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 20일 화요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르2,23-28)
제1독서<다윗에게 기름을 붓다.>(1사무16,1-13)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화답송>시편89,20.21-22.27-28(◎21ㄱ)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나도 그를 맏아들로, 세상의 임금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리라. ◎
복음<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다.>(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16,1-13)
그 무렵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았다." (1)
사무엘 상권 16장은 사울의 이야기가 일단락을 맺고, 다윗이 역사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을 다룬다.
하느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일찌기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식의 망령된 제사를 드렸던(1사무15,31) 인본주의적인 임금 사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삼으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1사무13,14),
또 다시 주님의 아말렉족 전멸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사울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왕국을 찢어줄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1사무15,28).
여기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과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은 바로 사무엘서 상권 1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윗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윗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무엘서 상권 16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13절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기름부음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14~23절에서는 주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내린 사울을 시중드는 다윗의 모습이 소개된다.
한편 '나는 이미 ~밀어냈다'에서 '내가 ~했거늘'에 해당하는 '와아니'(waani)는 접속사 '와우'(wau)와 1인칭 주격 대명사 '아니'(ani)가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접속사 '와우'(wau)는 사무엘이 사울의 폐위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또한 주어의 인칭이 동사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주어를 대명사로 다시 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주체인 하느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는 '아니'(ani)는 '너는' 으로 번역되어 사무엘을 뜻하는 '앗타'(atha)라는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사무엘의 태도를 대비시켜, '나는' 사울을 버렸는데, '너는' 왜 슬퍼하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메아쓰티우'(measthiu; have rejected him)은 '거절하다', '밀어내다'를 뜻하는 '마아쓰'(maas)의 능동태 미완료로서 남성 3인칭 접미어를 취해서 '내가 그를 버렸다(밀어냈다)' 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지만(1사무15,23.26),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을 임금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던'(1사무8,7; 10,19)결과이며,사울 임금을 따라서 주님의 명령을 어겼던 결과였다(1사무15,9).
이러한 연관성을 살펴볼 때, 임금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대표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했던 임금이 하느님께 배척받았으므로 더 이상 임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해 주셔야먄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임금의 권한과 권력이 철두철미하게 하느님의 지배권과 주도권 아래 속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사울의 폐위에 대해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채워 가지고'에 해당하는 '말레'(malle)는 '넘치다', '풍부하다', '충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레'(malle)의 강조형 명령법이다. 이 동사는 공간적 '가득함'(탈출10,6)이나 시간의 '만료'(창세25,25)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리고 '말레' 동사는 일반적으로 능동형이나 수동형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말한 것의 이행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채우다'는 직접적인 의미 말고도 '온전히 이행하다', '힘을 다하다'라는 뜻도 갖는다 (여호14,8; 1열왕9,24).
여기서도 이 동사는 사무엘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더 나아가 이제 애도의 시간을 끝내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지시에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뿔에'에 해당하는 '카르네카'(qarneka; your horn)는 '뿔'을 의미하는 명사 '카렌'(qaren)에 사무엘을 지시하는 남성 2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결합한 형태로 '너의 뿔'로 직역이 된다.
여기의 '뿔'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사용된 '기름병'(1사무10,1)과 비교된다.
이 뿔은 다윗의 기름부음을 다룬 사무엘서 상권 16장 ~13절의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반복되어 강조됨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것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주님 앞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사울이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기름병'으로 받았지만,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질 다윗은 '뿔'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뿔'은 사무엘서 상권 2장 1절과 10절의 한나의 기도 속에도 이미 나타나 있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여기 등장하는 '뿔'도, 한나를 미천한 여인에서 기쁨과 감사의 여인으로 높이신 하느님의 능력이 새롭게 선출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에게도 부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름'에 해당하는 '셰멘'(shemen; oil)은 일반적으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요리할 때(1열왕17,12), 희생 제물과 예배와 관련하여(레위2,15-16; 에제45,14), 화장품이나 향로(아모6,6; 시편104,15), 등잔(탈출25,6; 레위24,2)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처럼 임금이나 사제나 예언자들을 세우는 데 사용될 때에는(레위8,12; 1열왕1,39)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과 능력이 내려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사울과 다윗의 기름부음 받는 장면을 비교해 볼 때, 사울의 장면에서는 다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만이 나오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뿔'에 기름을 채우라는 명령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명령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를 주도적으로 세우시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밀 이삭을 뜯었습니다.
평소라면 이웃의 밭에서 낫이 아닌 손으로 이삭을 자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신명 23,26 참조).
문제는 이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에는 추수 행위가 금지되는데, 밀을 뜯는 것이 추수 행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판하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정신을 밝히십니다.
먼저,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사제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먹었던 일화(1사무 21,1-7 참조)를 상기시키십니다.
안식일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 이 일화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준수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더 먼저라는 해석을 보여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많은 법과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법과 규정을 따르는 외적인 문제로 이웃을 단죄하기도 합니다.
법과 규정의 준수와 함께, 그 안에 담긴 본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의 법과 규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묵시 1,10)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거룩한 날로 지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그날이 거룩한 날이 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바리사이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정하여 놓은 규정입니다.
그들은 마치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 그들이 정하여 놓은 규정으로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수록,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분을 받을수록 꼭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이 결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도록 주어진 법으로 이웃들을 죄인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까지 모든 과정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교회에서 받은 모든 직분과 규정,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일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성실하게 한 다음에,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이들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인간의 열심을 의지한다면, 하느님의 열심이 주시는 안식에서 멀어진다.
(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 길을 내고 가면서? -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길은 하느님께 가는 길, 곧 구원의 길을 뜻한다. 농사는 아버지께서 지으시고 자녀인 우리는 먹는다. 그러니까 그 밀밭의 밀(씨)을 먹는 것이 안식의 길이다.
우리의 밀(씨-후손)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 그분의 죽음으로 얻는 용서와 안식인 것이다. 그 길을, 제자들이 내고 갔던 것이다. 구원의 길, 안식의 길을 냈던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이 28절에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을 아는 것, 곧 예수님의 대속으로 누리는 안식의 삶,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제 묵상했던 율법에 묶인 그들은 절대 누리지 못하는 안식이다. 법으로 정한 그 안식일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위한 신앙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많은, 법을 잘 키는 신앙이 되어 버렸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 인간의 지혜로 신앙을 살면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적대하게 된다. 하느님의 이름(뜻)을 위한 신앙이 아닌 자신의 이름(뜻)을 위한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2티모4,3-4)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뜻)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십자가)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히브6,10)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뜻)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히브6,17-20)
17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 약속 하신 것, 복(福, 바라크- 하느님의 생명력),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느님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것이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 앞에 놓인 희망, 앞으로 받게 될 하늘의 복, 생명이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 ‘휘장 안’은 ‘지성소’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그런데 그 지성소, 하느님 나라는 그 휘장이 찢어져야 들어갈 수 있다. 찢어지는 그 휘장이 예수님의 몸을 뜻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 영원한 대사제의 죽음으로 얻는 영원한 안식이다. 영원은 하늘의 시간이다. 그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 안식일, 법으로 지키는 주일은 하늘의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세1,31. 2,1-2) 1,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하느님께서 첫날-빛, 이튿날-물, 사흗날-씨(양식)를, 나흗날-해 달 별, 닷샛날-온갖 생물들을 만드시고 마지막 엿샛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6일에 창조를 완성 하시고 쉬셨는데, 그것이 이렛날 곧 쉼, 안식 7(쉐바-안식)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완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바로 안식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 6일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열심, 사랑, 자비가 하신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 갖는 것이 안식(7), 쉼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뜻, 안식의 길을 뱀의 유혹으로 잃어 버렸다. 그래서 그 뱀의 유혹대로 인간 스스로 그 안식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바벨탑을 하늘까지 쌓으려 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죄악의 탑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그대로 두면 영원히 뱀의 자식이 될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을 흩어 버리셨다.(창세11,1-9)
그 인간들의 죗 성이 역사를 따라 흘러 오늘날에 이르렀다. 여전히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을 위해 스스로 열심을 부리는 자신을 위한 신앙, 그 가파르나움을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피조물)이 하느님(창조주)의 자리에 앉은, 그 교만의 죄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 길이 막혀 모두가 영원한 죽음(지옥)의 나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 죄인들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구원자로, 우리의 속죄 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늘 길을 막았던 그 휘장을 찢으시고 하늘 길을 여신 것이다.
(마르15,37-38)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 영원한 안식의 하늘 길이 열린 것이다. 그 하느님의 사랑, 자비를 모르고 어떻게 안식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지키는 안식일, 그 주일 지킴으로는 절대 누리지 못하는 안식이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아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27~28)
마르코 복음 2장 27절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라는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이나 루카 복음 6장 1~5절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가 전승된 내용들 중에 간과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단죄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호스테'(hoste; therefore)도 병행구절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단어인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을 받기보다는 안식일에 대한 전체의 논쟁을 결론짓기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단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와 안식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권한이 있으시고(10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혼인 잔치 집의 신랑(19절)이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28절)까지 되시는 분으로서 나온다.
즉 이 네 편의 논쟁은 모두 예수님의 신적(神的)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도전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명쾌한 답변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10,17.22.28절).
그런데 그 답변들을 살펴보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하나의 공통된 관점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답변자이시고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예수님은 바로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10절)이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17절)이시며, '새 포도주, 즉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을 가져오신 분'(22절)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28절)이시라는 것이다.
2026년 01월 20일 화요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철구 요셉 신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식적인 것은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갖추려는 노력까지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형식을 불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는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형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사나 기도의 형식이 없다면 어떨까요?
오직 마음만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갖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진심을 담지 않은 형식은 껍데기만 남은 허울이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형식을 철저히 지켰지만,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참뜻은 잊었습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이 이삭을 뜯어 먹는 행동을 두고 그들은 ‘형식’을 어겼다며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의 눈길은 형식에만 머물렀기에, 그 형식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식 그 자체는 목적지가 아닌, 목적지로 이끄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표지판 앞에만 머무른다면 가고자 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신앙의 모든 형식은 우리의 영혼이 충만해지고,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형식 안에 담긴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따르면서 구원의 목적지인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이철구 요셉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다.
복음(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 안식일에 ‘새로운 길을 내고 갔음’이다. 곧 율법의 행위의 안식일 지킴이 아니라, ‘밀 이삭을 먹어야 참 안식(安息)을 누리는 그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내고 갔음’을 성경(聖經)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밀 이삭, 생명의 밀 빵’(양식-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 새로운 길, 곧 율법(옛 계약)을 대속으로 다 완성하시고 거저 은총으로 하늘의 용서, 의(義), 자유, 쉼, 안식을 주시는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모르니 ‘율법의 안식일 지킴’을 고집하는 모습이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사람에게 쉼, 안식을 주는,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의미는 모르면서 안식일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 전례로 지키는 그 ‘행위의 안식일’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은 모든 인간이 기지고 있는 죄가 해결이 될 때 비로소 자유, 쉼. 그 안식을 누리게 된다. 하늘의 대속, 그 새 계약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 새 계약의 새로운 길을 모르면, 현세의 내 십자가를 열심히 지려고 애(埃)쓰다가 내 죄를 대속 하시고 하늘의 용서, 자유, 참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 십자가로 질 줄 몰라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된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안식일은 열심히 지키면서 정작 안식은 모른다. 즉 제사는 열심히 지키면서 정작 제사를 대속으로 완성하시고 주시는 하늘의 용서, 쉼. 안식인 그리스도는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식인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안식일이 아닌, 자신의 뜻, 의를 위해 교리로 지키기에 급급할 뿐인 신앙을 산다.
주일에 육신의 뜻, 만족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으로만 먹을 줄 알지, 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기억도 하지 않겠다.”하신(예레31,31~ 히브10,15~) 그 하느님의 약속인 새 계약의 그 ‘새로운 길의 말씀’으로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새로운 길을 가는 이들을 박해한다. 제사와 윤리로 흠 없이 의롭게 살았던 사울이 그랬다.
(사도9,1-2)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새 계약의 새로운 길’인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잘못을 고백(告白)한다.
(필립3,6-9)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제사와 윤리)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대속, 그 새 계약으로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이 사라져 그리스도로 영원히 완전한 의(義), 거룩이 된다.(히브10,9-14) 하느님께서 내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시니 영원한 자유, 쉼, 안식이다. 매일을 안식일로 산다. 성령의 귀로 듣지 않으면 어찌 알아 듣겠는가, 믿겠는가?......
*오늘 전례에서~‘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 ‘다른 그리스도인드’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성공회, 개신교들을 뜻한다.곧 각자의 교리를 떠나 ‘새로운 길’인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주인, 주님으로 믿는, 천주교인, 개신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1코린3,4-7)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보호자 성령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새로운 길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길에서 애쓰며 헤매고있는 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그래서 새로운 길을 내주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살을 살게 하시고, 그것이 구원의 완성, 안식임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