복음<너에게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1-6)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연중 제32주간 월요일(지혜1,1-7)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에 충만한 영을,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6-7)
지혜서 1-5장은 지혜서의 제1부로서 정의와 불멸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지혜서 1장 1-15절은 시작 권면의 부분인데, "정의를 사랑하여라." (지혜1,1)라는 초대로 시작하여 "정의는 죽지 않는다." (지혜1,15)라고 하면서 정의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마친다.
구체적으로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주는 권면으로 시작되지만, 이 권면은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벗어나 이방인들의 사고와 행위를 받아들일 위험이 있는 젊은 유다의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권면을 감싸고 있는 지혜서 1장 1절과 15절의 '정의' 혹은 '의로움'이라는 용어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올바른 태도를 가리키는 넓은 성서적 의미로 사용된다.
'정의'의 의미는 지혜서 1장 1절의 두 개의 병행구절, 즉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에 의해 명확히 설명된다.
죄를 짓고 하느님을 시험하며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불신자들(지혜1,2)은 정의도 하느님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와 죄는 공존할 수 없다.
한편,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어가거나"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지혜1,4).
다른 한편,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불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 철학의 용어인 '영혼', '육신', '영'은 전문적인 철학 용어라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윤리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다정한 영', 또는 '인간을 사랑하는 영'이다(지혜1,6ㄱ).
지혜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들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을 수 없다(지혜1,6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은 이 구절들에서 혀로 짓는 죄들을 가리키는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이다(지혜1,8-11).
하지만 지혜를 가리키는 '다정한 영' 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사실 지혜는 "주님의 영"이며,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지혜1,7)라는 점에서 그리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세계 영혼과 동일한 기능을 행사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혜의 우주적 차원에 머무르는 대신에 곧바로 방향을 돌려 "불의한 것을 지껄이는 자들"과 "간계를 꾸미는 자들"(지혜1,8-9)의 윤리를 경고하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열성스러운 귀는 모든 것을 다 들으니"; 지혜1,10)과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을 죽인다." (지혜1,11)는 것을 일깨운다.
지혜서 1장 10-11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언급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평한 것을 상기시키며, 구체적으로는 지혜서 1장 6-11절에서 비종교적인 것으로 비판받는 말을 가리킨다.
지혜서 1장 12-15절에서 권면은 죽음과 불멸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정의'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삶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정의는 죽지 않지만"(지혜1,15), 그릇된 삶의 길("그릇된 생활")을 택하고 "자기 손의 행위들로" 죽음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지혜1,12).
'자기 손의 행위'라는 말은 아마 지혜서 13-15장의 주요 관심사인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을 처음으로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지만, 저자는 지혜서 1장 13-14절에서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라는 사실을 즉시 지적하여,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창세기 3장을 암시한다.
<인격적 지혜>는 오늘 독서에는 하느님의 마음이요, 성령님처럼 계시된다.
1)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4)
간악한 영혼은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권능을 시험하거나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자,하느님을 불신하는 자인 것 같다.(1,1-3참조) 동시에 4절을 보면, 죄짓는 자를 말한다.
요한 복음 1장 4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aletos)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dolos)"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희랍어 돌로스(dolos)란 단어는 영어로 guile(가일), subtility(서틸러티), deceit(디시트)로 번역되는데, 교활<狡猾-간사(奸邪)하고 음흉하다>, 엉큼, 간교, 기만, 책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 안에 갈고랑이 같은 낚시바늘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것을 좋아하시고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2) 지혜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계시된다.(5)
그 영은 진실만을 찾으며, 어리석거나 둔하거나 융통성이 없지 않고, 정의만을 추구한다.
3) 지혜는 <다정(多情)한 영>이지만, 신성을 모독하는 자를 내버려두지 않고 책임을 물으신다.
4) 지혜는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으로 계시된다.
이것은 아니 계시는데 없이 곳곳이 다 계신 편재성(遍在性)과 무량(無量: Infinitas,ubiquitas)을 드러내며, 동시에 모르는 것이 없이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전지(全知:omniscientia) 를 말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순수한 진실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주소서.
오소서!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주님께 대한 두렵고 떨리는 외경심과 사랑도 허락하소서.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를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상대적으로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서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쇼생크에서 탈출하라! ”
복음(루카17,1-6)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세상 인간사가 다 죄라는 말씀이다.(마태18,7) 하느님의 뜻, 그분의 의로움,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뜻, 의토움,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길이 흙의 본질, 본성으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지만, 그것에 머물면 그 길이 자신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죄 짓게 하는 불행, 죄라 하심이다.
그 영원한 멸망, 죽음의 감옥에서 구하시기 위해 구원자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내주셨기 때문이다. 그 구원자 진리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길 만을 고집하면 불행이요 죄인 것이다.
(요한1,11-12)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에페2,7-8)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아멘)
= 하느님의 은총, 은혜의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의 뜻, 의, 영광을 위한 법의 예수님으로 전하면 남을 불행, 죄 짓게 하는 것이다.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 죄(하마르티아-과녁을 벗어나다.), 곧 하느님의 뜻, 길에서 벗어난, 인간의 뜻, 길을 위한 그 육신에 갇히게 하는 말을 하면, 가르침을 주면 꾸짖으라 하심이다.
다시 말씀 속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 진리를 깨달아 간직하여 지키는 삶이 아닌, 말씀을 보이는 그대로 보고 법으로 받아 행위로 지키게 하는, 그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의 삶을 살게 하는 이들을 꾸짖으라 하심이다.
그 자기 의는 세상에서만 빛을 낼 뿐, 영원한 멸망에 갇히게 하기 때문이다.(로마10,1-3)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 회개다. *회개- ‘메타노이아‘- 가던 길에서 돌아서다.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모든 피조물은 하루를 창조주께서 주시는 쉼(安息)을 산다. 그리고 일곱(7)은 안식의 숫자다. 안식은 하느님의 뜻, 길, 진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마태12,8)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인간들의 뜻, 육신의 길에서 하느님의 뜻, 길로 돌아오면 하루를 안식으로 살 수 있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사55,7-9)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 당연히 우리의 생각, 길이 아닌 하느님의 생각, 길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 세상사가 죄임을 깨달을 수 있고, 용서, 자유에 대한 믿음도 생길 수 있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 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 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잘 보이지 않는 씨(말씀)로, 곧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하느님의 한 말씀 안에 감추어진 하늘의 대속,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인 것이고, 돌 무화과나무는 말씀을 인간들의 법, 여러 계명으로 받아 열심히 지킨 온갖 행위들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한 말씀, 진리인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 무거운 짐이 되었던 모든 법, 온갖 계명들이 사라진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계속 인간들의 법, 계명을 고집한다면 죄에 갇혀 하늘의 안식, 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불행이다. 오늘 그 죄의 감옥에서 탈출하라 하심이다.
⁜<쑈 생크 탈출>
앤디는 아내와 정부(情夫)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흉악범들만 가두는 ‘쇼 생크’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감옥에서 자신의 누명을 벗겨줄 수 있는 증인을 만나게 되는데 교도소 소장이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그 증인을 죽여버린다.
그래서 앤디는 꼼짝없이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그 감옥에서 장기 복역수로 살게 된다. 그런데 앤디는 “억울하지 않아?”묻는 레드에게 의외의 대답을 한다. “거의 내가 죽인거나 마찬가지예요. 내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억울해 미치겠다고 하더니 그 감옥에서 자신을 자꾸 돌아보니 자신이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지만 평소의 자신의 언사나 행동이 아내에게 방아쇠를 당겨 죽인 것만큼 나쁜 짓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허락된 세상이라는 감옥의 역할이다.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말씀 안에 머무는 성도만 그것을 감지한다.>
40년 가까이 복역 중인 레드가 ‘처음에는 저 교도소의 벽을 원망했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 그 벽에 기대게 되고, 좀 더 시간이 가게 되면 그 벽을 의지하게 되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감옥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40년을 있다 보니 그것이 공식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빠져 나오라고 세상을 주셨는데 사람(아담)들은 세상에 익숙한, 아니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 그것이 전부인양 살다가 결국 그 세상 이라는 감옥에서 죽는다.
아니다. 앤디처럼, 내가 누구인지 알고 빠져 나와야 한다. ‘쇼생크 탈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안 나온다. 나중에 래드가 40년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을 하는데, 이 자유의 세상에 나와서 세상 자유에 동화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못 살겠다’는 것이다. 감옥이 훨씬 났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자신의 처절한 실존을 확실히 깨닫고, 그 감옥에서 탈출한 ‘앤디’에 의해서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쇼생크 탈출‘의 이야기다.
밖으로 나가는 땅굴이 뚫렸는데도 안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여기 감옥이 좋아 나가면 나는 적응을 못할 것 같아’ 하면서 ~
마찬가지다. 선악의 법을 깬 그 진리의 복음을 듣고 자유로 나가라 하니까 여전히 율법(제사와 윤리), 선악의 법을 붙들고 못 나가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리고는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모르면서 불안해 한다.
하느님은 진리의 복음을 주시면서 “자유의 나라, 내 아들의 나라로 탈출하라.”고 하시는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그 자유가 익숙하지 않아서 여전히 율법의 나라에 종으로 살고있는 것이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새 신랑(새 계약)을 주시면서 그 새 신랑 곁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영원을 누리라 했더니, 이미 시체가 된 율법(옛 계약)의 신랑 곁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한다. 하느님은 그 율법의 신랑(예수)를 죽였는데~~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11,32)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갈라3,22) 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혜,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믿음의 신앙을 깨닫고 믿게 하소서. 인간의 길, 선악의 법, 그 감옥에서 탈출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32주간 월요일복음(루카17,1~6)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1ㄴ~2)
루카 복음 17장 1~10절은 루카 복음 9장 51절~19장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후기 활동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최후의 순회 선교 여행을 떠나시기 직전(17,11) 베레아 지방의 활동(14,1~17,10)의 마지막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그리고 17장 1~10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1~4절까지는 성도들의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이웃과 수평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고, 5~10절까지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 1~4절의 전반부는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에 대한 경계(1~3ㄱ절)와 형제간의 상호 용서에 관한 교훈(3ㄴ~4절)이 나오며, 5~10절의 후반부는 진실한 믿음에 관한 교훈(5~6절)과 겸손한 봉사에 관한 교훈(7~10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레아 지방 활동을 마감하시며, 주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주요한 덕목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면서, 루카 복음 15장, 16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총정리하시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임을 밝히신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1~2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이야기와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마태18,1~7).
하지만 마태오 복음에서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함으로써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교훈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번 주셨기에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부정적 의미를 지닌 단어인 '아넨덱톤'(anendekton; impossible)과 '스칸달라'(skandala; offences)를 사용하셔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신다.
새 성경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로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a)의 원래 의미는 '덫'(trap)이나 '장애물'로서 '올무', '부딪히는 돌', '거리끼는 것'으로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형제를 유혹에 빠뜨리거나 교리 혹은 가르침 등으로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에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늘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아넨덱톤'(anendekton)은 '가능하다', '허락하다'는 뜻이 있는 '엔데코마이'(endechomai) 동사에 부정 접두어 '아'(a)가 결합된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불가능하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다시 부정 불변사인 '메'(me)와 연결되어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그러한 유혹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에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현실 극복에 대한 강인한 지향이 있어야 됨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강조 어법으로 제자들에게 촉구하시고 있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8장 6절과 마르코 복음 9장 42절에는 '연자매'에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 a millstone)가 나온다.
여기서 '연자'에 해당하는 '오니코스'(onikos)는 '나귀'(루카14,5)를 뜻하는 '오노스'(onos)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따라서 '연자매', '연자 맷돌'에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는 '나귀의 힘에 의해 돌리는 커다란 맷돌'을 말한다.
이것은 집안에서 사용되는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많은 곡식을 한꺼번에 빻기 위해 사용되는 큰 맷돌이었다.
루카 복음 17장 2절에는 '리토스 뮐리토스'(lithos mylikos; a millstone)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맷돌에 속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이것의 용도는 곡식을 가는 것인데, 때로 이방인들은 이것을 형벌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의 로마 처형법 중에 하나는, 이 돌의 구멍에 목을 매게 해서 바다에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처형 방법은 영적 세계에 무지한 이교도들이 바다에서 죽은 자들은 사자(死者)들이 머무는 세계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왔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들이 죽은 물 위에서 영원히 방향도 없이 떠돈다고 생각했다.
보통 맷돌에 사람을 묶어 바다에 던져도 가라앉는데, 하물며 대형 맷돌에 목을 매어 빠뜨리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음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자매에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하는 죽음은 장례를 지낼 수 없는 죽음으로써 최악으로 여겨졌다.
한편, '걸고'와 '내던져지는 편'으로 각각 번역된 동사 '페리케이타이' (perikeitai; that were hanged; that were tied)와 '에르맆타이'(erriptai; be thrown; be cast)는 중간태 내지는 수동태로서, 남을 죄짓게 한 당사자가 제3자, 즉 사법당국에 의해서 수장되는 형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걸리어지는 '그 목'은 죄짓는 작은 이의 목이 아닌, 작은 이를 죄짓게 한 당사자의 목이며, 그 목에 연자매를 매고 바다에 던지는 주체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당국이다.
그리고 '낫다'에 해당하는 '뤼시텔레이'(lysitelei; it would be better)는 본절에서 '더 좋다'(it is better)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세금을 지불하다'는 뜻으로서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작은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준엄한 형벌이 반드시 주어짐을 전제하는 동시에, 차라리 이러한 형벌이 더 낫다는 이중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은 이'(one of these little ones), 즉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해서 내세에서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는 것보다, 바다에 수장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그 개인에게 낫다는 의미이다.
내세에서의 형벌의 막중함은 연자매에 달려 수장당하는 형벌에 비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은 남들이 보잘것 없게 여기는 작은 이, 즉 소외된 이웃이나 스스로 힘으로 설 수 없는, 믿음이 연약한 이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히 시행되던 가혹한 형벌을 언급한 것은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을 애타는 심정으로 막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2025년 11 월 10일 월요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이번 한 주간 평일 독서로 지혜서를 읽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서는 욥기, 잠언, 코헬렛, 집회서와 더불어 지혜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빌론 유배에 이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통치라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만나면서 이스라엘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학적 결실이 두 가지 생깁니다. 지혜 문학과 묵시 문학이지요.
그 가운데 지혜 문학은 중동의 여러 지역과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유다의 현자들은 주변 나라들의 지혜 문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반대로 그들의 저서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은 크게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주로 세상의 질서 파악에 집중합니다.
인간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상벌)이 따르는데,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보입니다.
잠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은 이러한 현세의 인과응보와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일이 원리 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의 제기,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인간의 지혜로는 한계가 있다는 고백을 담은 두 번째 단계가 등장합니다. 욥기와 코헬렛이 대표적 작품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한계에 맞닥뜨리고 마침내 현자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지혜 문학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하느님의 계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주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 그리고 현세를 넘어 내세의 인과응보를 말하는 집회서와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죄를 지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모르는 것이 불행이다.
복음(루카17,1-6)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 모든 인간은 다른 이를 죄짓게 하는 존재라는 말씀?
병행~(마태18,7) 7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 남을 죄 짓게 하는 일인 곳이 세상이라는 말씀이다. 육적으로도, 또한 영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그 영적인 죄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자~
(마태65,9-10) 9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아버지의 이름이, 아버지의 나라가, 그분의 뜻이, 땅인 우리에게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라 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똑같이 자신들의 이름, 나라, 뜻을 이루려 한다. 세상이 주는 영광, 현세의 만족을 위한 일, 그 헛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살기에 사도는~
(1코린15,19)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 성경에 하느님 말씀을 매일 양식으로 먹지 않으면 우리는 현세만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땅, 흙, 그 육적 존재라는 것이다. 본능인 흙(육)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의 뜻, 이름,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옳다고, 참이라고 말하며 남(이웃)을 죄 짓게 하기 마련이라는 말씀이다.
‘묵주 기도 열심히 해봐 병이 낳을 거야’ ‘미사 열심히 드려봐 대학 붙을 거야’ ‘본당 활동 열심히 해봐 하는 일이 잘 될 거야’ 또 인간의 본능인 욕망은 하느님(남)의 뜻, 나라를 거스르는 그분(남)께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7,12)
그래서 자기 욕망, 뜻을 위해 사는 이 세상의 뜻, 힘을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갈라1,4) 4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 죄를 지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 받지 못한 것이 불행한 것이다. 그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불행인 것이다.
곧 우리(나)의 죄로 돌아가신 분을 모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한 제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믿지 못하는 것,
그래서 구원의 진리, 새 계약이 완성되었음을 성경이 전해 주시는 그 하느님의 뜻, 약속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 불행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제사와 윤리)에 갇혀, 매어서 사는 것이 불행인 것이다.
(갈라5,16-18)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성령께서 깨닫고, 믿고, 의탁하게 하심으로 곧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키지 못한 모든 율법(제사와 윤리)을 대속으로 다 지키시고 완성하셔서(로마8.3)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늘의 용서, 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신다는 것이다. (로마8,16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 성령을 믿지 못하고, 의탁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한 것이다.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 아직 깨닫지 못한, 그래서 땅에 속해있는 그 작은 이들, 이웃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는 것, 죄짓게 하는 것이다. 율법과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 묶여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 율법(제사와 윤리)과 사람의 규정과 교리가 진리라 말하는 그 잘못, 죄를 짓거든 꾸짖으라는 말씀이다.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일곱 번- 일곱(7)으로다. 일곱, 7은 하늘의 쉼, 안식의 숫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용서로 누리는 안식(자유)인 것이다.
그 구원의 진리, 구원의 새 계약을 믿지 못하고, 율법(제사, 윤리)과 사람의 규정, 교리를 진리로 의탁 하는 그 헛된, 불의, 그릇된 것을 믿는(마태7,21-23 마르7,7 요한16,8-11 등), 그 죄를 짓다가 돌아오면, 곧 십자가의 복음이 진리라 말하면(믿으면)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빈땅-죄인)을 위해 씨가 스스로 들어가 썩어지고 죽어서 열매를 맺고는 땅이 맺었다고 해 주시는 창조 사흗날의 씨의 죽음, 그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다.(창세1,11-12 루가13,7-9참조)
곧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대속으로 죽으셨고, 의롭게 하시려고 사흗날에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로마4,25 7,4참조)
그러면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돌 무화과나무, 곧 율법(제사와 윤리)과 사람의 규정과 교리가 뽑혀, 없어진다는 말씀이다. 자유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웃, 하느님)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었을 때, 그 진리의 길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청 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그러면 성령을 주실 것이다.‘ 약속하신 주님을 잊지 말자.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생명의 길을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예비, 준비하신 하느님, 그리고 성령을 영원한 보호자로 보내시어 그 진리,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와 찬미로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