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05일 금요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눈먼 두 사람 치유 (마태9,27-31)
제1독서<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이사29,17-24)
주 하느님께서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화답송>시편27,1.4.13-14(◎1ㄱ)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마태9,27-31)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이사29,17~24)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18~19)
이사야서 29장 18절에서는 그날에 천민과 빈민이 선민의 신앙을 회복하고, 기쁨을 누릴 것이란 사실이 예언된다.
이사야서 29장 18절은 마태오 복음 11장 5절과 직접적으로 연관하여 해석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간접적으로 답하셨다.
이사야서 29장18절의 예언의 문맥이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행해질 때 발생하는 일들과 관계되기 때문에 이러한 문자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보다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은 비유적 해석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과거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던 자들이 듣고 깨달아 알게 될 것이란 예언이 된다.
여기서 '귀먹은 이'(못 듣는 자)는 순수 이방인과 유다 백성들 중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던 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들은 구약 계시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었으며,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 말씀에 관심이 없었던 유다 백성들을 영적 귀머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장차 듣게 될 '책에 적힌 말', 즉 '띠브레 세페르'(dibre sepher; the words of the book)는 문자적으로는 '책의 말씀들'이란 의미로서, 이사야서 29장 11절에 언급된 '봉인된 문서의 말씀' 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유다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들이었다(이사6,9). 그러나 주님 구원의 날에는 그들이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그들의 영적 소경됨과 귀머거리됨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에 해당하는 '우메오펠 우메호셰크'(umeophel umehoshek)는 점층적법 표현이다. 앞 단어 '오펠'(ophel)은 어스름하여 사물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하는 정도의 어두움을 의미하며, 두번째 단어 '호셰크'(hoshek)는 칠흑같이 어두운 흑암을 의미한다.
이런 장소에서는 눈이 성한 사람도 사물을 똑똑하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장차 맹인이 이러한 장소에서 사물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여기서 어두움을 나타내는 이 두 표현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여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유다 백성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나 계시가 아예 없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흑암 속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의 거처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잇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날에 그들은 광명의 빛 가운데서 진리를 명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본절은 하느님의 구원이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강하고 부유한 자들이 기뻐하지 않고 약한 자들과 가장 가난한 자들이 즐거워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의가 짓밟힘을 당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멸시를 당하던 이사야 예언자 당대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왜곡된 세계를 뒤덮어 질서를 바로 잡으실 것이다.
한편 '겸손한 이'에 해당하는 '아나위임'(anawiim)의 원형 '아나우'(anauu)는 구약 성경에서 모두 23회 사용된 단어인데, '가난한 이'(시편7,19; 10,17), '가련한 이'(시편10,12), '겸손한 이'(민수12,3)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으며, 사람들이 보기에 성격이 거칠지 못하고 마음이 여리며 쉽게 노하지 않는 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 거칠고 잔인한 자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기 일쑤이고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세상의 기득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그들은 탐욕과 부정한 이익을 쫓는 이 세상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대상은 주 하느님밖에 없다.
본문에서 '주님 안에서'에 해당하는 '빠이흐와'(baihha)의 기쁨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가운데서 솟아나는 영적 기쁨이다. 그 기쁨을 누리는 자에게는 평화가 넘쳐나며 세상이 주는 어떤 염려와 근심도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여기서 '가난한 이'에 해당하는 '예브요네'(ebyone)의 원형 '예브욘'(ebyon)은 물질적으로 매우 궁핍한 사람을 말한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전혀 없어 오직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이들 가난한 이들의 기쁨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삐크도쉬; biqdosh)있음이 선포되는 것이다.
가장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어떤 물질적 축복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그분과의 풍성한 영적 친교 가운데서 기쁨을 찾게 될 것이다.
그들이 기쁨의 대상으로 삼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주 하느님, 즉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죄와 어두움에서 벗어나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 가도록 이끄시며, 흠없고 티없는 순결한 백성으로 세우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거룩한 성품을 지니시며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세상의 죄와 어둠에 젖어 그것만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거룩함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거룩한 역사하심을 고대하고 희망하는 자들에게만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즐거워하리니'로 번역된 '야길루'(yagillu)의 원형 '낄'(gyll)은 본래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펄쩍 팔쩍 뛰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는 하느님의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날을 고대하는 자들이 누릴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
복음에 나오는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마태 9,28)
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복음은 눈먼 두 사람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직역: 울부짖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9,27-28).
눈먼 두 사람은 ‘따라갔고’, ‘외쳤고’, ‘다가갔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고, 그분께 ‘울부짖게’ 하며, 그분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에서 나오는 이런 행동을 보일 때,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믿음의 힘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9,29).
만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성체 앞에 다가가 예수님께 울부짖으며 은총을 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꿈적도 하지 않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해소로 향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죽은 믿음’, ‘아무 힘도 드러내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눈먼 두 사람처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 다가가 필요한 은총을 청하는 힘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성경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고백록’이다.
(마태9,27-31)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는 그 길~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믿지 못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뒷부분에서 다시~)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 그 인간의 뜻으로 퍼트릴까봐 엄하게 이르신 것이다.
오늘 독서(이사29,17-19)~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 책, 성경 전체는- 하느님의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뜻, 계획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것을,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셨음을 기록한 책이다.(루가24,27 요한5,39 사도28,23 등)
우리의 속죄 제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 그 의로움이 구원의 진리임을 말씀하시는 책이다.(요한14,6 로마8,1- 10,1- 등)
(1베드2,24)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 십자가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받아, 그 의로움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10,5) 5 그러나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
= 제사와 윤리, 그 인간의 의로움은 육을 위한 것 뿐이라고 알려 주시는데~ 그런데도 계속 성경을 도덕과 윤리로 보고, 그 인간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구원의 진리를 못 보는 눈먼 이, 그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먹은 이,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그 빛이 주시는 희망과 기쁨을 살지 못하고(화답송 참조), 인간의 빛속에서 고뇌와 죄의식과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빛이 어둠과 암흑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복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도덕과 윤리로 보고, 듣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곧 도덕과 윤리의 그 법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 오늘 말씀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무서운 말씀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앞에서 찐자 진지해져야 한다. 보호자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아야하고, 그 성령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보내 주셨고, 청하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 좀더 진지한 기도를 해야 한다.
(1티모2,5-6) 5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6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 하느님의 뜻이 제때에~
(요한19,30)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 그러나 그 십자가의 대속이 구원의 완성임을 인간의 지혜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임을 아는 그 겸손한 이~(1코린3,19), 그래서 사람의 지혜를 부인하는(버리는), 그 마음이 가난한 이들, 그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 하느님의 맹세로~
(히브6,13-14)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福(바라크-하느님의 생명력) 곧 하늘의 영원한 생명, 구원이 복이다. 그 복의 말씀이 내안에 계실 때, 세상의 그 어떤것도 두렵지 않게 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한 곁들여 받게 된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아멘!!!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복음(마태9,27~31)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28~29)
여기서 '믿느냐'로 번역된 원어는 '피스튜에테'(pisteuete; do you believe)이며, 이것을 직역하면 '네가 믿느냐'이다.
즉 원문이 이 단어를 본문 서두에 배치하여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가 아니고, '너희는 믿느냐'이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시는 다른 기사에서 주어진, 본문과 대응하는 질문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이며(마태20,32; 마르10,51; 루카18,41), 이것은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9장 28절은 치유를 받는 자의 믿음이 강조될 뿐 아니라, 질문의 대상이 되는 두 소경은 앞에서 '다윗의 자손이시여'라는 호칭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본 단락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훈적 목적에서 기록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치유 기사에서 강조하는 것은 치유받는 이의 믿음인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의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제 마태오 복음 9장 29절을 보면, 두 소경의 치유 기적에는 행위와 말씀이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을 본다.
즉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의 눈에 직접 손을 대시고, 또한 너희의 믿음대로 되라고 명령하신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치유가 되는데(루카7,7~10), 직접 눈에 손을 대셔서 소경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고, 반대로 손을 대기만 하셔도 고치실 수 있는데, 말씀을 통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눈이 떠져라'로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타'(kata; according to)는 '~에 부합하게'라는 뜻이다(루카7,22; 히브7,5).
이것은 그 소경들이 자신들의 눈이 떠질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눈이 떠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복음적인 믿음은 모든 기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인(動因)과 바탕이 되는 것이다.
2025년 12월 05일 금요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복음서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받고 얻고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나(마태 7,7-8 참조)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끈질기게 먹을 것을 청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루카 11,5-8 참조)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 대는 과부의 비유는(18,1-8 참조)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지요.
이러한 말씀을 읽고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를 시작하였다가,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지쳐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한 적은 없나요?
주님께서는 얼마 동안 기도하라고 기간을 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심지어 정의 때문이 아니라 다만 성가셔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이나, 우정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서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이에게까지 하느님을 비유하시면서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을 좀 성가시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귀찮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졸라 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끈질기게 들이미는 이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온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기도는 우리에게 이미 자비와 은총의 열매이고 하느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 노리치의 율리아나 신비가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기도가 너에게 아무런 맛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기도하여라. 네가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기도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
무미건조하고 병들고 나약한 기도라 하더라도, 전혀 의미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너의 기도는 나에게 기쁘다. 믿음으로 바치는 너의 모든 기도가 그렇다”(『사랑의 계시』, 173-174면).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거꾸로 가는 신앙을 살게 된다, 하늘에서 땅으로.
독서(이사29,9-24)
9 너희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해 하리라. 스스로 눈을 들어붙게 하여 눈이 멀리라. 포도주 없이도 취하리라. 술이 없이도 비틀거리리라.
= 하느님의 말씀(계명)을 스스로 거부함으로 곧 말씀을 인간의 말(계명)로 만들었기에 구원에 스스로 눈 먼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새 계명인 포도주(새 계약의 피) 없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들의 계명에 취해, 영적으로 비틀거리는 삶은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14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그리하여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는 자취를 감추리라.”
= 놀랍고 기이한 일, 곧 하느님의 지혜의 계명인 새 계약을 대속으로 이루시어 인간들의 계명(지혜)을 무색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15 불행하여라, 자기네 계획을 주님 모르게 깊이 숨기는 자들! 어둠 속에서 행동하는 이자들은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고 말한다.
= 인간들의 계명(지혜)에는 구원이 없기에 그 열심은 어둠이며, 그 어둠속에 행동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삶을 살지 않는 것 또한 어둠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인 것만 말씀하신다. 내일의 삶인 영적인 잘못이 먼저 해결되면 오늘의 육적인 잘못은 자연히 사라진다.>
인간의 계명(지혜)은 내일을 살지 못하게 오늘을 살게 거꾸로 가는 신앙을 살게 한다.
그래서 16 아, 거꾸로 행동하는 너희들! 진흙이 옹기장이와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느냐? 작품이 제작자를 두고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느냐?
=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 주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신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에제28,2)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 에덴의 뱀의 유혹을 먹었기 때문이다.
(창세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씀을 선악과로 먹어 하느님 처럼의 교만에 자리에 앉아 선이 악을 대속하고 생명을 주는 그 생명의 하느님과 끊어진 아담(사람)이다.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구원)에 귀(耳)와 눈(目)이 멀게 된 것이다.
(대역전)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 에덴동산의 회복이다. 교만의 악을 선이 품어주고 대신 죽어 용서, 생명을 주는 그 생명 나무로 숲을 이루어 쉼(안식)의 에덴으로 회복함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獨生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속죄 제물로 내어 주셔서 ‘다 이루신’ 그 선(예수)의 대속이 성경 전체의 구원의 약속, 하느님의 말씀이다.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 그날(오늘날)에는 성경의 ‘기이한 일’인 하느님의 지혜, 계명인 하늘(善)의 대속, 그 새 계명, 새 계약이 ‘다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의 지혜, 계명인 스스로의 어둠, 암흑의 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 계명으로는 구원이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으로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온 ‘낮은 자, 겸손한 이, 마음이 가난한 이’ 만이 벗어날 수 있음이다.
그래서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 포악한 자, 빈정대는 자, 뱀의 유혹을 먹고 인간의 계명, 율법(제사와 윤리)을 고집하는 거짓 사도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지혜(계명)를 다 이루신, ‘구원의 새 계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말하면, 그분의 공로로 거저 의롭게 되어 구원 받는다.’ 고 말하면 어리석다고 빈정댄다. 그들의 계명(법)이 없어짐으로 기뻐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포악하고 빈정대는 그 인간의 지혜(계명)가 내 안에도 있어, 나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인간의 법(계명)을 성경 말씀, 십자가의 복음, 그 새 계약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잘라 버려야 한다.
인간의 법, 계명은 이 땅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계명이 하느님의 계명인양 인간의 ‘자기 의’에 만족하게 되면 그것이 악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계명으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피’ 구원의 새 계약으로 받는 용서, 그 무죄의 권리를 빼앗아 버린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죄인)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포악한자, 빈정대는자)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구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 포악하고 빈정대는 자들로 정신이 혼미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다시 교훈을, 새 계약의 말씀을 진리로 주어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시다.
(요한1,14)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이 은혜, 은총,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의 눈 먼 이들을 고치신 것이다.
복음(마태9,27-31)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 ‘십자가의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새 계약으로 믿느냐?’ 물으신 것이고 ‘예’로 답한 것이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 십자가에 못 박히실 손(手)이다. 곧 새 계약의 손이시다. 그것을 믿는다면...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 왜 아무도 알지 못하게 단단히 이르셨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말씀을 듣지 않았을까?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입(말)으로 나가면 인간의 지혜로 나가고,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의 말로 이 일을 알리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단단히 이르신 것이다.
그러니 여기 ‘굿 뉴스’에 올린 묵상 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가르침을, ‘보호자로 보내주신 성령께 의탁하여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 간직할 수 있도록 성경에서 확인하는 열심’의 공부를 해야 한다.
*특히 성경 말씀을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이야기, 세상의 일을 예화로 들어주는 가르침을 조심해야 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곧 위(上)가 아닌 아래(下)에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17,2.11) 2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11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뜻에 눈먼자가 되지 않도록 늘 말씀의 깨달음을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