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5일 화요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자선을 베풀어라. (루카11,37-41)
제1독서<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1-6)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자, 나 바오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화답송>시편119,41.43.44.45.47.48(◎41) ◎ 주님, 당신 자애가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 주님, 당신 자애, 당신 구원이,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
○ 당신 법규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 ◎
○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
○ 당신 규정을 따르기에, 저는 넓은 곳을 걸으오리다. ◎
○ 저는 당신 계명으로 기꺼워하고, 그 계명을 사랑하나이다. ◎
○ 사랑하는 당신 계명을 향해 두 손 쳐들고, 저는 당신 법령을 묵상하오리다. ◎
복음<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또는,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독서(로마 8,22-27)와 복음(요한 15,1-8)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갈라5,1~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으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6)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 번역된 '(우테 페리토메 티 이스퀴에이 우테 아크로비스티아 ; ute peritome ti ischyei ute akrobystia)는
직역하면 '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고 비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다' 이다.
'우테 ~ 우테'(ute ~ ute)는 영어의 'neither ~ nor' 과 같이 '~도 아니고 ~도 아니다', 혹은 '~도 없고 ~도 없다' 라는 이중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그리고 번역이 생략된 '티'(ti)는 '어떤 것'(anything)을 뜻하는 형용 대명사이며, 본문에서는 '우테'(ute)와 함께 쓰여 '아무것도 아니다(없다)' 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요하지' 에 해당하는 '이스퀴에이'의 원형 '이스퀴오'(ischyo)는 원래 '~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란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 '육체적으로 강하다' 즉 '건강하다'(마르2,17), '능히 ~하다'(루카6,48), '~할 힘이 있다'(루카16,3), '~할 수 있다'(필리4,13), '효력이 있다'(히브9,17) 등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우테 ~티 이스퀴에이'는 '~ 할 수 있는 아무 힘도 없다', '아무 효력도 없다' 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니고 있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신 가운데 다른 두 곳에서도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는 갈라티아서 6장 15절이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린토 전서 7장 19절이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만이 중요합니다"
이 구절들을 비교하면 본문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세 경우에서 모두 사용된 반어법적인 확실한 말은, 그렇다면 과연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효력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란 문제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이것은 바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임을 밝히고 있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왜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서에서 두 번씩이나 할례 뿐만 아니라 '비할례'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할례'(peritome;페리토메; circumcision)란 말에 대한 반대말로서 그 말을 첨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할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할례를 받지 않음(비할례; akrobystia; 아크로비스티아; uncircumcision)으로써,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은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은 그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할례나 비할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7장 18절의 "누가 할례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받은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누가 할례 받지 않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라는 권면을 통해서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정체성을 은폐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할례나 비할례 어느 쪽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할례를 받거나 비할례로 남거나 그것은 어느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믿음' 만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필요없이 관심을 가졌던 할례와 비할례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앞선 두번의 부정에 이어, 바오로는 '그러나'(alla; 알라; but)란 뜻의 접속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이 부분에 집중시킨다. 여기서 '~으로(써)' 에 해당하는 '디'(di)는 '~을 통하여'(through), '~으로 말미암아'(by)란 뜻의 매개체나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써, '믿음' 이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비할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행동하고 표현되는 믿음만이 효력을 갖는 것이다.
한편 '행동하는' 에 해당하는 '에네르구메네'(energumene)의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는 '운동력있게 일하다' 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의 형용사형 '에네르게스'(energes)는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라는 표현에 쓰였다.
따라서 '에네르게오' 라는 단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효력을 갖는데, 그 믿음도 사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살아서 운동력있게 나타나는 믿음뿐이라는 사실이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매일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뷔페에 가서 접시를 집으려고 하는데, 여러분 앞에 단 두 개의 접시만 놓여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는 접시 안쪽은 깨끗한데 바깥쪽이 더럽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은 깨끗한데 안쪽이 더럽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음식을 담아야 하니 안쪽이 깨끗한 접시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겉보다 속이 깨끗한 사람이 진국입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내면을 가꾸기보다 남들 눈에 쉽게 띄는 겉모습에 더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대비되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청렴한 척해도, 속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축적하며 끝없이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루카 복음에는,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과 비교하였을 때 눈에 띄게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23,26)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내면의 정결함을 직접 주문합니다.
반면에 루카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11,41)라는 명령으로 이를 대체합니다.
갑자기 자선을 베풀라니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탐욕이 가득한 인간의 속내를 비판하셨다면, 이 비판은 그런 탐욕으로 축적해 놓은 재산을 그냥 움켜 쥐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부(富)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탁월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재산을 지나치게 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움켜쥐고만 있으면 잔(盃)속의 얼룩은 더 심해지고 뿌옇게 됩니다.
가진 것을 좀 더 의미 있게 사용하여 뿌옇게 얼룩진 잔속을 깨끗이 닦아 내도록 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땅은 나를 위해 살라하고, 하늘은 너를 위해 살라 하신다.
복음 (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율법)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 하늘(빛)이 땅(어둠)에 내려앉으신, 곧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음을, 하늘에서 찾아내려 오심을 다시 보여주심이다. 율법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용서, 생명,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완성하신, ‘다 이루신’ 진리의 주님이시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 깨달음이 아닌, 자신을 위한 율법의 의로운 행위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 진리를 싫어한다.
(마태6,1)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갈라5,4)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 의로운 행위는 많이 하지만 자기 자랑, 자기 이름,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탐욕, 사악한 마음으로 앞 35절에서 어둠의 빛이라 하신 것이다.
(루가11,35) 35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법)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율법 지킴, 탐욕, 사악함, 그 속셈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를 살리시기 위한 드러내심이다.
(히브4,12-13)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 사람(아담)이 죄를 짓고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이 자신의 죄,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어린양을 죽이시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셨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자신의 열심, 의로움은 죄를 가리지 못하는 벌거숭이 일 뿐이다.
영원한 용서, 생명을 주는 하늘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을 주지 못하는 땅의 의로움은 벌거숭이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깨달아야) 셈을 할 수 있다. 율법(제사, 윤리)의 의로움과 인간들의 계명에 의한, 척하는 그 스스로의 의로움은 개짐(걸레, 똥)일 뿐이다.
(1요한1,9) 9 우리가 우리 죄(탐욕)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의롭게) 해 주십니다.
(로마3,23-25)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 대속, 그 사랑의 힘인 용서를 믿기에~
(이사61,10-11)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 땅에 새순, 생명의 싹이 난다는 것은 땅에 씨가 들어와 죽었기 때문이다. 곧 땅인 우리, 내 안에 예수께서 들어와 죽으심(대속)으로 나(쓴물)에게서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자기 사랑이 아닌, 진리 안에서 이웃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1요한3,18)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2요한1,1) 1 원로인 내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인사합니다. 나는 그대들을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1코린10,24) 24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
(공동번역성서) 24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도모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힘을 주소서, 아버지의 뜻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매일 미사책 사제의 묵상글로 마무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조 되는 이미지들을 보여줍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겉과 속, 탐욕과 자선’이 그것입니다.
바라사이들이 적용하는 율법은 외적인 모습에만 적용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함(바름)과 부정함은 손을 씻었는지, 잔과 접시는 깨끗한지, 먹으려 하는 음식이 정(定)한자, 부정(不定)한지가 중요하였다.
자연스레 율법은 하나의 기준 만을 제시하였다. ‘맞고 틀림, 합당과 부당, 정함과 부정함’을 나누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에 율법을 완성하려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본질(진리)을 기억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이 내면을 향하고 마음을 움직여 내 것 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축복과 구원을 자동으로 가져다주는 장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의무,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하는 주님의 법이 지닌 본질을 잊는다면, 우리의 모습도 바리사이들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나를 죽이는 탐욕의 자리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 (진리로) 앉아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1,37~41)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38~41)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행위는 당시 유대 사회의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으며,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다.
이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사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철저하게 지켜온 규범이었다(마르7,3.4).
사실 식사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지 의식적인 차원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무슨 거룩한 계명인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적 정식을 왜곡한 유대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강하게 책망하시기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식사 전에 손도 씻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 등 거룩하고 고결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왜곡하고, 그 속마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하는 등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기서 '탐욕'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greed)는 '억지로 끌고 가다', '탐심을 가지고 붙잡다'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조'(harpazo)에서 온 말로서 '강탈', '약탈', '착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히브10,34; 마태23,25).
루카복음 16장 1~13절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끝난 다음에 바로 루카복음 사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16,14)이라고 하면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는 바리사이들이 돈에 대한 탐욕으로 '과부들의 가신을 등쳐' 먹는 행위까지 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속마음은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악'에 해당하는 '포네리아스'(ponerias; wickedness)는 '악한 성품의', '타락한'이라는 뜻을 지닌 '포네로스'(poneros)에서 유래하여 '시기심', '악의'(로마1,29)를 의미한다.
루카 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되찾은 이들의 비유'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큰 아들은 분명히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실과 또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잔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루카15,28).
이처럼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지독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과 시기심으로 인해 그들이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바리사이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적 행위만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꾸미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내면세계도 아름답게 보아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아프로네스'(aphrones; you foolish people)는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을 뜻하는 '아프론'(aphron)의 복수 호격이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과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고,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자칭 타칭 의인이요, 존경받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겉 뿐만 아니라 속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 형식 준수를 통해 겉만 거룩하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1장 41절의 '속에 담긴 것'에 해당하는 '타 에논타' (ta enonta; what is inside)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음식, 마음, 재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루카복음 11장 39절의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그런 탐욕과 사악의 마음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기에 그런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에서 부정한 재물을 되돌려 줄 뿐 아니라, '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alms)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는 말씀은 자선의 결과 그들 자신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판타'; panta; all thing; everything)은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는 죄의식을 비롯한 하느님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선하게 되면, 재물을 옳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가 그들을 더러운 탐욕과 사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2024년 10월 15일 화요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잔과 접시뿐이겠습니까? 겉은 깨끗하게 보이나 속은 더러운 것은 잔과 접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만 깨끗하게 보이려 하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정작 그들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1,39 참조).
다른 이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만큼 속이 차 있지 않다는 표지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의 수도 규칙서에서, 수도원에서 계절이 바뀌어 갈아입을 옷을 받게 될 때 좋은 옷을 받으려고 다투는 사람은 그러한 행동으로써 내적인 거룩한 옷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가난하지 못하여서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그릇을 깨끗이 하거나 손을 씻거나 옷을 깨끗하게 입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이 비어서, 속이 깨끗하지 못하여서 그것을 가리려고 겉을 꾸밀 때 그것은 허영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6)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참된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나의 의로움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굳이 손을 씻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모두 유다인 출신이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규정대로 손을 씻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손을 씻지 않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마음을 버리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다고 보여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진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자선을 베풀어라
복음 (루카11,37-41)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 율법, 옛 계약의 집에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심이다. 곧 하늘의 용서, 생명께서 들어 앉으심 이다. 구원의 모습이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 율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함이다.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 계명을 열심히 지켰던 사람이기에~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만드실 때 속에 담긴 것?,
(창세2,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우리 속에 하느님의 생명, 숨이 있음이다. 그 하느님의 숨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킨 인간의 의로 존재할 수 앖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욕망을 위해 뱀(사탄)의 거짓말을 먹었듯,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한 삶,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숨, 생명의 자리에 죽음인 탐욕, 사악이라는 더러움이 차 버렸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 어둠 속에 갇힐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숨, 생명을 다시 회복 시켜 주시는, 곧 구원을 위한 자선을 베풀어라 하심이다.
우리 속에든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사람, 새 것으로 새 창조하실 하느님의 새 계약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진리로 주는 것이다. 그것이 참 자선이며 이웃 사랑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내 뜻, 소원을 들어 주시는 주님으로 보고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라고 이웃에게 전해주면 자신과 이웃 모두 자신들 속에 남아있는 더러움 때문에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속으로 없애시기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 힘없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명, 구원의 길, 진리로 전해주면 모두가 깨끗해져 영원한 빛으로 들어갈 수 있음이다.
(1베드3,20-21)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 우리의 죄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이다. 곧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더러운 양심이 씻겨, 바른 양심이 되었음을 청하여 찾는 것이다.
(예레31,33)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시작하시고 끝 맺으신다. 우리의 소원, 욕망을 위한 제사와 윤리의 신앙을 멈출 때, 버릴 때....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 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 물은 진리의 성령, 새 계약의 피, 생명 수인 말씀이다. 우리의 구원이다.
(갈라5,6)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믿음을 위한 사랑의 행동이다. 곧 이웃 사랑이다. 우리에게는 이기적사랑이 있을 뿐이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어줄 사랑이 없다. 곧 십자가의 대속,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어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리로 마음에 새겨, 마음에 지키게 하는 그 행함, 행동을 말함이다.
그것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은총,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이 아닌,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것이 됨을 깨닫고 믿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봉헌,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