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07일 월요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10,25-37)
제1독서<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복음> (갈라1,6-12)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화답송>시편111,1ㄴㄷㄹ-2.7-8.9와 10ㄷ(◎5ㄴ)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그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네. 그 계명들은 모두 참되고,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영원무궁토록 견고하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복음<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갈라1,6-12)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1~12)
갈라디아서 1장 6~10절에서 '다른 복음'을 쫓는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강한 어조로 책망한 사도 바오로는 이제 1장 11~17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임을 변증하기 위하여 이 복음이 신적 기원을 가졌음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배후에는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새로운 논지를 전개하면서 사도 바오로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 여러분'(adelphoi; 아델포이)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형제들과는 대조되는, 배교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갈라티아 지방의 이방 성도들을 향해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같은 조상을 가진 다른 유대인들을 '형제' 라고 불렀는데 (레위19,17; 신명1,16; 사도7,2; 로마9,3),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의 종교 공동체에서도 그 구성원들이 서로를 '형제들'로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볼때 초대 교회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을 '형제'로 불렀던 관습은 이러한 유대와 헬레니즘의 두 관습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사용된 '형제'라는 호칭에는 그 인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란 호칭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자신과의 관계적 측면에서,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형제들'로 부른데서 (마르3,31~35)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였다(로마8,29).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더 나아가 이러한 공동의 관계를 기초로 해서 계속해서 '형제'란 호칭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애로써 애정깊은 상호 공조의 자세로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로마14,10.13.15; 1코린5,11; 6,5~8; 8,11~13; 2코린1,1; 2,13).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심지어 본서와 같은 갈라티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엄격한 어조 가운데서조차 그들에게 '형제들'이란 호칭을 사용하여 자신과 갈라티아 교인들간의 형제로서의 관계,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됨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지금 그러한 사실조차 잊은 채 배교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2)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가 나온다.
갈라티아서 1장 12절 전체가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사람을 쫓아 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1장 11절의 까닭을 상세하게 해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우데 ~ 우테'(ude ~ ute)라는 이중 부정 구문을 사용하여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그리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 곧 신적인 계시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원문에는 '내가'에 해당하는 1인청 주격 대명사 '에고'(ego)가 사용되고 있다. 희랍어에서는 동사에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주격 인칭 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주어를 특별히 부각시키고자 할 때에는 사용한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지방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거짓 복음을 전했던 반면에, 자신은 이들과 달리 신적 기원을 가진 참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에고'(ego)라는 1인칭 주격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 인도되고 있는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우선 왜곡된 거짓 복음에 대한 경계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오로는 앞에서 '우데 ~ 우테'(ude ~ ute)라는 이중 부정을 통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이 전혀 인간적인 것과 관계없음을 강하게 변론한 후에, 새 성경은 '오직' 이란 부사로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그러나'(but)라는 뜻을 지니는 접속사인 '알라'(alla)를 사용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는 ‘이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이 바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루카 저자는 다른 공관 복음 저자들과(마르 12,28-34; 마태 22,34-40 참조) 달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계명으로 함께 제시하면서 이웃 사랑이 결코 하느님 사랑과 떨어질 수 없는,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계명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율법 교사는 이웃 사랑의 주제를 이어 나가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도와야 할 이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 노새, 여비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탁월한 본보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율법 교사의 질문이었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이웃에 대한 율법 교사의 생각을 바꾸게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고르고 선별하는 것에 더 마음을 쓰는 ‘나’ 중심의 사고에서, 내가 직접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는 ‘상대방’ 중심의 사고로 전환한 것입니다.
곧 내가 정해 놓은 ‘이웃’의 범주에 누군가 자격이 되어 들어오면 그제야 사랑을 베풀겠다는 소극적 태도에서, 나 자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누구든 그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는 적극적 태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인색한 사랑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이며 당신께서 몸소 십자가 죽음으로써 보여 주신 진정한 사랑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성경을 세상적 이야기로 푸는 것이 조금은 아쉽네요.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누가 저의 이웃인가?
(루카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 법(도덕과 윤리)으로 읽었느냐? 진리(하늘의 대속)로 읽었느냐? 하느님의 계명으로 읽었느냐? 인간의 윤리 계명으로 읽었느냐? 숨겨진 하느님의 진리로 읽었느냐? 인간의 뜻으로 읽었느냐? 어떻게 읽었느냐 물으시는 것이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율법교사, 그의 말대로 라면 그는 살지 못한다. 하느님을 목숨 바쳐 사랑할 수도,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시편14,2-3) 2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3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로마3,10-12)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 말씀을 하늘의 진리로 올바로 읽었다면, 깨달았다면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목숨 바쳐 사랑해 주심을 알았을 것이다.
그 사랑의 하느님을~ 온 마음과 정신, 온 힘을 다해 나의 생명, 진리로 믿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또한 병행 복음 마태복음으로 가보면~
(마태22,39)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와 같다는 것이다.
죄인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어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이웃도 하느님을 온 힘으로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살리는, 그것이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큰 계명이다.
그러나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제사와 윤리,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읽었기에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에페2,8-9참조)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아는 것-알고, 아는(야다-눕다. 하나 되다), 모든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의 뜻에 순종 하신 그 아버지의 사랑과 한마음으로 죄인들의 형제, 친구, 이웃으로 죽으신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받는 구원, 생명이니 그 사랑의 관계를 아는 것,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없는 교사는 ~~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 자신이 사랑할 이웃을 묻는다, 찾는다.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위선, 교만이다.
율법을~ 말씀을 사람의 수준, 관점으로 읽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죽음의 상태인 그에게 그를 위한 한 가지 비유 이야기를 주신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 물론 어떤 사람은 율법교사다. 강도들 또한 율법교사들이다.
(요한10,7-8)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하늘의 의로움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리로 주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인간의 뜻으로 읽고 가르쳐, 인간의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이 이르게 잘못 가르쳐,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율법교사들인 것이다.
그 상태가,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린~ 그것이 하늘의 혼인예복, 그 생명의 옷을 빼앗긴 죽음의 상태인 것이다.
사람의 관점, 수준, 지혜로 배우고, 가르치고 또 배우고, 가르치고~그렇게 헛된 신앙의 역사는 반복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묵시3,3 9참조)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자들은 모든 진리의 길, 그 반대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 예수님의 마음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기름과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돌봐 주신 것이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끝까지 갚아 주시는 사랑이시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율법교사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의 질문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냐”로 답하신다.
그것은 율법교사인 그에게 초죽음이 된 이를 싸매줄, 그리스도(기름)의 피(포도주), 그 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라 하셨겠는가? 본문에 강도를 만나 죽을 뻔 그가 사마리아인의 받은 것처럼, 율법을 진리로 읽지 못해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너, ‘강도 만난 율법교사야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그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받아라’ 하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도리로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생명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인간의 착한 행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2티모1,9-10)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깨끗하고 거룩해 지는 것이다.) 10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아멘!!!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0,25~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0~33)
루카 복음 10장 30~35절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이웃이 자기 동족에 한정된다고 믿고 있는 어떤 율법 교사에게, 그의 생각이 틀렸고, 또한 그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 아님을 드러내며, 또한 그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자 착한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나 레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예리코는 해면보다 250m 낮은 저지대이다.
이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도 많았으며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루카 복음 10장 30절의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에 해당하는 '헤미타네'(hemithane; half dead)는 '절반'을 뜻하는 '헤미'(hemi)와 '죽다'를 뜻하는 '트네스코'(thnesko)가 합쳐서 만들어진 형용사로서, 강도 행각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강도맞은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 주면서, 이웃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마침 그때 백성들을 위해 성전에서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임무를 지닌 사제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예리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도맞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에 해당하는 '안티파렐텐'(antiparelthen;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는 '반대'의 뜻을 지닌 '안티'(anti)와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파레르코마이'(parerchomai)가 결합된 동사인 '안티파레르코마이'(antiparerch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이것은 사제가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우회하여 지나갔음을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그는 자신도 강도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그렇게 헀을 것이다(레위21,1~3).
하지만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 강도만난 사람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도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사제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제는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외면했으며, 백성의 종교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사랑의 실천에 모범이 되어야 할 사제 (민수18,1~32)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도무지 용납이 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또한 레위인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별된 지파의 사람이었는데(민수18,1~32), 사제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유대의 종교 특권층이 속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들이야말로 레위기 19장 18절에 명시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더 잘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레위인도 앞서 지나간 사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외면하고 떠나가 버린다.
한편, 세번째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에 의해 거의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부류인데도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과 앞서 나온 사제와 레위인을 비교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고하며 사악한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루카 복음 10장 33절에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 (esplangchnisthe; he took pity on him; he had compassion on him)는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신약 성경에서 12회 등장하는 이 단어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에게 쏟아부어져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만나 폭행당해 죽어가는 사람을 당연히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은 어려움에 처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생길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에, 사마리아인만이 비극에 처한 자를 가엾에 여기는 참된 사랑의 자비를 지녔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역설과 아이러니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웃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멸시받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유대인'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시 이웃을 한계짓고 구별짓는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이웃의 자세를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2024년 10월 07일 월요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 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 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는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7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나의 이웃은 그리스도’
복음(루카10,25-37)
25ㄱ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 율법의 교만한 모습이다.
25ㄴ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우리는 알고 있다. 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을 아는 것이라고~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알고, 아는 것(히브리어 ‘야다’- 함께 눕다) 하느님 홀로 창조주시며 죄의 속죄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 이심을 알고 그분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1티모6,16)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곧 인간의 마음, 목숨, 힘, 정신, 그 모든 것이 영원하지 못한 허무요 헛된 것임을 깨닫고 하느님께만 생명, 힘,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否認), 버림으로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 되는 것이다. 그것이 육(肉)의 죽음이다. 그것이 곧 마음과 목숨, 힘,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하느님 앞에 자신을 버리면, 죽이면 산다. 곧 사랑, 자비이신 신과 영원을 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 들이는 것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진리를 다른 이웃에게 전해주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모두 자신을 버리고, 부인하는 낮아짐으로 하는 것이다.
(루가17,10)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 율법은, 인본주의는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이웃 사랑이다. 자신의 행위를 가치로 여기며 자신을 세우는 정당함으로 고집하기 때문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 강도는 예수님 이전(以前)에 율법자들이다.(요한10,8) 하느님의 뜻, 의(義), 영광을 깨달아 드러내라고 주신 말씀인데, 말씀을 사람의 계명, 말로 받아 인간의 뜻, 의, 영광으로 챙기는 도둑질을 하기 때문이다.
(로마3,20)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 율법이 옷을 벗겨 알몸으로, 곧 부끄러운 자(죄)로 초주검(반 시체)을 만든 것이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제사와 윤리)의 사제, 레위인, 곧 율법은 구원, 진리의 길 반대쪽으로 간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 - ‘스폴랑콘조마임’ - 자비, 자궁. 신적 마음으로 생명을 키워내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곧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비유하심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기름과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영(靈)과 피(血)로 죄를 씻고,(포도주- 계약의 피) 그리스도의 옷으로 덮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에제16,8)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35ㄱ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 두 데나리온, 구약, 신약, 두 권으로 분리된 상태다. 구약의 실체는 신약으로 한 권, 하나다.
35ㄴ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구약의 율법, 그 옛 계약으로 드러난 알몸, 죄를 새 계약인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돌아와 다 갚겠다. 곧 성령으로 상처를 덮어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1코린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글스도의 대속)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율법자에게 이웃이 되어준 이는 사마리아인,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율법자야! 율법은 진리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고, 자비를 베풀지도 않았다. 그러니 가서 너도 사마리아인의 이웃으로 자비를 받아라’ 하심이다.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 그리스도의 자비를 먼저 받아야, 이웃에게 그분의 자비를 전해주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음이다.
(갈라3,24-25) 24 그리하여 율법(제사, 윤리, 옛계약)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 하느님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말씀 안에 머물러 그리스도 예수님의 자비를 입게, 깨닫게, 믿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