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11)

2024. 9. 4. 오후 4: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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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일 목요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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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3,18-23)

형제 여러분,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화답송>시편24,1-2.3-4ㄱㄴ.5-6(1)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복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1코린 3,18-23)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8)

 

코린토 1서 3장 18절에서 23절까지 바오로는 주제를 급격히 바꾸어, 이미 코린토1서 1장 18절에서 2장 16절에 논의한 바 있는, '하느님의 지혜' 와 '세상의 지혜' 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코린토 교인들의 분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원천에 대해 밝히는 본 단락을 바오로는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논증을 할때 흔히 사용하던 냉소주의적 스토아 학파의 '통렬한 비난'(diatribe)이란 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속여서는' 으로 번역된 '엑사파타토'(eksapatato)는 '속이다(decieve), '판단을 흐리게 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엑사파타오'(ekasapatao)의 현재 명령법이다.

 

이것이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메데에스'(medeis)와 더불어 사용되어, 코린토 교인들 일부가 현재 스스로에게 속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바오로는 이같은 코린토 교인들의 형태를 엄중히 경고한다.

 

사실 인간은 약하고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스스로에게 속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을 속이는 대표적인 일이 스스로 지혜있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사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모든 지혜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바오로가 이들에 대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적 지혜를 사랑하는 코린토 교인들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은 세상적 지혜를 기준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평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분열했다는 면에서, 스스로 지혜있다고 착각한 자들이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코린토 교회의 위험은 세상적 지혜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며 그러한 자신을 스스로 현명하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설득력에 의존하는 논증 방식으로 또는 인간과 자아에 근거를 둔 생활 방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적 지혜에서 벗어나 더 높은 하느님의 지혜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참된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죄스러운 이 세상에 근거를 둔 인본주의적 지혜를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로마10,3; 필리3,6~9참조).

 

코린토 교인들의 문제는 성도가 되는 일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자가 후자로 개선되거나 발전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바오로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여기에  코린토 교회의 분쟁의 원인이 숨어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은 것이고 세상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코린토 교인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이 '역설적 대립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어쩌면 그들은 교회와 세상을 둘 다 높이 평가하는 지혜에 자신들이 도달했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교회내의 상황을 직시한 바오로는 세상의 지혜는 영적 어리석음이며, 세상에 대한 어리석음은 영적 지혜라는 지적을 통하여 이 세상의 지혜를 내세워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어야 함을 교훈한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첫 제자들을 부르신 그날, 당신께 몰려든 군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시선은 호숫가에 배를 대어 놓고 그물을 씻는 어부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밤새워 일하고도 허탕 치기 일쑤인 팍팍한 삶 속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귀를 기울일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 어부들을, 예수님께서는 유심히 바라보시고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그분 곁에서 말씀을 듣게 되었을 터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는, 얼마 전 열을 꾸짖어 자신의 장모를 곧바로 치유하시고(루카 4,38-39 참조), 밤새 허탕 친 그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낚게 하신 대자연의 주인 앞에 엎드려 이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던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모습을 많이도 닮았습니다(탈출 4,10.13; 이사 6,5; 예레 1,6 참조).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이들을 당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섬으로써 ‘지혜롭게 되고자 어리석음을 택한 이’가 되어 오롯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우리의 시선을 온통 앗아 가는 요즘의 일상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풀에 지친 나의 하루라는 배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그분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저어 들어가 구원을 낚는 복된 삶을 새롭게 시작합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늘 루가복음은 요한복음 (21장)을 완성으로 짝하여 보세요.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 곧 죄인들의 구원, 그 약속의 말씀을 전하실 때,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 배 두척, 선악의 그 두 법의 신앙을 통하여 하늘의 것도 세상의 것도 얻으려는 두마음, 그 양다리 신앙을 뜻한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 어제도 묵상 했듯 시몬은 물(생명수, 말씀)이 없는, 곧 사람의 규정(법)으로 신앙을 사는 그 병자, 죄인인 그의 배에 예수님께서 오르신 것이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 요한복음은 그물을 배(교회) 오른쪽에 던져라 하십니다. 곧 사람의 오른 쪽(지혜)이 아닌 하느님의 오른 쪽(지혜)를 뜻하는데 오늘 그 하느님의 지혜, 그 말씀으로 내면 깊은 곳, 우리의 마음의 상처, 죄의식을 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 아픔을 치유(용서)받기 위한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베타랑 어부가 밤새 한 마리를 잡지 못할 수가 있나? 그렇듯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인 것이고 그 사건들로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하늘의 일은 밤(어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낮(빛)으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인간의 방법(지혜)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지혜)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독서

(1코린 3,18-19)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으로 물고기(세상의 재물)를 잡으려는 두 마음인 것이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란 위험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상황이 없다. 또한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베드로와 같이 두 마음의 신앙은 무거운 짐이 되어 찢어지고 가라앉는 헛된 신앙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고기 숫자도 153마리로 정확하게 알려주신다. 100(충만)+50(오경)+3 씨(하늘)의 대속~ 곧 법(5), 심판의 신앙으로 죽어야할 죄인들이 씨(제라, 후손-예수)의 사흗날(3)의 죽음으로 하늘의 완성(100)인 하늘의 생명을 얻는 그 구원을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이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발 앞이 아닌 무릎 앞에 엎드렸다. 무릎(베라크)은 福(바라크)에서 파생된 말이다. 곧 시몬은 능력의 예수님, 그 복 앞에 엎드린 것이다. 하늘의 복이 아닌 땅의 복 앞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그 예수님을 반격했던 것이다.(마태16,22)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 이제 세상 물고기(재물)가 아닌 사람을 낚을 , 구원할 어부가 되라 하신다. 그 선택 받은 우리는  시간을 잘 써야 한다.

잘 쓰십시오(엑사구라죠- 건져올리다)- 허락된 시간을 잘 쓰는 것, 내가 먼저 죽음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건져 올려지고 이웃을 건져 올리는 그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베드로는 자신의 뜻을 위해 따랐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배를 버리지 않았다.

배는 교회를 뜻합니다. 앞에서도 묵상 했듯(마태16,22) 베드로는 자신의 뜻을 위한 신앙(배)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다시 그 배를 찾아갔던 것이다.(요한2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 시몬(베드로)을 찾아 가셔서 사람을 낚을 어부로 완성해 내시지요. 그 완성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요한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의 이끄심으로 비로소 자기 배(신앙)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 착각 속에 살아간다. 오늘 루가복음의 시몬 베드로를 묵상하면서 ‘버리고 치유(용서) 받아야할’ 그 내 모습을 보라는 말씀이지, 그를 닮으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천주의 성령이시여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하소서. 아멘~!!!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루카5,1~11)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스승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epistata; master)는 신약 성경에서 루카  복음사가 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이다(루카8,24.45; 9,33.49; 17,13).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적으로 '선생'(teacher)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나 율법 교사에 대한 존칭어인 '랍비'(rabbi)라는 단어보다는 '에피스타타'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에피스타타'는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7장 13절의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제자들의 입으로 고백된 경우처럼, 이 용어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느껴서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불렀다.

그러나 이 호칭은 기적의 체험 후에는 신앙 고백적 호칭인 '퀴리에'(kyrie) 즉 '주님'(Lord)으로 바뀐다(루카5,8).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데'(de)는 여기서 'but' 혹은 'nevertheless'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전문 어부로서 고기잡이와 관련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또 날이 밝은 아침(오전)에 고기가 없는 깊은 데로 저어 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베드로에게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는 '제가 ~내리겠습니다'로 번역된 '칼라소'(chalaso; I will let down)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자신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데, 마지 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에피 ~ 토 레마티 수'(epi ~ to remati su; at your word; because you say so)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승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5장 4절의 명령 뿐만 아니라 5장 3절에 기록된 '가르침의 말씀'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진실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떄,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in spite of)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믿음은, 평소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의 성품과 덕성을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20240905일 목요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선택하셨음이 오늘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띕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계시고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면, 이 어부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을 터인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의 배에 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는 시몬이었고, 다른 배의 동료들은 아마도 고기를 잡지 않고 있었기에 그물을 올릴 때 시몬을 도와주고 시몬이 잡은 고기를 두 배에 나누어 싣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몬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나서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이는 시몬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놀라고 두려워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 않고 베드로를 당신 곁에 있도록 부르십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5,10). 어쩌면 이 말씀이 열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는 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독서(1코린3,18-23)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ㄱ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 태양아래 모든 것은 구원에 가치 없는 헛되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 그 누구도 본 받자고 말하면 안 된다. 가르치면 안 된다.

 

21ㄴ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세상도 생명도 죽음도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이 된다. 지혜, 진리가 된다.

 

(1코린1,22-23)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세상)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 창조의 그리스도께서(히브1,2) 피조물들의 죄로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그들 대신 죽으시고 그들을 살려 내신다. 하느님처럼(창세3,5)의 자리에 앉은 사람(아담)들에게는 믿어지지도 않고,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죄를 지은 그 원수를 위해 대신 죽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훌륭해 보이더라도, 하느님처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본받자는 생각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다. 또한 자기 의로움을 위해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본받자' 하는데 안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밑이 아닌, 무릎 앞에 엎드렸기 때문이다. (무릎-‘베리코’로 복‘바라크’에서 나온 말이다.) 곧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그 예수님의 힘 앞에 자신을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실 때 주님을 반박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흉내를 낼 뿐인 그 인간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뱀의 간교한 지혜로 교만의 죄다.

 

(1코린1,24-25)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우리)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 19절에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를 다시 생각해 보자.

다른 이들을 위해 버리고 죽는 십자가의 지혜가 아닌뱀의 간교한 지혜로 자신의 뜻욕망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은말씀은그 간교한 꾀곧 하느님의 지혜 대신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뜻욕망을 위해 사는 그 교만의 속셈그 죄()를 보게 하신다.(히브4,12) 내가 척 하며~’ 감추어 두었던 죄를 나에게 들키게 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대신한 그 꾀의 공든탑(창세11,3-4) 부수신다그렇게 나를 부수시어 잡으시고구원의 길로 이끄신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자신을 고집하며 자신의 욕망의 길을 간다혹은 죄인으로 인정을 하기는 하지만 육신의 뜻욕망을 버리지 못해 따라 살아간다.

*나 역시 내 뜻욕망대로 살고 있음을 자주 들킨다말씀을 좀 알고그리스도께서 내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더럽고 추악한 죄에서 구원 받았음을 믿으면서도 말이다그 욕망의 나를 보면서 징글징글 하게 싫다괴롭다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려 기도하고붙들고더 말씀 안에 머물렀다그리고 나의 추한 죄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심을 깨달았다그래서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신(로마5,10) 영원하신 그 이타의 사랑에 나를 내어 맏기며 산다곧 나를 신뢰하지 않는 나의 버림부인으로~

 

(루가18,13)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로마7,18-25) 18 사실  안에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일을 하는 것은  이상 내가 아니라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다른 법이 나를  지체 안에 있는 죄의 (선악)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누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있습니까? 25 (그러나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이렇게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육신의 본질은 죄라는 것이다. 육신을 벗는 날,  완전하게 깨끗해 질 수 있음이다. 지금은,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그 하느님의 법,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깨끗해 졌음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살기에 육신을 입고 사는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미련이 없다. 그래서 내 갈 곳, 하느님과 함께 살 곳, 그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더 알고, 믿고’싶어, 하느님을 더 알고 싶어서 매일 말씀 안에 머문다. 

‘무섭고, 엄하시고, 어려운 분’과 함께 사는 곳이 어떻게 천국이겠는가. 나를 끔찍히 사랑해 주시고, 내가 사랑하는 분, 그 님과 함께 사는 곳이 천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聖經)은 착하게, 의롭게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알라고 주신 것이다.(히브4.12 야고2,10)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그‘피의 계약의 하느님’과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입고, 믿고, 곧 내 머리(생각, 지혜)를 죽이고 구원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내 머리로, 그분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그것이 진리임을 알라고 주신 것, 성경이다.

 

(2티모3,15) 15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있습니다. (~아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우리의 깨어있음이 되어주시는 성령님지극히 높으신 분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위해 낮아짐자기 버림부인의 삶으로 하늘의 안식생명이 현실이 되도록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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