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17일 토요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하늘나라 (마태19,13-15)
제1독서<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에제18,1-10ㄱ.13ㄴ.30-3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
3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4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5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6 곧 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강도 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고,
8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0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남의 피를 흘리게 하면,
13 아들이 살 것 같으냐? 그는 살지 못한다. 이 모든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은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31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32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화답송>시편51,12-13.14-15.18-19(◎12ㄱ)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연중 제 19주간 토요일(에제 18,1-10ㄱ.13ㄴ.30-3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자식들의 이가 시다' 속담을 말해 대느냐?(2)
본절과 3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책임 연계를 뜻하는 속담이, 사용하지 않게 될 그릇된 속담임을 천명한다.
그 가운데 본문은 이 속담이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 특히 바빌론 유배 포로 공동체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심으로 회자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땅'에 해당하는 '아드마트'(admath)의 원형 '아다마'(adama)는 영토라는 의미보다는 흙 성분 자체로서의 땅이라는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자적 의미보다 예루살렘 및 그 예루살렘이 대표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는 비유적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에 대하여'라는 의미의 전치사 '알'(al)과 함께 쓰여 이후에 제시되는 속담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되어 언급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 성경은 잘못 번역 한 것 같은데, 원문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함마샬 핫제 알 아드마트 이스라엘"; hammashal hazeh al admath israel; this proverb about the land of Israel)이다.
원문에서 '속담'에 해당하는 단어는 '함마샬 핫제'(hammashal hazeh)로서, 문자적으로는 '바로 이 속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회자되던 그 속담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속담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속담'에 해당하는 '함마샬'의 원형 '마샬'(mashal)은 어떤 두 개의 대상을 나란히 놓고 서로 비교 대조하는 것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자연 현상이나 생활 속의 일을 빗대,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말하는 표현을 의미한다.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빗대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 깊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래 동안 잊혀지지 않고 잘 기억되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자식의 이가 시다'란 속담의 의미는 아버지(조상)가 지은 죄 때문에 자식(후손)이 고난(형벌)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컨대 B.C.14세기에 힛타이트 왕 무실리스 2세는 자기 왕국을 휩쓸어버린 대재앙을 목도하면서 힛타이트의 폭풍의 신에게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신에게 큰 죄를 저질러 그 신이 그 죄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 이런 형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본절의 속담에서 '시다'에 해당하는 '티크헤나'(thiqhenah)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을 포함해 오직 네 구절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코헬렛 10장 10절("쇠가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않으면 힘을 더 들여야 한다.")에서는 칼이나 연장의 날이 날카롭지 못하고 무딘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고,
본문의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속담을 진술하는 예레미야 31장 29절,30절에서는 본문과 마찬가지로 신 포도를 너무 많이 먹어 이빨 신경이 무뎌져 얼얼한 상태를 나타낸다.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아무리 신 포도를 많이 먹을지라도, 그 당사자의 이빨의 감각이 무디어질 뿐이지, 그 자녀의 이빨이 그렇게 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런 속담을 만들어 회자시킨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 특히 바빌론 포로로 끌려와 타향 생활을 하며 고난을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던 그 고난이 죄를 너무나 많이 지은 그 조상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많이 나는 포도와 관련한 이 속담을 말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의 삶을 깊이 통찰하여 그러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그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기는 커녕,오히려 조상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불평만을 일삼았으며, 무고한 자신들에게 내리시는 주님이 공평한 신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주님을 원망하는 삶을 살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내려진 그런 고난의 삶을 결코 벗어 버릴 수 없다는 일종의 숙명론적인 굴레에 얽매어, 미래에 대해 그 어떠한 소망도 품지 못한 채 절망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상의 죄악으로 인한 희생자가 결코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철저히 회개하여 자신들의 악한 삶을 떠나 의로운 삶을 살 경우, 자신들은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우리는 지난주부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과 그다음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단원을 시작합니다(18,3-4).
이어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정말 중요한 요소들, 곧 ‘용서’와 ‘하느님 나라와 부자’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성’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다시한번 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형적인 말씀의 반복입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말씀을 ‘강조’하려는 대표적인 글쓰기 방식입니다.
이렇게 한 단원의 시작과 끝 또는 단원의 연결점에 같은 단어, 같은 내용의 문장을 배치하여 반복하는 복음사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 단원에 담겨 있는 용서의 문제, 부와 가난의 문제, 혼인과 이혼의 문제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 주십사고 청하는데,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복음에 비추어 선택해야 하는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용서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난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정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해하고 참아야 합니까?’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성숙도는 우리가 얼마나 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인가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녀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신 ‘사람’은 자녀의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죄를 지었습니다(창세 3,5 참조).
우리는 정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사는 그분의 자녀입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복음(마태19,13~15)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14~15)
마태오 복음 19장 13절은 어린이를 랍비와 같이 존경받는 사람에게 데리고 나와서 안수 기도를 받는 당시의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결혼을 통해 얻어지는 하느님의 귀한 선물인 어린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축복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단락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겸손함과 순종을 본받고, 어린이 하나라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교훈(마태18,1-4)을 제자들에게 주셨는데, 제자들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어린이를 경시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 어린이의 접근을 막는 실수를 저질렀다.
마태오 복음 18장 3절에 나오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에서 '어린이'에 해당하는 '타 파이디아'(ta paidia; little children)의 특징은 부모에게 절대 의존적이고, 부모의 말에 절대 순종하며, 가르침을 단순하게 잘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에 대하여 절대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9장 14절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10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린이의 접근을 막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열중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실로 소중한 어린 생명들이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의분을 금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냥 놓아두어라'에 해당하는 '아페테'(aphete; let; suffer)는 일시적 동작을 명령하는 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어린이들의 접근을 용납하라는 촉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막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콜뤼에테'(me kolyete; do not forbid; do not hinder)는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서 앞으로 계속하여 금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어린이들을 자신에게 보낼 것을 촉구하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강력히 경고하신 것이다.
한편,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에서 '사실'로 번역된 접속사 '가르'(gar; for)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며, '왜냐하면'으로 번역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이유가 천국이 바로 이런 어린이들과 같이 겸손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 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하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he basileia ton uranon; the kingdom of heaven)이나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10장 14절의 '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 (he basileia tu theu; the kingdom of God)는 동일한 의미를 보여 준다.
즉 이것은 모두 하느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가리킨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의 통치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피테이스 타스 케이라스 아우토이스'(epitheis tas cheiras autois; he laid his hands on them; he placed his hands on them)에서 동사 '에피테이스'(epitheis)는 '~위에'라는 뜻이 있는 전치사 '에피'(epi)와 '놓다', '두다'는 뜻이 있는 '티테미'(tithemi)의 합성어로서, '~위에 두다'는 뜻을 가진 '에피타테미'(epitathemi)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안수(按手)는 손을 머리 위에 올리는 것임을 보여 준다.
2024년 08월 17일 토요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라고 묻습니다.
어린이들은 그런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그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19,13)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당하다고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은 이들의 신앙에서, 나이 들어 교리와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신앙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신앙이 그들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른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먼저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고,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곁을 내주십니다. 그 어린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19,14)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거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08월 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
복음(마태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 어린이들, 직역하면 단수 ‘어린이’다(공동번역본 참조)
참으로 답답한 제자들이다. 얼마 전(앞18,5)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 기도를 청(請)하는 사람을 꾸짖을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로 들은 것이다. 말씀을 깨닫지도, 마음 안에 가직,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을 되새기는 올바른 기도(祈禱)도 못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빈말기도(마태6,7.31-32), 곧 다른 민족(세상)들이 청하는 그 헛된 기도만을 했기에 예수님께 오는 이들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판단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이다.
본문의 어린이 이야기는 앞 18장 1절과 짝을 이룬다. 돌아가 보자
(마태18,1-5)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 세우시고, 하늘을 향한 기둥, 계약을 뜻한다.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 어린이 하나,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아버지만을 의지하여 그 아버지께 순종하시다 돌아가신 분, 예수님 한분뿐이다. 곧 어린이 하나는 제자들 가운데 계신, 구원의 계약이신 예수님 당신을 비유하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 하느님의 아드님이 가징 낮은자리, 짐승들의 먹이통으로, 가장 연약한 아기로, 죄인들에게 양식으로 먹히러 오셨다. 그런데 그 어린 아기처럼 어떻게 낮출 수 있나? 스스로 큰 사람이 되려고 애 썼던, 세상 힘의 원리로 살아온 그 자신을 버리고(부인하고) 어린이처럼 사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지체로 들어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된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뜻)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러니까 본문 5절 어린이 하나와 19,14절의 어린이, 그 모두는 온전히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처럼 살아온 제자들 가운데 하늘을 향해 서 계신, 곧 ‘창조이전 하느님의 구원의 뜻으로 세워지신 그리스도’ 당신을 지칭(指稱)하심이다. 위 18장 1-5절, 19장13-15절은 참 내용, 속을 감싸고 있는 양쪽의 빵이다.(카이즘 구조)
그러니까 8장 6-35절, 그리고 19장1-12절까지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구원, 곧 자기 버림(否認)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받는 구원의 말씀’인 것이다.
<그동안 공부한 글을 기억해 보자> 사실 성경 전체, 율법, 예언서, 시편,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久遠)의 말씀’만을 전한다.
(루가24,44)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에페1,4.9-10)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뜻, 사랑을 올바로 알아야, 주님께 오는 이들을 꾸짖지 않을 수 있다. 올바로 알아야 올바른 기도로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
(이사9,5)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요한3,16-17)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 제물, 생명의 양식)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에페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하느님의 은혜)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의 말로 사람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사람의 의로움, 기(氣)를 세워주는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솔직히 잘 살지도 못한다) 영원한 멸망(滅亡)에 갇히게 된다.(요한16,8)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부수는 것이 복음(福音)이다. 부수시고, 잘라 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 다시 세우셔서 살리신다.
(마태10,34)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느님의 힘, 능력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저희들의 이기적 뜻을 버리게 하소서. 영원한 용서, 자유, 평화, 빛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말씀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