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경 위에 등불 (루카8,16-18)

2024. 9. 22. 오후 2: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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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일 월요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경 위에 등불 (루카8,16-18) 


   


1독서<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잠언3,27-34)

27 내 아들아,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28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29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30 너에게 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공연히 다투지 마라.

31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은 어떤 것이든 선택하지 마라.

32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

33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34 그분께서는 빈정대는 자들에게 빈정대시지만 가련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신다.

 

<화답송>시편15,2-3.3ㄴㄷ-4ㄱㄴ.5(1) 주님, 의로운 이는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지내리이다.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복음<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8,16-1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또는,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독서(갈라 2,19-20)와 복음(마태 16,24-27)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잠언3,27-34)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신다.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그분께서는 빈정대는 자들에게 빈정대시지만, 가련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신다."(32~34)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신다.' (32)

 

잠언 3장 32절 이하 35절은 지혜로운 삶의 필수 요소로서 이웃사랑이라는 선한 인간관계를 권장하는 솔로몬의 제6설교(3장27~35절)의 마지막 문단이다.

여기서 솔로몬은 적극적 선행의 실천(27~28절)과 이웃을 향한 분쟁과 포악금지(29~30절) 명령의 이유를 열거하며 인간관계의 기본 자세(姿勢)를 권장한다.

잠언 3장 32절 이하 35절은 앞선 명령의 이유를 제시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32절이 '왜냐하면 ~ 때문이다'란 이유의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먼저 본 절에서는 솔로몬은 올곧은 이(정직한 자)와 비뚤어진 자를 대비시키며 그들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올곧은 이'에 해당하는 '예샤림'(yesharim)의 원형 '야사르'(yashar)는 '곧다'(에제1,7), '바르다'(잠언14,12)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짓됨에서 떠난 자'란 의미도 있으나 하느님이나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비뚤어진 자'에 해당하는 '날로즈'(naloz; froward)의 원형 '루즈'(luz)는 '굽히다', '구부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앞의 '올곧은 이'와 정반대로 하느님이나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릇된 자세를 가리킨다.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 단락은 주로 인간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인간관계에서 상반된 태도를 가진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중에 '올곧은 이'는 주님과의 관계가 '친교'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반면에 '비뚤어진 자'는 주님의 '증오'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올곧은 이'와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까이 하신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쏘도'(sodo)의 원형인 '쏘드'(sod)는 '가깝다'(욥기19,19), '사귀다'(시편25,14)로도 번역되는 단어로,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친밀한 우정과 교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욥기29,4; 아모3,7).

반면에 '비뚤어진 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역겨워 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토아바트'(thoabath)의 원형 '토예바'(thoebah)는 '혐오스러운 것', '구역질나는 것', '몹시 싫어하는 것', '증오'등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은 '비뚤어진 자'(완고한 자, 옹고집)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노)가 얼마나 큰가를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이러한 의노(義怒)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므로 이들은 필연적으로 멸망 할 수밖에 없다.

 

솔로몬은 이와 같이 '비뚤어진 자'와 '올곧은 이'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젊은이들로 하여금 인간관계에 있어서 '올곧은 이'로서의 정직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악인(惡人)의 집에 저주(詛呪)를 내리시고, 의인(義人)이 사는 곳에는 복(福)을 내리신다.'(33)

 

앞선 32절에서는 비뚤어진 자와 올곧은 이에 대한 하느님의 상반된 태도를 제시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있어 올곧은 이의 삶을 촉구했던 솔로몬이 33절에서는 악인의 집과 의인이 사는 곳에 각각 임하는 주님의 저주와 축복을 제시함으로써 의인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다.

 

원문으로 보면, '악인의 집'과 '의인이 사는 곳'이 문장 가운데 배치되어 강조되는 ‘교차 대구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악인의 '집'을 나타내는 용어와 의인이 '사는 곳'을 나타내는 용어가 각기 다르다.

 

전자는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인 가옥(家屋)을 나타내는 '빠이트'(bait; house)가 사용된 반면, 후자는 '나웨'(nayeh; home, habitation)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나웨'는 '쉬다'라는 뜻의 동사 '나와'(nawa)에서 유래된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목 생활의 터전이었던 목초지(木草地)를 의미한다.

 

후자에 대하여 이러한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의인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가족 구성원을 넘어서 그들의 산업에 까지 미치게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악인의 집에는 주님의 저주가 내리는데, 여기서 '저주를 내리시고'로 번역된 '메에라트'(meerath)의 원형 '메에라'(meerah)는 외적 파멸(破滅) 뿐만 아니라 내적 파멸까지 포함하여 악인을 아예 땅에서 멸절되게 하시는(신명28,20)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의인이 사는 곳에 임하는 복을 나타내는 '복이 내리신다.'에 해당하는 '빠라크'(barak)는 구약 성경에서 복이 주어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동사로서(창세27,27) 영적(靈的)인 복(福)과 물질적(物質的)인 복(福) 모두가 내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산업(産業)에 내리는 물질적인 축복을 포괄하기 위하여 이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원문으로 이와 대응을 이루는 '주님께서~저주를 내리시고'에 해당하는 '메에라트 예흐와'(meerath yehwah)는 명사 연계형과 고유 명사가 함께 쓰인 형태로서 동사가 사용된 후반절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악인의 집에 주님의 저주가 내리는 것은 불변의 고정된 상황인 반면에 의인이 사는 곳에 복이 내리는 것은 계속되는 동적인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님의 저주'와 '복'이 대응되는 것은 의인이 사는 곳에 내리는 복(福) 역시 주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복임을 보여준다.

솔로몬은 인간관계에 있어 의(義)로움을 추구해야 할 이유를 이와 같이 하느님의 축복에서 찾고 있다.

 

'그분께서는 빈정대는 자들에게 빈정대시지만, 가련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신다.'(34)

 

본절에서 솔로몬은 빈정대는 자와 가련한 이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겸손한 태도를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본절 서두에 나오며 '진실로'(surely)로 번역된 '임'(im)은 여기서는 '참으로'(1사무21,5), '결코'(민수14,23; 32,11) 등으로 번역되는 감탄사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인간들의 태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도 있는 빈정대는 자들은 비웃으시고, 사람들에게 무시될 수도 있는 가련한 이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태도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빈정대는 자'에 해당하는 '랄레침'(lalletsim; proud mockers)이나 '빈정대시지만'에 해당하는 '얄리츠'(yallits; scorn)의 어근은 모두 '루츠'(luts)로 동일하다.

이처럼 '멸시하다'(잠언19,28),'빈정거리다'(욥기16,20)란 뜻을 지니는 단어가 2회 연속 사용된 것은 인간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교만한 자는 하느님으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받고 조롱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거만(倨慢)한 자에 대하여 거만(倨慢)으로 갚으신다.

 

그리고 여기서 '가련한 이들'에 해당하는 '웰라아나임"(wellaanaim)의 원형 '아나우'(anau)는 '비천한 자', '억압받는자', '온순한 자'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성경(聖經)은 이것이 지혜로운 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목이며, 축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본절에서도 겸손한 자에게 하느님께서 호의를 베푸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호의'로 번역된 '헨'(hen; grace)은 '호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이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비천(卑賤)하게 생각하며 낮추는 자를 아름답게 보시고 은혜(恩惠)를 베푸신다.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 찬가’(1,1-1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1,9)으로 고백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참 빛이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내면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그분을 회피하거나 해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이가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구원의 빛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 8,4-8 참조)에 이어 들려주십니다.

마음속에 심긴 하느님 말씀을 싹틔워 백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와 더불어, 그러한 삶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둔 등불마냥 감추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착한 표양과 모범까지도 감추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선(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선을 행하기를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깊은 깨달음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선행을 베풀기를 지체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떤 악행도 늘 경계하는 삶을 이어 가야겠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주위에 빛이 되어 주는 삶을 더 실천하면 할수록 더 깊은 확신과 기쁨을 얻어, 언제나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학식 높은 도울이 왜 성경(말씀)을, 그리스도를 반박할까?

 

복음 (루카8,16-1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등경은 교회를, 그릇은 사람을, 등불은 교회의 빛, 주인이신 주님을 뜻한다. 

그러니까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 의로움, 그 영광의 빛을 보도록 인간들의 의로움, 영광으로 덮지 말라, 가리지 마라는 말씀이다.

 

(이사64,5)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이사57,12) 12 내가 너의 의로움과 너의 행실들을 밝혀내리니 그것들은 너에게 소용이 없으리라.

 

(이사45,24) 24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시편143,11) 11 주님, 당신 이름을 보시어 저를 살리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제 영혼을 곤경에서 이끌어 내소서.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 성경 말씀 안에 숨겨진, 그리고 그 말씀을 인간들의 법으로 받아 감추어진 하느님의 진리는 드러나고,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인간의 의로움 속에 숨겨진, 감추어진 속셈, 이타의 사랑이 아닌 이기적 자기 사랑도 나타나고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씀이다.

 

(히브4,13)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 피조물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께 벌거숭이, 곧 없음이라는 것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어떻게 들어야 하나 - 인간들의 의로움을 위한 말씀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문자 그대로 도덕과 윤리로? 문자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으로? 구약의 율법(제사와 윤리)으로? 신약의 진리로?

 

(루가8,25)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며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

= 믿음이, 율법에 의한 것이냐? 깨달은 진리의 있는 것이냐? 물으신 것이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에 두려워한 것이다.

 

큰 계명을 묻는 율법교사에게~

(루가10,26)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 율법 그대로 읽었느냐? 율법의 실체인 진리로 읽었느냐? 물으신 것이다.

 

(묵시3,3)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悔改)하여라.

=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신약은 구약의 실체라 했다. 곧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완성하신 그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여 지키라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로 받은 하늘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2베드1,21) 21 예언(말씀)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

=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학식이 뛰어난 도울 김용욱씨가 성경 말씀을 반박하는 이유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 성령을 우리의 보호자로 보내주신 것이다.

 

(1코린2,12-16)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도울 김용욱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어리석음이니 반박할 수밖에~)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흙의 티끌, 고기 덩어리일 뿐이다. 다시, 성령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 곧 성령께 의지하지 않으며 그분의 이끄심, 도우심을 청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로마8,9참조)

 

(시편51,12) 12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다윗의 기도 응답~

(예제36,26)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이루심~

(히브10,16-17) 16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그들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 하느님의 계획,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다 이루시고 새 계약, 새 계명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에 넣어 주시어 우리가 새 마음, 새 영의 사람이 되었다.

 

☨ 보호자 성령님! 오늘 말씀과 가르침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를 가르치시며 탄식(歎息)으로 기도(祈禱)하시어 새 마음(영)을 주시어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루카8,16~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8)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8,4~15)와 등불의 비유의 결론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원리를 빗대어 말씀하시며, 복음을 듣고 실천하는 믿음의 자세를 촉구하신다.

 

또한 이 말씀은 탈란트의 비유의 결론 부분에도(마태25,29), 미나의 비유의 결론에도(루카19,26), 그리고 본절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의 등불의 비유에도 등장한다(마르4,25).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와 '가진 것이 없는 자'를 비교하신다. 여기서 반복하여 나오는 '호스 안'(hos an)은 '~하는 자는 누구든지' (whosoever)라는 의미로서 '가진 자'와 '가진 것이 없는 자'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진 자'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환영하고 잘 활용하여 실천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루카8,15)  계속적으로 삶의 더 많은 기쁨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가진 것이 없는 자'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리고 그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경시하고 하찮게 여기며 실천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함정은 자신들에게 분명히 없는데, '가진 줄'로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마태오 복음 25장 29절과 마르코 복음 4장 25절, 그리고 루카 복음 19장 26절에는 빼앗기게 되는 대상이 모두 '가진 것', 즉 '호 에케이'(ho echei)로 되어 있다.

즉 루카 복음 8장 18절의 '~줄로 여기는'에 해당하는 '도케이'(dokei)가 없다.

 

 '도케이'(dokei)는 '사실은 그렇지 않는데 그러하다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카 복음 8장 18절의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사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므로 빼앗길 것도 없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8장 18절에서 그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사실은 없는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결국 그 마음이 완고해지고 사악해져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길에서 더 멀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는 전에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은총과 말씀을 깨닫는 통찰력, 그리고 풍성한 은사들을 받았지만, 그후 말씀에 부주의하고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중에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자신 안에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줄 알고,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 결국에는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에서조차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본주의의 부조리요 모순인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지고서, 복음에 대한 자세가 결국 내적(內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원인이 될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20240923일 월요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잠언에서는 오늘 독서와 같이 인과응보에 관하여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고 강조하며,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갚음을 힘주어 말합니다.

잠언의 저자라도 현세에서 늘 정확하게 인과응보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결과는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잠언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지닙니다.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은 의문에 부쳐지고 이후에 욥기와 코헬렛 같은 책들에서 다른 측면들이 지적되지만, 그렇다고 잠언이 쓸모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고, 선과 악의 갚음이 현세에서 완성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이 행하는 선과 악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온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삶 안에서, 특히 현세의 삶 안에서 때로 의심스럽게 보이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할까요?

정말로 현세에서 곧바로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에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할 때는 대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합니다.

명백하여 보이지 않는 가르침,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무 단순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잠언의 가르침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어쩌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09월 23일[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복음(루카8,16-1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가10,26)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요한8,43)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성경 말씀을 보이는 그대로 도덕과 윤리로 보았느냐? 말씀 안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달았느냐?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 안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깨달았느냐? 어떻게 듣고 받아 들였느냐? 물으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인 말씀, 계명을 인간들의 뜻을 위한 인간들의 말, 계명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의(義)를 위한 헛된 신앙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라 하심이다.

교회의 등불, 그리스도의 빛, 곧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 생명의 빛을 인간(그릇)들의 의로움으로 덮는 도덕과 윤리의 부족한 의(義)로 덮어, 이미 받아 간직한 하늘의 용서, 안식, 생명을 잃어버리는 그 헛된 신앙을 살고 있고, 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의(義),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 빛을 드러내는 신앙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사라질 세상의 목숨, 평화를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생명,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루카8,15)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보아 도덕과 윤리로 착하게 살아 자기 의로움으로 챙겨 자신의 뜻도 이루고, 자신을 드러내는 신앙을 산다면 그에게 구원은 없다.(루가16,15) 구원은 좋은 씨안 그리스도의 대속, 하늘의 의(義)를 전가받아 좋은 땅이 되어 받는다.

*요즘 순교자성월을 지내고 있다. 순교자들의 마음, 정신을 보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 우리는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피의 순교(殉敎)다.

그런데 하느님은 순교, 전구로 우리를 구원하실까? 우리의 피를 흘리는 순교로 구원하실까? 그렇다면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 전무하다. 하느님은 우리의 순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그 피의 순교로만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의 은총, 그 엄청난 은혜를 입고도 여전히 나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죄성의 나를 깨닫고, 곧 순교에 실패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염치 없이 돌아오는 그 죄인 하나’로 더 기뻐하신다.(루가5,32)

세상 힘의 원리에 의한 모든 시련, 고통이 내뜻, 욕망을 죽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순교다. (1베드4,12-13참조)

하느님 나라는 순교자, 복자, 가경자, 이렇게 분리로 높고 낮음이 있는 곳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平等)하다.

강도로 살다간 우도나(루가2,43)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이태석 신부님이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위 대속, 하늘의 의로움을 전가 시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로 똑 같다는 것이다.

지난 주일 순교자에 대한 성가와 기도를 바치며 순교자들의 후손으로 그분들의 순교가 마치 내 순교인냥 *착각에 빠져 뿌듯함을 느꼈다. 무서운 착각이다.

교회는 의인이 받는 구원이 아니라 죄인이 받는 구원, 그 역설을 말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순교,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을 가르쳐야 한다.

 

(요한19,19-20)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그것은 히브리 말라틴 말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 히브리말, 종교와 율법을, 라틴(로마) 말 힘, 권세, 권력을, 그리스 말 지식, 지혜를, (이 나라들은 전 세계를 상징한다.)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모든 종교, 율법, 힘, 권세, 권력, 지식, 지혜의 실체이신 임금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임금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교하지 못하고 실패한, 그리고 적대한 이 세상 죄인들의 죄를 넘겨받으셔서 세상의 대표, 우두머리로 죄의 심판을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의로움을 전가 시켜 주셨다.

 

(요한16,8-11)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대속의 십자가, 하느님 나라의 의, 권세, 지식, 지혜, 곧 진리다.(1코린1,24 골로2,10) 의인이 받는 구원이 아니라 죄인이 받는 구원, 보호자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야 알아들을 수 있는 역설이다. 구원의 옷은 하느님께서 입혀주신다.(이사6,10)

 

☨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깨닫게 하소서믿음 주소서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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