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07일 수요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마태15,21-28)
제1독서<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31,1-7)
1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3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6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화답송>예레 31,10.11-12ㄱㄴ.13(◎ 10ㄹ) ◎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
복음<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15,21-28)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31,1-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주님께서 먼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2-3)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본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이 경험한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장 현저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본절의 시제가 과거를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광야'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광야' 에 해당하는 '미드빠르'(midbar)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도달한 시나이 광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입었다' 에 해당하는 '마차'(matsa)는 완료 시제로서 문자적으로 '발견했다'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에 해당하는 '헨'(hen)은 어원상 지체가 높은 존재가 지체가 낮은 존재에게 다가가, 비록 그가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굽혀 조건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히브리 민족은 주님의 그러한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어(탈출6,4-8) 그들에게 풍족한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셨다.
본절이 이처럼 과거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것은 장차 선민이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으로 회복되는 것을,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본절의 예언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사건, 즉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의 해방을 직접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장 자연스럽게 뒷받침하는 것은 '칼' 이라는 표현이다.
'칼'에 해당하는 '하레브'(hareb)는 잔인한 살육을 비유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나 에제키엘 같은 바빌론 유배 직전과 직후의 예언자들은 이 단어를 자주 바빌론의 잔인한 살육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예레21,7 ; 24,10 ; 에제5,12 ; 6,3).
바빌론 유배를 통해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사실상 그 살육에서 생존한 자들이다.
그런데 이 경우 '은혜를 입었다' 는 표현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마차'(matsa)라는 완료 시제는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s)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언적 완료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예언함에 있어서, 완료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본문은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 그 사건을 미리 계획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 사건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출애굽과 바빌론 포로 귀환 사건이 그 성격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본절의 예언을 두 가지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관점으로 보든지 상관없이, 본문이 전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그들이 주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못하였지만, 주님의 과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온전한 안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본문은 부정사 구분으로서, 시제가 상반절의 지배를 받는다.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가실 때에, 그들이 칼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여 '안식을 얻게 하리' 에 해당하는 '레하르끼오'(leharggio)의 원형 '라가으'(lagah)는 요동하는 것을 진정시키고 달래는 측면의 평안함을 의미한다(예레47,6 ; 50,34).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본문의 표현은, 원문상 '라가으' 와 다른 단어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신다는 여호수아서 1장 13절, 23장 1절 등의 표현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점에서 본문은, 포로 귀환민들이 살던 곳에서 나와, 다시 자신들의 본래 기업 곧 가나안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님께서 먼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먼곳에서'에 해당하는 '메라호크'(merahoq)는 구약 성경에서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의미로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다.
공간적 의미의 입장을 취하면, '먼곳에서(부터)'(신명28,49)라는 의미가 되며, 시간적 의미의 입장을 취하면, 이것은 '옛날부터'(옛적에)(이사22,11; 37,26)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2절과 본절의 예언을 과거 출애굽 사건과 연결하면, 여기에서 '메라호크'는 시간적 의미를 지닌 것이 되며, 바빌론 유배 귀환의 문맥과 연결하면, 공간적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3절에서 동사가 모두 세개 사용되었고, 이들 표현들은 모두 완료 시제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과거 시제로 보면, '메라호크'는 시간적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지만, '예언적 완료'로 보면, '메라호크'는 공간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본문은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진정한 이유가 그들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자애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의 '영원한 사랑'에 해당하는 '아하바트 올람'(ahabath olam)은 선민에 대한 주님의 계약적 사랑을 함축하는 표현이다(신명4,37 ;10,15).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은 선민의 조건과 형편과 관계없이 그들에 대한 주님의 일방적 은혜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이스라엘이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울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적으로 무능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궁지에서 건져 내셨다.
그러한 은혜가 여기에서 또 다시 '자애' 라는 표현으로 반복된다.
'자애'에 해당하는 '하쎄드'(hased)는 계약 백성을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신실한 사랑을 강조하는 단어이다(예레9,24 ; 호세2,23).
이러한 주님의 계약적 사랑을 배제한다면, 이스라엘은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절망에 사로잡혀 필경 망하고 말 것이다.
한편, '베풀었다' 에 해당하는 '메샤크티크'(meshakthik)의 원형 '마샤크'(mashak)는 무능력으로 주저 앉아 있는 자를 생명으로 이끌어 낸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주님께서 이집트의 고난으로부터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것 또는 바빌론의 압제로부터 이끌어 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어두운 데에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1베드2,9.10)의 이미지와 잘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때때로 성경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당혹감을 줄이고 읽는 이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나마 약하게 하고자 “강아지”로 표현하였지만,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이 ‘자녀’ 또는 ‘양’이라면, 가나안 여인, 곧 이방인을 가리킨 “강아지”는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개’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로 지칭되었고(이사 40,11 참조),
이방인들은 대단한 혐오의 대상으로 흔히 ‘개’로 불렸습니다.
개는 아무리 해도 개이고 양은 어떻게 해도 양입니다. 개가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그분의 개입 없이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인인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개’입니다.
그런데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개가 양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당혹스러운 정황 설정과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처지를 가나안 여인과 “호되게 마귀가 들린” 그의 딸로 지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시간으로도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도 베푸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전까지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들을 수 없었던 놀라운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곧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방인에 대한 멸시와 그들의 불결함과 무자격성에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강조하려고 오늘 복음은 극적인 대비와 반전의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엄연히 차별이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 거룩한 이들과 죄인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늘 대단히 끈질깁니다.
스스로 열심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일수록 자신은 선별되고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간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차별을 멀리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별과 민족, 나라, 종파, 소속, 학연, 지연, 빈부, 장애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인이 볼 때 어긋난 신앙을 지닌 사람을 상징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 참된 신앙인의 모범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애타게 구원을 청하여, 그것을 아무런 자격 없이 거저 받았음을 잊지 맙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15,21-28)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23~24)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26~28)
마귀가 들린 딸을 둔 부인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제는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호소한다.
여기서 '돌려 보내십시오'에 해당하는 '아폴뤼손'(apolyson; send ~away)은 고쳐주지 않고 쫓아내라는 뜻이 아니라 빨리 고쳐서 보내 버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제야' 혹은 '그러나'라는 접속사 '데'(de)로 시작되는 24절에서 제자들이 고쳐달라는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부하시는 예수님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소리지르다'에 해당하는 '크라제이'(krazei; she keeps crying out)는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서 그 여자가 계속해서 소리질렀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러한 요청을 한 것은 가나안 여자가 불쌍해서가 아니고,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듣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며, 당시 유다 율법주의자들의 반발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서 잠시라도 휴식을 하고 싶은데 방해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24절에서 '집'으로 번역된 '오이쿠'(oiku; of the house)의 원형 '오이코스'(oikos)는 일차적으로 '건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배타적 의미를 지니는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다인을 '집밖에 있는 자'와 '집안에 있는 자'라는 상징적 의미로 구별하기 위해 '오이코스'(oikos)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잃은'으로 번역된 '아폴롤로타'(apololota; lost)는 '~로 부터'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와 '파괴하다'는 뜻을 지닌 '올뤼미'(olly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파괴하다', '죽이다', '멸망하다'는 뜻이 있는 '아폴뤼미'(apollymi)의
완료 분사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이미 완료된 동작의 결과가 현재에도 남아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로부터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잃은 양이었고, 지금도 영적으로 죽어서 잃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잃은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그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우선적으로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때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요청에 대한 거부의 뜻이 있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한 것이다.
한편, 26절에서는 유다인과 이방인이 각각 '자녀들'과 '강아지들'에 비유되고 있다.
'자녀들'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children's)은 '해산하다'(루카2,6)라는 뜻이 있는 '틱토'(tikto)에서 유래하여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혈육'을 가리키는 매우 친밀감이
느껴지는 용어이다.
반면에 '강아지들'에 해당하는 '퀴나리오이스'(kynariois; to dogs)의 원형 '퀴나리온'(kynarion)은 일반적인 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퀴온'(kyon)의 작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개 가운데 작은 개나 강아지를 뜻하며, 여기서는 집에서 기르는 개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런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거주할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집안에서 기르는 개라고 할지라도, 자녀들과 동일하게 대우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굳이 '자녀'와 '강아지'를 대비시킨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음에 대한 우선권이 유다인에게 있다는 뜻이지, 이방인이 복음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27절에 가나안 여자는 '그렇습니다'로 번역된 긍정과 동의를 나타내는 '나이'(nai; yes; truth)라는 말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은 이어지는 또 다른 자신의 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가나안 여자는 겸손하게 집안에서 기르는 개가 누리는 혜택을 자신도 누릴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여기서 '그러나'로 번역된 '카이 가르'(kai gar; but even)는 앞선 문맥을 보충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관용적인 표현인데, 뒤이어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로서, 이방인들 역시 유다인에 이어 하느님의 은총에 동참할 수 있다는 소신을 밝힌다.
당시 유다인이 이방인에 대해 심한 배타적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사도10,28), 하느님의 은총의 보편성에 대한 가나안 여자의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영적 지각을 지니고 있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오 퀴나이, 메갈레 수 헤 피스티스'(O gynai, megale su he pistis; O woman, you have great faith!)가 바로 원문의 내용이다.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에 대해 너무나 감격한 예수님의 감정이 '오'(O)라는 감탄사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크구나'로 번역된 '메갈레'(megale)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영어에서 '큰' 혹은 '백만 배'를 나타내는 접두사 '메가'(mega)의 어원으로서 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높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자의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끝으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네가 바라는 만큼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고, 이것은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에 비례하는 큰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뜻이 된다.
특히 여기서 '될 것이다'에 해당하는 '게네테토'(genetheto; be it; is granted)는 부정(不定) 과거 명령법으로서 단번에 이루어지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에 따라 가나안 여자의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단번에 고침을 받는다.
2024년 08월 07일 수요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모호합니다.
가나안 부인이 뒤에서 부르짖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지도,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가나안 부인을 강아지라고 부르시는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 전체 안에서 이 단락을 비추어 보면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장의 족보에서부터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또 마태오 복음서에서, 아기 예수님을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예루살렘이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죽이려고 할 때, 먼 동방에서 온 이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그분께 경배합니다(2장 참조).
그리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기에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만으로 충분히 낫게 하여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결국 그 여인은 자신이 청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강아지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병행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이 이방인들은 구원의 한몫을 누리게 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08월 0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만이 할 수 있음’
복음(마태15,21-28)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 마귀(魔鬼)가 들렸다는 것은 정신분열, 질환(疾患)을 뜻하지 않는다. 마귀 들림은 뱀의 선악(善惡)의 유혹을 먹고(창세3,5) 그 선악의 논리로 세운 율법(律法)과 세상 인간들의 계명, 말로 세상의 것, 사람의 일만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한다.
(마르8,33) 33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로마3,19)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납니다.
= 그 인간들의 선악의 논리에 하늘의 선(善)이 악(惡)을 품고 죽어 생명을 주는 그 진리(眞理)의 말씀이 대답하실 수 없음이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 길 잃은 양들- 유대인들이 아닌 하느님께서 친히 세상에서 뽑아 선택한 이들이다.
(요한17,6)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주님만이 아신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 자기(自己)버림, 부인(否認)의 자세다. 곧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는 그 진리(眞理)를 청(請)함이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만이 할 수 있음’이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주님은 이 고백(告白)을 기다리신 것이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음이다.
(코헬3,18-19) 18 나는 인간의 아들들에 관하여 속으로 생각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어 그들 자신이 다만 *짐승일 뿐임을 깨닫게 하신다고. 19 사실 인간의 아들들의 운명이나 짐승의 운명이나 매한가지다. 짐승이 죽는 것처럼 인간도 죽으며 모두 같은 목숨을 지녔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이기 때문이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자신이 짐승일 뿐임을, 그래서 주인(주님)의 상(床 식탁, 제단)에서 떨어지는 빵(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존재 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 참으로 큰 것’이며 구마(驅魔)의 힘, 곧 마귀(魔鬼)의 거짓 말(靈)이 쫓겨남이다.
오늘 본문이 어떤 말씀에서 연결(連結)됐는지 봐야한다.~
(마태15,3.6.8-9)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또 어째서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6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9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그래서~
(요한8,43-44)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으로가 아닌 사람의 뜻을 위한 말씀으로 들었음이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뱀)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창세3,5-6)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아담)은 뱀의 선악(善惡)의 유혹(誘惑)을 먹고 하느님처럼의 삶, 곧 자기의 뜻, 의(義), 영광을 희망하며 사는, 그것이 본성이 된 ‘마귀 들린 자’로 태어난다. 그래서 코헬렛이 모든 인간은 짐승일 뿐이라 한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것을 깨달아라. 주신 성경이다. 그래서 신앙은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 28절에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왜? 많은 이들이 자기의 뜻, 욕망,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며 믿는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곧 세상(땅)의 것을 구하는 것이기에 영원한 땅속(地獄)에 갇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4,4)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1요한2,17)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4,1-2) 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肉)을 입고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죗값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모든 이들이 하늘의 영원한 생명, 평화,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진리(眞理)로 믿고 의탁하는 삶 또한, 그 구원자를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 영광 드리는 신앙을 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가 하느님의 영(靈)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罪)로 죽으셨음은 믿으나, 세상의 평화, 안식, 육신(肉身)의 건강(健康)을 주시는 그리스도라 믿으면 하느님께 속한 영(靈)이 아니다. 세상의 말을 따르며 믿는 것이다.
(콜로2,8)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영원한 어둠, 땅속을 향하게 하는 인간들의 선악에 의한 신앙이 아닌, 영원한 빛, 하늘에 들어갈 하느님의 말씀, 진리를 깨닫는 신앙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