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09일 금요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 (마태16,24-28)
제1독서<불행하여라, 피의 성읍!>(나훔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화답송>신명32,35ㄷㄹ과 36ㄷㄹ.39ㄱㄴㄷㄹ.41(◎39ㄷ)◎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 그들에게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재난이 삽시간에 닥친다. 주님은 당신 백성의 권리를 감싸 주시며, 당신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 ◎
○ 이제 너희는 보아라! 나다. 내가 바로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다. ◎
○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날을 세우고,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리라. ◎
복음<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4-28)
2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2024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훔2,1.3; 3,1-3.6-7)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2,3)
본절은 아시리아가 그의 대적들에 의해 멸망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상반절과 후반절 모두 '왜냐하면'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키'(ki)로 시작한다.
아시리아 멸망의 첫째 이유가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과 약탈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고, 두번째 다른 이유가 이스라엘의 영예, 즉 야곱의 영예를 회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밝힌다.
여기서 '약탈자들'에 해당하는 '베카쿰'(beqaqum)이나 '약탈하고'에 해당하는 '뽀케킴'(boqeqim)의 원형은 모두 '빠카크'(baqaq)이다.
그런데 '약탈'이라는 말은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음'이라는 정도의 의미이지만, 원어
'뻬카크'(beqaq)는 어떤 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것은 아시리아가 남부 유다에 행한 악행이 일반적인 약탈의 수준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포도나무 가지'에 해당하는 '제모레'(zemore)의 원형 '제모라'(zemorah)는 구약 성경에서 5회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가지'라는 의미도 있지만(이사7,10; 에제8,17), 좀 더 구체적으로 '포도나무
가지'를 가리키는 경우(민수13,23; 에제15,2)도 있다. 본문 역시 '포도나무 가지'의 포현으로 볼 수
있다(시편80,15.16).
또한 '망쳐 버렸지만'에 해당하는 '쉬헤투'(shihethu)의 원형 '샤하트'(shahath)는 '없이하다' 혹은 '망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사용하심으로써 남부 유다를 징계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아시리아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징계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들의 탐욕과 사악함을 따라 남부 유다를 지나치게 압제하고,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등 잔혹하기 그지없는 일들을 저질렀다(이사10,6.7; 47,6).
따라서 아시리아 역시도 그들이 이스라엘에 행한 것처럼 다른 나라에 의해 처참하고도 무자비한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시리아는 북부 이스라엘을 B.C.722년에 멸망시켰고, B.C. 587년 남부 유다 멸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바로 그 자신이 '파괴하게 하는 자'(흩어지게 하는 자)에 의해 공격을 받아 철저히 파멸되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시리아에게 이 일을 행한 주체는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연합군으로 볼 수 있다.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곤경의 날에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근심과 곤경 가운데 더욱더 주님께 다가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그리고 그분께 매달리고 그분께 손을 대었습니다(루카 6,19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은 생명을 얻으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아시고 반기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런데 그분의 말씀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그것을 잃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또 당신의 이런 선택을 씨앗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생명이 죽음에 이르도록 철저히 경멸해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에게는 정말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환난을 이겨 내고 생명을 얻은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묵시12,1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대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試驗)이 여전히 많은 신앙인에게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곧바로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걸으셨고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부활하실 것이라는 당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사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해야 한다는, 신앙의 여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는데 죽어야 하는가?’ ‘행복을 원하는데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며, 희생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이고 선물의 표지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1-27)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 그 반드시 죽어야 할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1요한2,2)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그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그 예수님을 모르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예수님으로, 그 주님으로 섬기고 비는 신앙을 산다면 오늘의 베드로 처럼 되는 것입니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일, 그분의 뜻을 반박한다(반박-꾸짓고 야단치다) 왜? 아직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하느님의 일, 그분의 계명 곧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이 아닌 인간들의 계명으로 열심히 지킨 자기 명예,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도록 하는 것, 그것이 사탄의 일인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죽음, 의로움을 헛되게 하는 그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이 불의(不義)인 것이다.
(로마12,1)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 하셨는데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인간의 의로움은 개짐(똥걸레, 쓰레기)일 뿐) 십자가의 의로움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이 씻겨 거룩해진 산 제물로 바치는, 그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지금까지 간직하고 의지하며 살았던 세상의 말을 버리는~ 곧 세상의 돈과 명예 영광 의로움 그 모든 것이 구원의 가치 능력 없음을 인정하는 自己否認, 그 버림으로 구원의 의로움,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리로 따르라 하시는 것이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세상의 의로움, 자기 영광 그 肉을 위해 사는 이는 하늘의 생명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 세상, 인간의 계명(율법)을 따라 살았다면 그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계명 곧 나무 하나의 희생,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진리를 따랐다면 그 십자가가 거저 주는 하늘의 용서와 의로움의 판결을 받을 것이다.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셨고, 죽으셨다. 그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우리는 신앙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靈의 구원이 아닌 肉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그 靈의 구원, 곧 하늘의 생명을 위해 세례로 진리의 성령을 선물로 받아 놓고(사도2,38참조) 그 하늘의 생명에는 관심도 없이 땅에 목숨, 곧 肉의 명예,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3,1-3) 1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주님! 예레미야처럼~ 뼈 속에 가두어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의 진리로 저희들의 마음, 심장 속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6,24-28)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6)
'목숨을'로 번역된 '프쉬켄'(psychen)의 원형 '프쉬케'(psche)는 '숨쉬다', '바람불다'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psycho)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목숨'(life; 요한10,17)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영혼'(soul; 마태10,28)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도 가리키는 이중적인 용어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 나오는 역설적인 교훈은 이러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간의 대조 관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자신의 육적인 생명에 대한 애착만을 갖고 이것을 지키려는(히브2,15) 자는 끝내는 육적인 목숨과 더불어 영적 목숨까지 잃게 되지만(루카12,20),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 헌신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 뿐 아니라 종말에 그 육체 또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야고1,19; 묵시21,4).
또한 '얻고도'에 해당하는 '케르데세'(kerdese; he gains)는 능동태인데 반해, '잃으면'에 해당하는 '제미오테'(zemiothe; lose)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태'(voice)는 본문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
즉 이 문장은 사람이 온 세상(천하)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힘쓰는 노력은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심은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위한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이다.
한글 새성경에서 '제 목숨을' 다음에 '주고'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shall give)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미래형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관습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격언적 미래형'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인간 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생명의 단(일)회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앞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한한 육적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영생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영생의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소중한 목숨까지도 권능의 예수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촉구하신 것이다.
2024년 08월 09일 금요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나훔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고들 합니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니네베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원하고 그 함락을 지나치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는 니네베의 함락을 “기쁜 소식”이라고,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나훔 2,1)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훔서의 첫머리에서는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1,2)이라고 선포합니다.
매우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 52장 7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평화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훨씬 듣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이 선포되려면 바빌론이 멸망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또한 압제자가 몰락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훔서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려면 아시리아가 무너져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의 성읍”(3,1)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쁜 소식”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훔서의 “기쁜 소식”은 거북하다고 느낀다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아니, 비논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훔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라 하더라도 그 힘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08월 09일 금요일[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세상적인 自我를 버리는 것이 ‘十字架를 지는 삶’인 것이다.
복음(마태16,24-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말씀하신후에~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로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 따라 오라는 말씀이다. 곧 사람의 뜻, 소원(所願)을 위한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그 옛 계약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주님의 새 계약의 십자가(十字架)로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다. 현실의 내 십자가로 나의 죄성(罪性)을 보고, 주님의 십자가로 가는 것이다.
(히브9,15) 15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한 첫째 계약의 제사와 윤리의 신앙을 고집하면, 약속된 영원한 상속재산(相續財産), 곧 하늘의 용서, 의(義), 평화, 안식, 생명을 잃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 살고, 살아계신 능력의 예수님을 섬기면 죽는다. 그 십자가의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人)이다.
(로마6,6)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자기 否認으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버림, 否認하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司祭께서>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면 영적인 자아가 죽고, 영적인 자아를 추구하면 세상적인 자아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데, 이 영적인 자아를 추구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자아를 버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十字架)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하늘의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지고 살았다면 ‘선악(善惡)의 심판(審判)’을 받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다면 ‘용서, 자유, 구원의 심판’을 받는다.
(에제7,27) 27 임금은 슬퍼하고 제후는 절망을 옷처럼 입으며 이 땅에 사는 백성의 손은 떨리리라. 나는 그들이 걸어온 길에 따라 그들을 다루고 그들의 판결에 따라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리라.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묵시20,12) 12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 책(冊)들, 여러 계명, 여러 법, 그 옛 계약의 책으로 ‘심판(審判)의 책(冊)’이다. 또 다른 하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새 계약으로 얻는 생명, ‘구원(救援)의 책(冊)’이다.
창세기(創世記)부터 묵시록(黙示錄)까지 성경(聖經) 전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는 하늘의 생명, 그 한가지만을 약속하신 한 권(券)의 책이다.(루가24,27 요한5,39 사도28,23 참조) 그 하나, 한 가지를 깨닫지 못하고 땅의 목숨을 위한 도덕(道德)과 윤리(倫理)의 여러 계명(誡命), 말씀이 적힌(구약46+신약27) 책들로 보면, 가지면 심판(審判)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 ‘서 있는 사람’ 하늘을 향해, 곧 하느님의 뜻을 향해서 서 있는 사람은 성경(聖經)말씀을 통해 말씀을 깨달아 죽기 전(前)부터 하늘나라를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루가17,20-21)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우리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 곧 하느님의 뜻,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이다.(요한1,1-5.9-14참조)
(요한1,4-5.14) 4 그분(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세상) 속에서(가운데)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3,17-19)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옛 계약의 죄(罪)를 대속(代贖)하실 새 계약(생명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보내셨기 때문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말씀, 새 계약)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하늘)보다 어둠(세상)을 더 사랑하였다.
= 성경(聖經)을 통해 자신의 흙(죄)됨, 어둠임을 깨닫고 스스로 빛 인척 했던 자신을 버리고(否認) 우리가운데 계신 참 빛,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새 계약) 안으로 들어가 하나 되는 것이 容恕, 平和, 安息, 救援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에게 듣는 마음을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