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보고 믿었다. (요한20,2-8)
제1독서<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1요한1,1-4)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화답송>시편97,1-2.5-6.11-12(◎12ㄱ)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
복음<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1요한1,1-4)
오늘은 어부 출신으로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의 동생인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이다. 그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최초의 제자단에 속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 했으며 예수님의 당부로 성모님을 모셨다.
교회의 전승은 요한 복음과 요한 1,2,3서, 요한 묵시록 을 사도 요한이 저자라고 가르쳐왔다. 그러기에 오늘 축일의 독서도 요한 1서의 내용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서학계에서는 요한 1,2,3서의 저자가 요한 복음 저자도, 예수님의 애제자도 아니라고 밝힌다.
세 편지에서 저자는 자신을 '원로'라고 밝힌다.
원로라는 칭호는 아시아 속주의 여러 교회에서 흔히 주님의 직제자 요한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을 가리켰다.
한편 저자는 자신을 나자렛 예수님을 직접 본 목격 증인으로 내세운다.
따라서, 그는 요한계 공동체에 속하면서 사도 전통을 직접 이어받은 요한 사도 바로 다음 세대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세 편지의 저자는 동일 인물이다.
세 문헌의 메시지, 문체, 어휘등이 서로 매우 비슷하게 때문이다.
세 서간의 집필 연대는 성 폴리카르푸스와 유스티누스가 요한 1서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A.D.150년 이전에 쓰인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요한 복음이 쓰인 뒤인 A.D.100년경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독서는 요한1서의 머리말(1,1-4)에 해당하며, 요한 복음의 로고스 찬가(요한1,1-18)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자주 언급되는 '우리'는 애제자의 목격 증언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온 요한의 직계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생명의 말씀이시다(1,1-2).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1)
요한 1서의 서문은 인격화된 말씀의 육화를 강조한 요한 복음의 서문과는 달리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본 생명의 말씀, 곧 나자렛 예수님의 공생활을 강조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우리 모두(저자와 수신자들)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기쁨이 넘치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3-4).
이 친교는 두 주체가 어울리면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하는데, 요한 복음에는 이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20,2-8인데, 빈 무덤을 본 마리아 막달레나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 20,3-4에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고 전한다.
그만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란 걸 드러낸다.
그리고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두었으면, 베드로 사도보다 먼저 달려가 빈 무덤에 다다랐다고 표현을 한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중의 하나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할 때 성모님을 맡겨 주셨다.
그리고 12사도 중의 유일한 동정이며 가장 오래 장수하여 천상의 신비와 계시로 가득찬 요한 복음을 저술했다.
주님께서 12사도 중에 특별히 요한 사도를 간택하여 사랑을 쏟아 주시고 큰 사명을 맡기신 것은 분명히 사람의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주님 마음에 드는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성탄 팔일 축제 기간의 전례에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나옵니다.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26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28일),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 순교자(29일)이지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태어나신 분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얼핏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생명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인 오늘, 복음은 요한 사도를 엊그제 태어나신 주님의 무덤으로 데려갑니다.
무덤과 수의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자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당신 몸을 먹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님께서 짐승의 밥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사실에 담긴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누이신 구유는 죽은 이를 넣는 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동방 교회의 성탄 이콘 가운데 루블료프의 성화에서는 아기가 누워 있는 구유가 마치 작은 관처럼 보이는데 그 관은 저승처럼 깊은 어둠 속에 놓여 있지요.
아기의 옷 또한 신생아의 배내옷이라기보다 시신을 싼 수의처럼 보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위하여 태어나셨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돌아가셨음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무덤에 가장 먼저 도착하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을 가장 먼저 알아볼(요한 21,7 참조) 만큼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누렸던 요한 성인은 이 모든 진리의 생생한 증인입니다(1요한 1,1 참조).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끝까지 증언한 사랑의 성 요한 사도의 말을 새겨들읍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구원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어떻게 거저 받았는지 성경을 열어 확인하는 것이다.
독서(1요한1,1-4)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 생명의 말씀이 처음부터, 곧 창조(創造)이전(以前)부터 있었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것이라는 뜻인데~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한17,3)
*알고, 아는- 히브리어 ‘야다’로 함께 눕다. 곧 ‘하나, 한몸이 되다. 동침(同寢)’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영원(永遠)한 생명(生命), 곧 한몸이 되시기 위해 오신 말씀이,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예비(豫備)하셨던(에페1,4) 우리의 속죄(贖罪) 제물(祭物)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도는 요한복음 1장을 다시 전(傳)하고 있다. ~
(요한1,1-4.9.14)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말씀)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하느님의 영광(榮光)이신 예수님 이시다. 영광(히브리어-독사) - 하느님의 신성(神性)과 속성(屬性), 본성(本性)인 사랑(아가페)이 드러나 나타난 것이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예비하신 대속(代贖), 그 ‘하느님의 영광인 사랑’으로다.
오늘 그 하느님의 창조이전 구원(救援)의 계획을 거저 주시는 은총(恩寵), 은혜(恩惠)의 말씀으로 선포(宣布), 계시(啓示)하시는 것이다.
(2티모1,9)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義)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은혜)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혜)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 거룩('하기아죠'- ~부터 구별되다), 어둠인 세상(世上)으로부터 말씀(빛-예수)으로 낚아 올려 세상과 분리(分離), 구별(區別) 시키심이 거룩이다. 땅의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하늘의 존재가 된 거룩인 것이다. (루가5,10 마르7,33-35 요한10,3-4 참조)
(2티모1,10)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복음(福音) 말씀으로 죽음을 없애신 것이다.
* (히브4,3)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그리스도교(敎)는 ‘그리스도로 다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를 선포(宣布)하는, 계시(啓示)하는 종교(宗敎)’임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노력, 열심히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기쁜 소식인 것이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 친교(親交) - 아버지의 창조(創造)이전(以前) 예비(豫備)하신 용서(容恕), 사랑인 대속(代贖)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다. 그랬을 때 기쁨인 것이다.
(탈출20,24) 24 너희는 나를 위하여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서 너희의 번제물과 친교 제물, 그리고 양과 소를 바쳐라. 내가 나의 이름(뜻)을 기억하여 예배하게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너희에게 강복하겠다.
= ‘흙으로 제단(祭壇)을 만들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몸을 속죄 제물로 드려 ‘십자가의 단 한 번의 제사’로 완성하실 것임으로, ‘제단(제사)은 없어질, 부서질 것이기에 돌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다. 곧 ‘인간의 지혜(知慧)로 화려(華麗)하고, 비싸고, 튼튼한 제단(祭壇)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다.
또한 ‘인간의 이름(뜻), 욕망(慾望)을 위해 제물(祭物)을 바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 곳에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사도2,42)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 친교(親交), 곧 기쁨을 나누는 빵이다. ‘생명의 양식(糧食), 빵인 예수 그리스도’로, 하느님께서 창조이전 예비(豫備)하셨던 죄인(罪人)들의 번제물(燔祭物), 속죄물(贖罪物), 친교제물(親交祭物), 이시다.
곧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 하시고 이루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다. 그 구원(救援)의 말씀을 되새기는 기도(祈禱)를 했을 기쁨이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옛계약, 율법)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구원의 길, 방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 방법으로 오셨다.’
구원(救援)은 우리의 노력(努力)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저 은총(恩寵)으로 구원 받았음을 확인(確認)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주신 성경(聖經)의 계시를 모르면 구원의 길, 방법이 없다.
모르면- 세상과 같이 세상의 길, 방법으로 인간의 열심(율법-제사와 윤리)으로 스스로 구원(救援)에 이르려, 헛된 신앙(信仰)을 살게 된다. 착하게, 의롭게 살다가 지옥(地獄)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로마10,1-4참조)
본당(本堂)활동, 종교(宗敎)행위에 열심(熱心)하다가 하느님의 용서(容恕),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마태23,16 루가10,38-42참조)
☨하느님의 지혜이신 보호자 성령님!
성령님의 도우심, 이끄심이 없으면 어떻게 알아듣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인 저희들 간절히 비오니 저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저희 안에 계신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요한 20,2~8)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4~5)
여기서 '빨리'에 해당하는 '타키온'(tachion)은 비교급이다.
또한 '달려'에 해당하는 '프로에드라멘'(proedramen; outran)의 원형 '프로트레코'(protrecho)는 '앞으로 달려가다'라는 뜻이다(루카19,4).
한글 새 성경의 번역은 베드로와 요한이 마치 무슨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원문에 충실하여 다시 번역하면,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앞질러 갔다'가 옳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앞질러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무덤에 먼저 도착한 이유는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반대로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려지는 모든 과정을 실제로 목격한 요한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의 위치를 가장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요한19,25~27).
이러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여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다른 제자'는 요한 사도가 분명하며, 이러한 내용이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몸을 굽혀'라는 뜻의 '파라큅사스'(parakypsas; he bent over; he stooped down)가 여기서는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 기록되었고, '보기는 하였지만'에 해당하는 '블레페이'(blepei)가 현재형인 점으로 보아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했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로 계속 들여다 보고만 있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요한의 평소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이 큰 돌로 박혀 있었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시신이 홀연히 사라진 사실로 말미암아,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장에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베드로가 오기까지 기다렸다고 본다.
또한 다르게는 요한이 수제자, 으뜸 사도로서의 베드로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픈 급한 마음에 베드로의 느린 달음질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먼저 달려와 무덤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예수님의 수제자의 위치에 있는 베드로의 권위를 존중해서 그가 와서 먼저 확인하기 전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묵상 (사제 정천 사도 요한)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를 기억합니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요한은 자신의 형인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드러났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겟세마니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넷째 복음서는 성인을 지칭할 때,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를 달리 ‘애제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특별한 호칭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복음서는 요한 사도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자세히 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여 보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제자의 사랑은 예수님 수난의 때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한나스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저택의 안뜰까지 들어가는 용기를 보이며 바깥뜰에서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베드로와 대조된 모습을 보입니다(18,12-27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제자였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19,25-27 참조).
특히 오늘 복음에서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부활의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목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그토록 빨리 달려가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만큼 누군가를 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크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크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다면 우리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께 얼마나 큰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12월 27일[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주님 안에서는 무엇이든 생명이다.
복음(요한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 주검의 돌이 치워지고 부활이다. 이제 주님의 부활(復活)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이다.
(1코린15,20-22)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이 부활(復活)을 믿지 못하고 있다. 생전에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태20,18-19) 말씀을 기억도, 믿지도 못하고 인간의 길, 생각대로 살아 전전긍긍하는 믿음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 주검을 둘러쌌던 수건(手巾)이 치워지고 정리(整理)가 되어있다. 곧 예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부활하신 확실한 모습이다.
그런데 수건은 무슨의미(意味)?~
(2코린3,14-15) 14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각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옛 계약을 읽을 때에 그 너울(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5 사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옛계약)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율법(律法) 안에 하느님의 진의(眞義), 사랑, 그분의 영광을 만민(萬民)이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었다는 것인가?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옛 계약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다는 결론이다. 믿음이란 그분 활의 현실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로마4,25.5,1)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1코린15,17)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 본문 2절에서 여자가 시몬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제자(弟子)에게 달려갔다고 전(傳)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하신다. 요한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곧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숨 바쳐 죽기까지 사랑하셨음을 깨닫고 믿었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使徒)처럼, 우리들도 성경(聖經)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음을 찾고, 믿어,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새 생명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信仰生活)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한 처음, 곧 창조 이전에 예비하신(에페1,4) 우리 구원,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쁨, 자유, 희망, 평화, 안식, 영원한 생명이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은총이신 그리스도의 성령님!
말씀이여! 이루어지소서. 진리가 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요한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품에 기댈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빈 무덤을 향하여 베드로와 함께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요한 사도였다면, 저는 곧바로 무덤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없어지신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왜 베드로를 기다렸을까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뜻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기다렸고, 그가 빈 무덤을 확인한 첫 번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사도들 안에서 권력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일,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려는 그분의 뜻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시지 않았을까?’라고 주님을 원망하거나
시기와 질투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 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할 줄 아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사랑밖엔 난 몰라♬
제1독서(1요한1,1-4)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 생명의 말씀을 보고 만져보았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입니다.(에페1,4)
(요한1,1.4.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하느님의 ‘성(聖) 육화(肉化)’입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알고, 아는 것, (야다 함께 눕다) 부부관계처럼 한 몸으로 하나가 되는 것. 곧 우리의 모든 고난, 고통, 어둠의 삶에 빛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기쁜 소식, 복음(福音)이다.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아멘)
복음(요한20,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ㄱ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 요한이 쓴 글이다. 예수님은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셨다. 곧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한 몸으로 극진히 사랑하셨음을 믿었다는 것이다.
2ㄴ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 예수님께서 정리하셨다는 부활의 의미는 아닐까?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마태16,20-21)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마태17,1-2)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 빛의 본체, 곧 하늘의 생명의 빛이시라는 것.(요한1,4)
(마태17,9)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시고 되살아 나셔야 죄인들의 빛, 곧 ‘생명의 그리스도’가 되신다.
(로마4,25.5,1.6-8)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5,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1요한4,10-11)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멘!
사제☞ 보통 여러 증거들을 가지고 깊이 추리한 끝에 깨달음을 얻지만 한번 보고 그냥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두고 직관이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빈 무덤을 보고 믿었습니다. 시신이 왜 없어졌는지 의아해 하지도 않고 스승님이 부활하셨음을 알아 챘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믿어서 그것을 알게 됐지요. 사랑받음과 깨달음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나를 죽도록 사랑하신다고 믿으면 요한 사도처럼 알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언제나 예수님 근처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옆자리에 앉기를 원했고, 그분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를 원했던 그는 ‘웅얼대며’ 뭐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이 전부입니다. 사랑밖엔 난 몰라요. 사랑 이외는 배운 것도 없고, 사랑 이외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 저희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 몸, 한 지체로 이웃을 자신처럼 용서, 사랑할 줄 알게 하시어 아버지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