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01일 화요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 (루카9,51-56)
제1독서<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욥기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화답송>시편88),2-3.4-5.6.7-8(◎3ㄱ) ◎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
○ 제 영혼은 불행으로 가득 차고, 제 목숨은 저승에 다다랐나이다. 저는 구렁으로 떨어지는 사람처럼 여겨지고, 기운이 다한 사람처럼 되었나이다. ◎
○ 저는 죽은 이들 가운데 버려졌나이다. 마치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 같사옵니다. 당신이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니, 당신 손길에서 멀어진 저들처럼 되었나이다. ◎
○ 당신이 저를 깊은 구렁 속에, 어둡고 깊숙한 곳에 처넣으셨나이다. 당신의 분노가 저를 짓누르고, 당신의 성난 파도가 저를 덮치나이다. ◎
복음<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또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독서(이사 66,10-14ㄷ)와 복음(마태 18,1-5)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욥기3,1~3.11~17.20~23)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1)
욥기 1~2장은 욥이 겪은 두 차례의 시련과 그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제 욥기 3장부터 37장까지는 욥기 겪는 불행에 대한 욥과 친구들 간의 본격적인 논쟁을 다룬다.
욥기 3장 1~10절은 욥의 초기 독백 전반부로서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내용을 기록한다.
그중 3장 1절은 욥기 친구들과 이레 동안 밤낮을 보낸 후에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그런데 오랜 침묵을 깨고 욥이 입을 열어 처음으로 한 말들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저주하였다'에 해당하는 '와예칼렐'(wayeqallel; and cursed)은 계속적 '와우'(wau; and)에 '가볍게 하다', '멸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칼랄'(qallal)의 강조 능동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처럼 '칼랄'(qallal) 동사가 강조형으로 사용되면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제 생일을'에 해당하는 '요모'(yomo; his day; the day of his birth)는 '날', '해'를 의미하는 명사 '욤'(yom)에 3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직역하면 '그의 날'이다.
여기서 '그의 날'이라는 표현은 생일의 관용적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생일은 가장 행복하고 복된 날로 여겨지는데, 욥이 그 날을 저주하고 욕했다는 것은 욥의 고통과 번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한다.
사실 욥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할 뿐 아니라(3,3~9) 시련을 당했지만 거의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을 고백하던 초반의 자세 (1,21.22; 2,10)에서 약간씩 멀어지는 듯한 말조차 내뱉는다.
따라서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내용은 욥이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삶을 살게 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욥이 직면한 현실의 고통스러운 양상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표현들은 그의 친구들에 대하여 한 말도 아니었고, 하느님께 대하여 한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즉 이것은 갑자기 밀려든 엄청난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여 탄식하는 욥의 절망스러운 독백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
당시 욥이 자신이 처한 참담한 현실과 견딜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 속에서 내뱉을 수 있는 그의 말은, 그가 자신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하느님의 축복과 깊으신 뜻에 따라 주어진 생명을 누리는 것에 대한 탄식은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욥이 그토록 처절한 고통의 현실, 말하자면 좌절과 번뇌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원망하거나 사악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자신을 입술을 지켰던 욥의 자세는 그가 하느님을 향한 경건과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위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정의 첫 순간에 마주한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실 여정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다인들을 향한 오랜 반감과 더불어, 그분께서 그리짐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사마리아인들을 두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살라 버리겠다.’고 한 것은, 지난날 엘리야 예언자가 자신을 잡으러 사마리아에서 온 이들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살라 버린 일을(2열왕 1,10.12 참조) 떠올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대와 무시에 분개하여 복수를 떠올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몇몇 수사본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루카 9,56, 『성경』 각주 참조)라는 말씀을 덧붙여 그분의 속마음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도 장차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외면과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그들의 선의가 짓밟힐 때가 오면, 증오와 원망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그 사명을 이어 갈 힘을 지니도록 미리 단련 시키셨습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욥과 같은 의인도 까닭 없는 고통과 지독한 시련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처량히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사도임을 기억합시다.
내 진심을 왜곡하는 이들이나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을 만날 때, 흔들림 없는 내적 평화와 온유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9,51-56)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걸어야 할 인생의 여정의 알고 계셨고, 그 계획을 따를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계속해서 당신을 시험하고 비난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루카5,21.30; 6,2.7.11)에 의해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으신다는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를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루카 복음9장 51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그 얼굴을 고정시켰다'가 된다.
'그는 ~그 얼굴을'에 해당하는 '아우토스 토 프로소폰'(autos to prosopon; he - his face)은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쪽을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또한 '마음을 굳히셨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스테리센'(esterisen; resolutely set; stedfastly set)의 원형 '스테리조'(sterizo)는 어떤 사물을 흔들리지 않도록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며, 비유적으로는 마음을 변치 않도록 확고히 하는 것을 가리킨다(루카22,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남겨진 길을 위해, 비록 그 길이 당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좌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지 않았다.
오로지 당신이 가야 할 길에 꽂혀 있는 표지를 향해 얼굴을 고정시켜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당신의 걸음을 어느 누구도, 어떤 세력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것은 십자가 이후에 당신에게 이루어질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히브12,2).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이제 유다 지방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신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요르단강 동편으로 상당히 우회해야 하므로 적어도 며칠을 더 걸어야 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한 마을에 숙박하기 위해 제자들 중 몇을 심부름꾼으로 보내셨다.
사마리아인들은 B.C.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북부 이스라엘과 아시리아 사이에 생긴 혼혈족인데, 그들의 기원은 열왕기 하권 17장 24~41절에 나온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느헤미야와 즈루빠벨이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도 동참하고 싶어했지만, 종교적 순수성을 내세운 유대인들은 그들의 도움을 냉정하게 거절하여 그때부터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경원시하게 되었다.
유대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마리아인들은 독자적으로 주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가리짐산 위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했다(요한4,20).
그러나 그 성전마저도 마카베오 시대때 요한 힐카누스(J. Hyrcanus)가 파괴함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반목은 더해 갔다.
루카 복음 9장 53절에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나온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갈릴래아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종교 순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 피해 의식이 큰 사람들이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들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갈릴래아의 유대인들을 싫어했으며 통과시키지도 않았다.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들은 심지어 자기 지역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여행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은 주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옛날 능력의 예언자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1열왕18장)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서 원수들을 멸망시킬 것을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신 것(마르3,17)도 이러한 충동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불과 얼마 전에 타볼산에서 엘리야를 본 적이 있는(루카9,28~36) 야고보와 요한은 과거 아합 시대에 바알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싸우던 엘리야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말속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고자 하는 그들의 충성심이 담겨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원수를 심판하는, 그것도 불로 무자비하게 태워버리는 것만이 그들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속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마태5,43.44),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명백히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12,47).
주님께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결여된 지나친 충성은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행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2024년 10월 01일 화요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리라고 아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마태 23,3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는 것 또한, 그곳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삶은 늘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6,22)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굳히신 것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없애려고 하는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기쁘게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따라 살기는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여야 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율법의 본거지(本據地)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道)
복음 (루카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하늘에 오르는 길이 예루살렘,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곧 율법, 그 옛 계약의 심판으로 죽어야 할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로마,20 야고2,10 갈라,10) 율법이 요구하는 죗값을 치루고 믿는 이들에게 의로움을 전가시켜 주시기 위해(로마,21-24 히브7,18-19) 저주의 십자가에 대신 달리시러, 곧 대속, 그 희생의 제사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율법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다.
*율법 - 옛 계약 ☞ 첫 번째 것. *십자가 - 피의 새 계약 ☞ 두 번째 것.
(히브10,9-10)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 사마리아, 북 이스라엘로 세상의 힘을 추구했던 그들은 이방 강대국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피가 섞여 세상화가 되어 하느님의 뜻(구원)을 떠난 이들이었다.
⁜ 사제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을 자신들의 유일한 성전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다인들은 사람리아인들이 혼혈민족인 동시에 혼합종교를 신봉한다고, 그들과 상종하는 것을 꺼렸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업신여기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모든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기간 중에는 이러한 반감이 더욱 고조 되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나 유다인들이나 자신들의 뜻을 위한 신앙을 고집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하느님의 뜻을 청(請)하는 신앙을 사는가?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예수님은 죄인들을 살리시려 가시는 길이시기지, 죽으러 가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3,17) 하늘에서 불이 내리면, 아직 진리가 되지 못한 제자, 자신들부터 다 죽었을 것이다. 지난날 나를 보는 듯하다.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한 행위로 찐(참)신자로 자처했던 내 모습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道)이 구원, 생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 구원의 약속, 계약이다. *계약 - ‘스타오로스’ ☞기둥, 십자나무.
그 하느님의 계약인 십자나무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진리로’ 받아들여 그분과 한 마음이 되었을 때 하늘(진리)이 되었다 말한다.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믿는 것을 진리라 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우리의 모든 것이 허무요 헛된 것임을 깨닫고, 하늘 위, 하느님께만 참(진리)이 있음을 깨닫고, 믿으며 청하는 것, 진리의 삶이다.
(요한3,3.5) 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하늘 위의 물과 성령, 모두 진리로 하느님의 말씀과 영으로 살아남, 새로 태어남이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 그러니까 하늘 아래 율법, 그 옛 계약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인정하는 자기 부인(否認)의 신앙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옛 계약(제사, 윤리, 교리)의 신앙으로 몇몇 가지를 지켜 놓고는 신자인 냥 하면 불의, 위선이다.(야고2,10 이사1,11-14)
(갈라3,22-25)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 제사와 윤리, 교리, 그 옛 계약의 신앙을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이 주시는 하늘의 복( 용서, 의로움, 안식, 자유, 생명, 평화)에 관심이 없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절(루가9,57-이하)이 그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 영원한 보호자,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천주의 성령님!
세상과 짝하는 삶이 영원한 어둠의 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진리가 되어 하늘의 자유, 안식, 평화, 그 빛의 삶을 현세에서부터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