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13일 금요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네 눈에 들보 (루카6,39-42)
제1독서<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16-19.22ㄴ-27)
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화답송>시편 84(83),3.4.5-6.12(◎2)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
○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
○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
○ 주 하느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6,39-42)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독서(에페 4,1-7.11-13)와 복음(마르 4,1-10.13-20 또는 4,1-9)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1코린9,16~19.22ㄴ~27)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4~25)
코린토 1서 9장 24절에서 27절까지는 운동 경기자의 비유와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통한 성도의 절제에 대한 권면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많은 설교자들이 자주 비유를 드는 운동 경기 비유를 들어 절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교훈한다.
운동 경기는 희랍 세계에 매우 성행하던 것이었으므로 코린토 교인들에게 이 비유는 매우 잘 이해되었을 것이다.
특히 코린토 지역에서는 매 3년마다 이스트미안(Isthmian games)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희랍 4대 경기 중 하나였고, 주로 경마와 격투기 등의 경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기서 '경기장'이라고 번역된 '스타디오'(stadio; a race)는 606.75 피트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이 나중에 큰 규모의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이라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매 세번째 여름에 거행되었던 이스티미안 경기와 같은 경기들은 희랍 전 지역의 사람들을 운집시키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오로 시대에 헬레니즘 세계 전체에 대중화되었다. 따라서 대규모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우수한 경주자들이 참가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경주 만을 위해 먹고 자고 훈련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기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간의 경쟁 의식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그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명성과 가문의 영예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또한 사도 바오로의 시대에 작은 지방의 경기에서는 몇 사람에게 상이 수여되었지만, 이 구절에서 코린토 교인들을 염두에 둔 큰 경기에서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상이 주어졌으며, 따라서 2위나 3위를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상은 최후의 승리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서 이러한 경기의 규칙을 '여러분은 모릅니까?'하고 묻는다.
이것은 당시 코린토 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기 규칙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당시의 운동 경기를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동시에 코린토 교인들의 영적 상황에 연결시켜서 '이와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 비유를 통해 모든 성도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여전히 달려가는 도상적 존재이며,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떤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이미 다 완성된 존재라거나 더 이상의 진보나 발전이 필요 없는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코린토 교인들은 너무나 영적으로 교만해서 더 이상 영적 진보가 필요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더 이상 목표가 필요 없는 존재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들이 과거에 안주하는 삶을 떨쳐 버리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존재이며, 절제함으로써 신앙 생활의 향상을 이루어야 하는 자임을 보여주고자 이러한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여기서 '경기자'에 해당하는 '호 아고니조메노스'(ho agonizomenos; who competes in the games)는 '경기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은 운동 경기에 참가하고 있는 자를 지칭하며, '경쟁하다','격렬히 몸부림치다' 라는 뜻을 지닌 '아고니조마이'(agonizomai)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육상 경기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기에 참가하는 자를 말하며, 26절에 나오는 권투까지 포함한다. 그런데 어떤 경기이든 경기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면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절제를 합니다'로 번역된 '엥크라튜에타이'(engkrateuetai; is temperate; goes into strict training)는 '훈련하다','자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엥크라튜오마이'(engkrateu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불변의 진리나 격언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현재형이 쓰인 것은 훈련이나 절제가 당시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에게는 매우 당연하고도 통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절제란 자기 자신을 정복하다는 뜻인데, 당시 운동 선수가 우승하기 위해 숙련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10개월 이상 훈련했던 사실과 금주, 엄격한 절식, 식이요법, 성(性)생활의 절제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운동선수의 '절제'를 코린토 교인의 '무절제'와 대비시켜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코린토 1서 5장에 제기된 음행의 문제, 6장에 제기된 세상 법정에서의 소송 문제, 7장에 제기된 혼인의 문제, 결정적으로 8장에 제기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섭취에 대한 비난이 바로 그것이다.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운동선수들은 고된 훈련과 절제 속에서만 승리의 화관을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논'(stephanon; a crown)은 '경기에서의 우승을 뜻하는 화관(면류관)' 또는 '화환을 머리에 두르다'는 뜻을 지닌 '스트레포'(strepho)에서 나온 명사로서 라틴어에서는 '코로나' (corona)로 번역되었다.
코린토에서는 각종 경기의 승자에게 솔잎이나 어린 파슬리 잎으로 만든 면류관을 수여했고, 올림피아 경기에서는 야생 감나무 잎으로 만든 화관을 수여했다.
이러한 화관들이 전 희랍 세계에서는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명예를 상징했지만, 솔잎이나 파슬리 혹은 야생 월계수 나무로 만든 화관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급기야는 썩기 마련이며, 경기에서의 우승자의 영광도 역시 잊혀지고 덧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 화관을 '썩어 없어질'에 해당하는 '프타르톤' (phtharton; corruptible) 화관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썩어 없어질 화관을 향한 세상의 운동 선수들의 노력이 대단한데, 하물며 영원히 바래지 않고 '썩지 않는'('아프타르톤'; 'aphtharton; an incorruptible) 종말의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노력과 영성 훈련, 그리고 절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하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가르침인 것이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만들 때, 삼나무나 돌무화과나무로 만든 대들보를 올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얹은 다음 거기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옥상은 작은 방을 만들거나 작물을 널어 말리는 장소였고, 지붕 위에 누가 올라가면 천장의 대들보 사이에서 바싹 마른 나뭇가지 부스러기나 티가 떨어져 집 안에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군중에게 친숙한 소재인 들보와 티를 예로 들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37) 하신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고, 잘못된 스승이 자신을 넘어서는 제자를 키워 낼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정작 자신이 눈먼 이요 부족한 스승임을 외면한 채,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지식과 소유를 내세워 형제와 이웃을 단죄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이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눈이 먼 줄 알면서 눈을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 나태함도, 앞이 보이는 척하며 자신을 과시하는 위선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오래 머무르지 못합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스승임을 자처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고도 스스로 실격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신을 단련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기억합니다(제1독서 참조).
내 눈 속의 들보는 빼내고 가족과 형제의 눈에 든 티를 사랑으로 발견하여 조심히 꺼내 줄 수 있는 혜안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태 20,33).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사람의 지혜로 이룬 겸손이 교만(거짓)임을 보는 이가 하느님을 얻는다.
복음(루카6,39-42)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 성경 말씀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한 그 눈 먼 이를 따라가면 멸망이다.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 받아 자기 말을 하는 이를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곧 뱀의 유혹을 먹고 자신(인간)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 선악을 주관할 수 있다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으로 받아들인 그 눈먼 이, 그는 선이 악을 품고 대신 죽어 생명을 주는 그 하느님의 지혜에 눈먼, 아담의 지혜로 교만한 사람이다.
오늘날도 아담의 눈 먼 교만을 지혜로 가르치는, 그 눈 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눈먼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인간의 뜻, 욕망을 위한 헛된 신앙을 사는, 곧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 법, 계명으로 만들어 참 지혜라고 우기며 고집하는 눈먼 이다.
(1코린1,19-24)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악(죄)을 품고 대속하심으로 생명을 주시는 선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지혜이며 구원의 힘, 진리시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 착하게, 겸손하게 살아 구원에, 하늘에 이르겠다는 그 눈 먼 지혜, 진리로 그릇된 신앙을 살아간다.(요한16,8 참조) 그래서 그 스스로 착함, 겸손함이 하느님의 지혜가 아닌 아담의 지혜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그릇된(거짓 된) 자신을 버리고, 부인(否認)하고 하느님을 얻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를 고집하면 거짓 된 자신을 보지 못해 하느님을 잃어버린다.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 스승처럼은 사람의 지혜를 버리고, 곧 사람의 선악의 지혜로 생각하고, 말하고, 보았던 그 삶을 버리고(부인하고) 스승의 지혜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삶이다.
다시 확인하자~ 사람의 지혜인 사람의 착함, 의로움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더 착하게 살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지혜로 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낮추기에 또 행위 신앙을 살지 않기에 겉으로 알 수 없을 뿐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사람의 지혜, 그 선악의 들보로 생각하고 형제를 보면, 선악의 판단으로 자신은 물론 형제의 잘못, 허물, 티만 보게 된다. 그러면 매일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 들어있는 희망을 놓치게 된다.
곧 하느님의 지혜인 하늘의 대속을 놓치게 되니, 희망이 아닌 절망속에 살게 된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 매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그분의 사랑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의 지혜로 듣기 좋은, 천사 같은 말은 많이 하지만 하늘의 대속, 그 지혜의 말씀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용서, 생명, 구원을 받도록 형제의 티(허물, 죄)를 빼낼 수 없는(없앨 수 없는) 위선자(僞善者)의 말인 것이다.
매일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이 성경 전체, 곧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모두, 하늘의 대속, 그 십자가의 복음, 그 하나, 한 가지 말씀 만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숨은 뜻, 모든 의문은 십자가로, 그 하나로 풀면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약(스타오로스-기둥)이 십자나무이듯~~~
(요한7,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 선과 악, 그 둘의 법,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선이 악을 품어 선과 악이 *하나가 되는 곧 선의 대속으로 악이 하늘의 존재(생명)가 되는, 그 하느님의 지혜를 못 보는, 그 눈 먼 이들이 그 하느님의 지혜를 말하는 이들을 대적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 눈 먼 이들에 의해 죽으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은 다 아셨기에 구원의 계약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 말하고, 가르치는 그 눈 먼 이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힘)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1코린1,24) 24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아멘)
☨보호자 성령님! 하느님의 힘, 지혜로 살도록,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해주시니 감사드리며 의탁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루카6,39~4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1)
이 구절은 '형제의 눈 속'과 '네 눈 속' 그리고 '티'와 '들보' 그리고 '보면서'와 '깨닫지 못하느냐'가 서로 대구를 이루는 매우 기교적 문장이다.
여기서 '티'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hos; mote; the speck of sawdust)는 '시들다'는 뜻이 있는 '카르포'(karpho)에서 유래하여 지푸라기나 왕겨 등을 의미한다.
반면에 '들보'에 해당하는 '도코스'(dokos; the bean; the plank)는 '받치다', '지탱하다'는 의미가 있는 '데코마이'(dechomai)에서 유래하여 건물을 바치는 기둥 혹은 서까래를 의미한다.
타인의 조그마한 결점을 상징하는 '티'와 자신의 큰 허물을 상징하는 '들보'라는 서로 대조되는 단어를 대구시킴으로써 이 구절의 내용이 강조된다.
인간의 눈 속에 지붕을 받치는 재목을 가리키는 들보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심한 과장법이다.
이러한 과장법을 통해 예수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작은 도덕적 잘못이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결함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과장법을 사용하여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들보와 같은 결함은 바로 자신이 가진 죄악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가혹한 마음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구절에 나오는 동사들이 모두 2인칭 단수로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일일이 지적하는 심정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용서는 하느님의 언어.
복음(루카6,37-42)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용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하느님의 언어라 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느님의 새 계약으로 용서 받아 살아가고 존재하며 구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에페2,1-6)
그것이 하느님의 지혜, 진리임을 깨달았다면 그리스도의 피(血)로 거저 용서받은 내가, 나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은 다른 이를 어찌 심판, 단죄 할 수 있겠는가? 남을 심판(단조)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을 진리로 믿지 않는 것이며, 나의 용서 또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새 계약으로 서로 용서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용서다. 용서란 하느님의 용서를 믿는 것이지, 사람의 감정으로 돌아옴을 뜻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용서가 진리임을 믿기에 미움이 남아 있으면서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를 알기에 미움의 감정(感情)을 조금씩 눌러가며, 죽여 가며 사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과 환경, 처지에 따라 많게, 혹은 적게, 죽이며 산다. 그래서 심판, 단죄, 또한 서로 할 수 없는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 되질-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되로 주면 자신의 행실에 따라 심판, 단죄를 받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의 되로 주면 하느님의 용서, 의로움, 거룩의 판결을 받을 것이다.
(골로1,21-22)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39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거저 얻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생명은 모르고, 못보고,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행하여 ‘용서와 의로움, 하늘의 생명, 구원에 까지 이르자’고하는 그 눈 먼 인도자를 따르면 영원한 땅속,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 ‘허무요, 헛된 오물일 뿐’이다. (코헬1,1- 필리3,6-9) 인간들이 합의하여 내어놓는 선, 의까지 모두(로마10,1-),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새 계약인 깨끗하신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는, 성령과 말씀으로 씻기는 그 가르침만 따라야 한다.
(1코린6,11) 11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 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생명수, 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 지금까지 모든 말씀이 믿어진다면, 스승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듯이 제자인 우리 또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곧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씻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새 계약을 이루신, 하느님의 뜻, 말씀을 다 배우고 나면, 믿으면, 우리 또한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지킨 옛 계약의 나를 버리고, 부인(否認)하는 그 죽음으로 영원한 용서, 안식,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를 구원의 진리, 새 계약으로 믿고 의탁하여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위선자-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의(義)가 ‘위선의 들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욕망, 영광을 위한 그 속셈이 들어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의(義)는 하느님처럼의 흉내를 내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義)는 하느님처럼의 흉내를 내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義)가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의롭게 살아야한다.) ‘구원(救援)의 진리(眞理),’ ‘신앙(信仰)의 목적지(目的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보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否認)이 된, 선악의 옛 계약, 그 들보를 빼낸 사람만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자유, 숨, 안식을 체험한, 믿는 사람만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 그 선악의 되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용서할 수 없어, 심판, 단죄까지 하게 된다.
☨하느님의 지혜, 진리, 영원한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 올바른 믿음,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항상 저희들 안에 충만(充滿)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