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21일 수요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마태20,1-16)
제1독서<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에제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화답송>시편23,1-3ㄱ.3ㄴㄷ-4.5.6(◎1)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5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또는,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독서(1테살 2,2ㄴ-8)와 복음(요한 21,15-17)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에제34,1-11)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3)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4)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3)
앞선 에제키엘서 34장 2절에서는 이스라엘 목자들로 비유된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먹여야 할 양인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일면 소극적인 측면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어지는 본절(3절)에서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인 백성들을 먹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아먹기까지 한 악행이 고발된다.
본문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인 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지적한다.
양을 치는 목자가 양에게서 고기나 기름을 취하여 양식으로 삼고, 양털을 취하여 옷감을 삼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양으로부터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양을 성실하게 돌보는 목자에게만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들을 성실하게 먹이고 돌보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자기들의 유익만을 취한 것이다.
이미 2절에 양떼를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3절 후반부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들을 제대로 돌보아야 하는 목자의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기름과 털을 취하는 목자의 권리만 행사하는 것이 문제이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불의인 것이다.
이런 악한 목자에 대한 비유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연약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을 행한 죄를 지적한 것이다(아모5,10~12; 6,4~6참조).
한편, 악한 목자들이 양으로부터 취한 '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leb)를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과 라틴어 번역본(Vulgata)은 '젖'이라는 뜻의 '할라브'(hallab)로 읽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가톨릭의 새 성경은 '젖을 짜먹고'라고 번역하였다. 목자들이 양떼로부터 취하는 것이 주로 양털과 젖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은 '기름'이나 '우유'(milk)로 번역한 것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원문에서 '기름'을 취했다는 내용이 살진 양을 잡았다는 내용보다 더 앞에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 가톨릭 새 성경처럼, 이것을 '젖'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양을 잡아야 기름이나 고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먼저 취한 뒤에 양을 잡았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으로 번역된 '헬레브'를 '젖'이라는 뜻의 '할라브'로 읽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본문에서 잡은 양이 살진 양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살진 양에게서는 털과 젖을 취할 뿐만 아니라 기름이나 고기까지 취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본문을 가톨릭이 '젖'으로 번역하든, 개신교가 '기름'으로 번역하든, 이스라엘 임금들 또는 고관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그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금으로 호의호식을 하였고, 많은 재산과 부를 가진 자들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악행을 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4)
이스라엘 거짓 목자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에제키엘서 34장 3~4절의 내용 중에서 34장 3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한 죄에 대한 지적이었다면, 34장 4절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에 대한 지적이 주로 제시된다.
본절에 의하면, 목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여러 양들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양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고대 근동의 양치기들은 막대기와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가지거나 양치기 개를 데리고 도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창세31,39; 1사무17,34.35; 예레33,13).
율법에서도 목동이 돌보는 중에 양을 다치게 하거나 잃거나 한다면, 그것을 주인에게 그대로 배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탈출22,12.13).
위의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용례를 보면, 양을 직접 치는 사람은 그 양의 주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양치기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양이나 주인의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 목자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양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재산을 보전하는 일에 태만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고 피해를 입힌 악행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에제키엘서 34장 6절과 8절에서 하느님께서 이 양들을 내 양 떼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남부 유다 백성들은 남부 유다 임금이나 지도자들의 백성이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부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인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멸망하게 한 악행을 행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악행이 양들의 본래 소유자되신 하느님의 진노를 자극하여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가장 먼저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로 제시된다. 그 다음으로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란 지적이 나온다.
여기서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와 '아픈 양'에 해당하는 '하홀라'(haholla)는 수동형과 능동형이란 점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원형 '할라'(halla)의 분사형이다.
'할라'(halla)에는 '약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병이 들다'(아프다) 라는 의미도 있다.
수동형으로 사용된 '한나홀로트'(약한 자)는 선천적으로 병이 들어서 쇠약하게 된 양을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능동형으로 사용된 '하홀라'(아픈 자)는 현재 병이 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치료는 지금 걸려 있는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치료해 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시되는 '부러진 양'에 해당하는 '니쉬뻬레트' (nishibereth)의 원형 '샤바르'(shabar)는 '부서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가 부러져 탈골되거나 없어진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싸매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음에 '흩어진 양'에 해당하는 '한닛다하트'(hannidahath)의 원형 '나다흐'(nadah)에는 '흩어지다'라는 이미가 있다.
양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양은 목자의 보호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곧바로 맹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 양을 다시 양 무리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무관심하였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양'에 해당하는 '하오베데트'(haobedeth)의 원형 '아바르'(abar)에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들은 양 무리에서 떠나 있을 뿐 아니라, 거의 죽음 직전에 가 있는 상태의 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의 상태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병이 들거나 쇠약해진 양들이다.
둘째는, 큰 상처가 나(크게 다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양들이다.
세째는, 양 무리를 떠나 있는 상태로 5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위험에 노출되어 생명이 위협받는 지경에 직면해 있는 양들이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양들이 처한 위험의 정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묘사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양들을 제시하며, 이들을 돌보기는 커녕 포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의 행위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제키엘서를 대하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본절에서 양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점점 심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도를 더해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극한 어려움에 처한 양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악을 행하는 목자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마땅히 심판이 내려져야 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2022년 08월 17일 수요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 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福)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손해(損害)보는 합당한 계산(計算)
복음(마태20,1-16)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 하느님 나라 백성은 하느님께서 직접 찾아 나서신다. 인간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로와 안심을 주시는 말씀이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삯이 한 데나리온, 곧 하나라는 것인데, 십계명을 열 개로 지킨 인간 스스로의 수고와 의로움이 아니라 그 계명을 어긴 모든 죄를 대속한 의로움, 곧 하느님 사랑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한 분이면 된다는 것이다. 외아들(모노게네스 - 하나로 갖은 자) 구원의 삯은 한 데나리온 예수다. 십계명의 모든 계명은 하늘의 대속, 그 사랑을 담고 있는 하나의 계명이라 했다. 오늘 그 하나를 위한 비유 말씀이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 얼마나 볼품, 힘, 능력이 없어 보였으면 저녁때까지 뽑히지 않았을까? 그런 못난이를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 자비의 눈으로 뽑으신 것이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투덜대는 일꾼을 친구로 부르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에게는 합당한 한 데나리온 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진리로 믿기로 하느님과 합의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 이다.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인간의 계산법으로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세상 힘의 원리, 말을 간직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절대 살 수가 없다. 천국이 지옥이 된다. 세상의 진리(1+1=2)로는 절대 하늘의 진리(1+1=1, 한 데나리온)를 알 수가 없다.
세상,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다. 하느님의 계산법은 손해 보며 퍼주시는 무한한 용서다. 하느님의 힘은 사랑이다. 외아들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사랑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 지혜는 십자가다.
아침 일찍 부터 일(신앙)한 사람이나 저녁 늦게 잠시 일(신앙)한 사람이나 똑같이 십자가의 대속, 그 사랑, 그 하나(한 데나리온= 예수)로 구원하신다. 그러니 세상의 원리로 하느님을 보면 하느님이 손해 보심, 후하심이 부당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첫째로 일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일하심이 못 마땅하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꼴찌가 염치 없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곧 염치 없이 많은 빚(죄)을 용서 받으면 그저 하느님이 감사할 뿐이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루가7,41-43)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죄 뿐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自己否認)이 된 자가 그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하느님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것이다.
(예레17.9)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가르치시고 달래시어 야단쳐서 될 일이었다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가망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곧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옛 계약, 계명을 대속 하시고 흘리신 그 구원의 새 계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다는 것이다.
(로마8,3)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히브10,9-10.14)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단 한 번의 죽음, 전지전능하신 피다.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 이라도 온 세상을 모두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성토마스)
*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로마8,10)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8,16)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계명)을 지키지 못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죄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손해 보시는 하느님의 계산(새 계약)으로 당신 아드님 예수를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십자가의 죽음, 그 구원의 삯인 한 데나리온으로 하늘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합의한 손해 보는 계산, 그 새 계약을 정당한 법으로 이웃과 함께 살 수(선택) 있는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5)
한글 새 성경은 '나에게 합당하지'에 해당하는 '엑세스틴 모이'(eksestin moi; It is lawful
for me)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포도밭 임자의 행동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하지 않느냐?"(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라는 뜻이 된다.
원문대로 하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였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신다 하여도 그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절대 공의로우며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는 선(善)한 것이기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에 해당하는 '호티 에고 아가토스 에이미'(hoti ego agathos eimi; because I am generous; because I am good)에서 '에고'(ego; I)란 일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이미'(eimi; am)란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에고'(ego)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후하고 관대하며 선한 자가 바로 포도밭 임자(주인)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가토스'(agathos)는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다'는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놀고 있는 자를 고용하여 넉넉한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 자신의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후하다고'를 의미하는 '아가토스'(agathos)와 대응되는 단어로서 '시기하는'으로 번역된 '포네로스'(poneros; envious; evil)는 '비열한', '무가치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의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 것을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비록 늦게 포도밭에 왔지만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한데, 이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과 비교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크나큰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본성적 요소가 만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준은 항상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어 입어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감히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08월 21일 수요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9,30)라는 말씀과 연결되지요.
19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이 무엇을 받을 것인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들에게 백 배의 상급을 약속하시면서도, 그가 많은 것을 버렸으니 많이 받으리라는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다시 풀어 설명하십니다.
계산적인 사람에게 이 복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여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 후한 포도밭 주인이 품삯으로 주는 한 데나리온은 무한대와 같이 큰 것이어서, 한 데나리온만 받았다 하여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품삯이 하늘 나라의 갚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꼴찌”가 되어 가장 적게 받았다 하여도 그것은 이미 차고 넘치는 양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시기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첫 새벽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이 천국에서 큰 영광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에 견주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해서 사도들이 불만스러워할까요?
하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가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기뻐하는 곳, 그곳이 참으로 하늘 나라일 것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20,1-16)
1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천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 하느님 나라는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일꾼, 곧 당신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 하늘나라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즉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받는, 그 하나를 깨달으라는 오늘의 말씀이신 것이고 그 하나를 받는, 깨달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 정당한 삯, 참 진리는 하나인 것이다.
5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그 부족한 사람을 뽑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마태11,25)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 하느님은 한 데나라온 곧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주시는 분, 포도밭 일꾼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 일을 하는 것으로, 하느님은 노동을 시키시려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한 데나리온, 그 하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포도나무의 가지로 포도 열매를 맺도록,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로 하늘의 생명, 그 열매 하나를 맺으라는 것. 외아들- 독생자(모노게네스- 하나를 갖은 이)
(요한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일꾼이 자신(세상)의 뜻을 버리고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지는 그 일을 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분이다.
일꾼(자신)들의 육의 행실, 그 가치는 구원의 열매가 아니라는 것. 사람의 의로움은 개짐(쓰레기. 오물, 똥)일 뿐이기 때문이다(이사64,5참조)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 하느님의 뜻, 계명을 모르니 자신의 뜻인 세상의 방법으로 따진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인간의 계명 지혜로 보기에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많은 이들이 못 받는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일꾼들이 그 세상의 가치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목자들은 구해낼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에제34,4-6)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 온갖 질병 곧 죄의식으로 시달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덮으심에 계명, 그 말씀으로 용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과 교리, 세상의 법으로 가르쳐 병들게 했다고 하시는 것, 그래서 진정한 참 목자가 없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 넘겨져 세상 사람과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목자는 신자들을 그 세상의 죄와의 법을 진리로 가르쳐 구원과 관련 없는 삶으로 세상과 하나로 그릇된, 헛된 신앙을 살게 했다는 것이다.(요한 16,8참조)
구원은, 하늘의 생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을 진리로 믿어 얻는 것이지 인간의 행실, 의로움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하느님은 하늘의 생명 그 하나 만을 약속 하셨지, 땅의 생명(재물, 일)은 약속하지 않으셨다.(마태6,7~ 루가12,14참조)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후하심, 곧 십자가의 대속으로 거저 얻은 용서, 의로움, 그 은총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후하신 용서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그 예수님의 의로움이 아닌 사람(세상)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이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보이는 많은 일을 한 그 사람이 첫째 같지만~그 일은 구원에는 꼴찌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는 것이다.
참조~(이사45,24-25) 24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25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그러니~(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1베드2,24-25)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하늘, 예수)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