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일흔두 제자 파견 (루카10,1-12)

2024. 10. 2. 오후 4: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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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3일 목요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일흔두 제자 파견 (루카10,1-12)


   


1독서<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기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화답송>시편27,7-8ㄱㄴ.8-9.13-14(13)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자비를 베푸시어 응답하소서.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주님, 당신을 생각하나이다.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를 돕는 분이시옵니다.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복음<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루카10,1-12)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욥기19,21-27)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1)

 

앞선 13-20절에서 욥은 무정한 세상 사람들과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으로 인한 탄식을 열거한 데 이어, 21절 이하 22절까지는 친구들을 향하여 동정심을 호소함과 더불어 그들의 무자비함을 다시 한탄한다.


먼저 본절에서 욥이 친구들에게 제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날 불쌍히 여기게나' 에 해당하는 '혼누니'(honnuni ; have pity on me)가 가장 앞서 나오며, 또한 두 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욥이 간절하게 그들을 향해 애원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욥은 하느님의 손이 자신을 치셨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치셨다네' 에 해당하는 '나게아'(nageah) '나가으'(nagah)의 기본형이다. 일반적으로 '강하게 때리다' 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는 강조형이 쓰인다.(창세12,17 ;2열왕15,5)


그런데 여기서 일반형이 쓰인 것은 하느님께서 강하게 치셨다기 보다는 '(손을)대셨다'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이 욥에게 내려진 고난이 대수롭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미세한 힘으로 치셨다고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 충격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욥은 여기서 하느님의 손이 자신을 치셨다고 말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치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이러한 극심한 재난을 당할만큼 직접적으로 특정한 잘못을 범치 않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즉 이것은 자신이 까닭없이 하느님으로 인해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다는  욥의 현실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친구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야 할 이유는 욥 자신의 비참한 상황과도 긴밀히 연관을 가진다.

즉 모든 자들이 자신을 떠나가 버리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상황, 그리고 이제 피골이 상접하여 남은 것이라고는 잇꺼풀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자신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절의 내용은 본장 후반부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냉대하더라도,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리라는 내용(25절, 27절)과 극명한 대비를 나타낸다.

앞서 욥은 여러차례 친구들에게 극히 부정적인 말로써 그들의 논리를 비난하며 거칠게 항변한 적이 있다.(욥기16,2-5) 심지어 그는 친구들의 말을 더 이상 논박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폄하하기까지 하였다.(욥기16,9.10)


 욥은 인간적인 멸시와 냉대가 극에 달하여 더 이상 이 땅에서 도피처를 찾지 못할 때 저 높은 곳에 계신 분, 자신이 조금 전에 불평하고 원망했던 그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그분의 도우심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하느님의 매를 맞은 상처의 아픔을 달래기 위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호소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같은 욥의 태도나 말들을 통해, 이유를 알 수 없는 극한적 고난 속에서 욥이 얼마나 깊은 혼란에 빠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 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 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는 '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 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은 '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는 접속사 '와우'(wau)에 '~로부터'(from)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에 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 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때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연중 제26주간 목요일복음 (루카10,1-12)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3)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는 제자들의 수가 7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등에는 72인으로 되어 있어 파견받은 사람의 수효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70이나 72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70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수로 여기는 7 충만한 수의 의미를 갖는 10이 곱하여진 숫자이다. 그리고 72는 12의 6배, 즉 12사도의 6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당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실제적인 수효임과 동시에

앞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창세10장; 창세46,27; 민수11,16~25참고).

또한 루카 복음 10장 1절에 72인을 수식하고 있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헤테루스'(heterous) 형용사로서 명백히 12명의 사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둘씩 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아나 뒤오'(apesteilen autous ana dyo; sent them two by two)에서 '보내시며'로 번역된 '아페스테일렌' (apesteilen)는 '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apostello) 부정과거형으로써 12사도의 파견 때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이다(루카9,2).

이것은 보냄을 받는 72인의 제자들이 12사도와는 확실히 다른 별개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이유'나 '목적', '권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씩'에 해당하는 '아나 뒤오'(ana dyo; two by two)의 의미는 아마도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마르6,7; 코헬렛4,9), 그들의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율법의 요구를(신명19,15; 민수35,30)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연중 제26주간 목요일(10/3)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는 복음선포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당신이 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특히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에 있어 복음적 생활양식을 따르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중요한 말씀이기도 하지요. 

특히 성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에 영감을 받아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며 모든 이에게 회개와 평화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는 그 사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말씀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순례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그대로 실행하고자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명이 열두 사도라는 작은 제자공동체에 한정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맡겨진 자비와 치유, 해방과 평화를 선포하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행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10,4-5) 

그렇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뒤로 미루거나 다른 일을 한 다음에 시간나면 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지금’ 복음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안전을 보장해줄 여장을 꾸리고, 일일이 인사치레를 다 하고, 악의로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급한 사명 수행을 위해 현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에게 주어진 그 사명만을 바라고 그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소유하지 않고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영광과 안락, 개인의 이익과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결코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지요. 

아울러 우리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는 평화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길 기원하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비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축복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그럴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과 씨름하느라 헛되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생명과 해방의 선물을 거절함으로써 하느님과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판한 셈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가난한 순례자로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 자유와 평화를 선포하는 ‘걸어가는 복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20241003일 목요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곳이 아직 많고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파견할 제자가 일흔두 명이나 있어도 부족합니다.

어림잡아 비교한다면 비신자들이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슷할까요?

그러나 신자들이 많아도 일꾼은 많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처음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결국 언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을 때, 일꾼은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그 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다면, 그들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써 그 밭을 돌볼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아 밭에 할 일이 많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고자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일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에서 지금의 처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밭 주인의 마음으로 그 밭을 바라봅시다. ‘밭 주인은 일꾼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밭 주인에게서 파견되었음을 생각하며,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03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먼저, 그리고 복음

 

(창세1,5)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 저녁(어둠, 밤)과 아침(빛, 낮)은 첫날(에하드-통일)

 

(창세2,9)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 선(善)과 악(惡)을 둘로 먹음면 죽음, 선과 악을 하나로 먹으면 생명, 여자와 남자가 한 몸, 하나 이듯이 땅과 하늘은 하나, 죽음과 생명도 하나, 절망과 희망도 하나, 가난과 부자도 하나, 실패와 성공도 하나, 고통, 슬픔과 기쁨 또한 하나다.

여자가 아들(남자)를 낳듯이 땅의 절망과 가난, 고통, 실패, 슬픔이 일을하여 하늘의 성공, 희망과 부(富), 기쁨, 생명을 낳는다.

*난관이나 어려운 시험이나 비명이 터져 나올 때, 우리가 잘못 했다는 생각 이상으로 하느님이 일하신다.

 

(로마8,38-39)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아멘.

 

복음(루카10,1-11)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고을, 고장에 죽으러 오셨다.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양(羊)으로 이리 떼(세상) 가운데 죽으라는 것이다.

 

(요한13,34)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신것과 같이 죽기까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사랑?-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1코린13,4) 곧 내 뜻(생각)과 다른 이를 기다려 주는, 내 뜻의 버림, 곧 나의 죽음이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지 마라’는, 곧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라’는 말씀이다.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9생략)

= 평화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를 부인할 때, 곧 자신이 낮아질 때, 죽을 때, 얻어지는 하늘의 평화이기에 받을 사람이 아주 적다.

그 낮아짐, 죽음으로 새 생명(生命), 새 창조(創造), 곧 하늘의 새 사람, 큰 사람이 된다.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힘인 사람들의 대접(7-8절), 높은 평가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하늘의 평화가 아닌 세상의 평화와 짝 한, 흙의 먼지일 뿐임을 알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보호자 성령님!

마음이 산란하고 겁이 납니다. 용서하시고 용기를 주소서. 저희를 의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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