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 (루카10,13-16)

2024. 10. 3. 오전 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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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일 금요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 (루카10,13-16)


   


1독서<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욥기38,1.12-21; 40,3-5)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화답송>시편139,1-3.7-8.9-10.13-14ㄱㄴ(24)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복음<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10,13-1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또는,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독서(갈라 6,14-18)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제1독서(욥기38,1.12~21; 40,3~5)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2~13)

 

욥기 38장 4~1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의 신비를 소재로 사용하여 당신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셨다.

 이제 욥기 38장 12~2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창조로 조성된 우주를 친히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들어 당신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신다.

 

그 가운데서 12~15절은 욥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아침을 오게하여 땅에 빛을 비추게 하셨음을 밝힌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은 욥이 태어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아침을 동트라고 명령한 적이 있느냐는 힐문조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평생에'로 번역된 '헤미야메카'(hemiyameka)는 의문사 '하'(ha)와 '~로 부터' 란 의미의 전치사 '민'(min)과 '날'이란 뜻의 명사 '욤'(yom)의 복수형에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너의 날들로부터'(since the days)가 된다.

 

여기서 '날들' 이란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욥의 출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더 나아가 죽음이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

 

 평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이 시간속에서 단 한번이라도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너의 명령에 의해서 되어진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욥을 비롯한 인간들이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세상의 모든 만물은 전적으로 절대자인 하느님의 섭리와 통치에 따라 운행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밤과 아침 사이에 있는 새벽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확하게 앎으로써, 매일 매일이 유지되고 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런데 혹자는 '새벽'에 해당하는 '샤하르'(shahar)를 신화에 나오는 '새벽별 신' 과 연관시켜 새벽 시간에 정확하게 나타나는 신격화된 샛별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샤하르'는 '날이 새다' 라는 뜻의 동사 '샤하르'(shahar)에서 유래하여 '새벽'(여호 6,15; 시편57,9; 호세10,15)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아침이 오기 전 여명(서광,먼동)을 가리키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자리'로 번역된 '메코모'(meqomo)의 원형 '마콤'(maqom)은 '어떤 지정된 장소'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새벽에게 그 자리'(새벽의 처소)란, 곧 새벽이 하느님께서 정하여 준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나 다른 자연의 질서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3)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새벽에게 명하여 빛을 땅끝까지 비추게 하고, 그 빛으로 악인들을 제거하고, 불의한 자들을 털어내 본 적이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날이 밝아서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과 '악인이 쫓겨나는 것'을 평행 관계에 두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악인들이 주로 아무도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악을 도모하고, 모두가 잠든 밤에 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하느님께서 이 땅 곳곳에 빛을 비추시는 것은 악인들이 자신들의 악을 그치도록 하기 위함임을 나타내준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예수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에 자리한 성읍들로, 그분께서 공생활 시작부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과 수많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곳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주민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무심하게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라 버린 씨앗처럼 죄와 불신 속에 변화를 거부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받게 될 혹독한 징벌을 예고하십니다.

그 징벌이 사치와 교만과 우상 숭배로 타락하였던 이방 도시 티로와 시돈에 내려진 죽음과 멸망의 심판(이사 23장; 에제 26─28장 참조)보다 훨씬 무겁다고 하신 것은,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복음과 기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데 비하여 이 세 성읍의 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제 의지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무엇도, 지킬지 버릴지 판단할 대상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론적 응답입니다.

 

마치 까닭 없는 극한의 고난 속에 하느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주장하며 끈질기게 답변을 요구하던 욥이, 창조주이신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입을 가리고 침묵하며 승복함으로써 완성한 그 믿음처럼 말입니다(제1독서 참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야말로 당신과 그리고 성부와 영원한 일치에 동참하는 가장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복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제자로서 그 진리를 주위에 증언하는 삶으로, 모든 순간 하느님 앞에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불행하여라(루가 10,13-16)

- 유 광수신부-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베싸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치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의 회개를 위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부모가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식에게 "이제 제발 정신차려라. 너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 말은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요, 안타까움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듯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그 화를 끼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 16-17)라고 말씀했지만 아담과 에와는 그 말을 듣지 과일을 따 먹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고통을 겪고 죽어야 했다. 하느님은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런 희생을 치루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에와가 야훼 하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나의 부모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까지 불행해진다. 즉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내가 회개하면 나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개로 받는 축복이 나만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내 주위에 있는 분들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복을 받는다.

 

다음 글은 지난번 서울 주보에 실린 신달자 시인의 글이다.

-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계속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의 길 거리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4번이나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즉 물리침으로써 정말 내가 불행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행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되는지 어디 한 번 4 번 말씀을 물리쳐 보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0, 13~16)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14)

 

'코라진'(chorazin)은 '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오늘날 발견되는 유적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라진'은 예수님의 초기 활동 지역이었던 '카파르나움'(Capernaum)에서 약 3km 이내에 인접한 도시였다.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벳사이다'(Bethsaida)는 '어획 장소'(고기잡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동북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성읍이었다.

원래 명칭은 '벳사이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서, 헤로데 필리보 임금이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붙여졌다.

 

이곳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의 고향이기도 했다(요한1,44; 12,21).

특히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곳이었다(마르8,22).

 

하지만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가장 큰 이유의 배경에는 루카 복음 9장 10~17절의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으며(루카9,11), 또한 황량한 빈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루카9,13~17).

 

이것을 볼 때,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였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과 기적을 베푸신 활동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믿음에는 보잘 것 없어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에 해당하는 '우아이 소이'(Uai soi; Woe to you)에서 '우아이'(uai)는 엄숙한 경고나 고통, 분노 그리고 동정심 내지 연민의 감정이 서려 있는 탄식을 표현하는 의성적 감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심판과 보복만의 선언이 아니고, 불신앙에 대한 책망 속에는 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안타까운 심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마태15,21; 마르7,24.31),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완고하고 사악함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 선고를 받은 사악한 이방 도시였다(이사23장; 에제26~28장; 요엘4,4~8).

 '티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방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티로'는 B.C.2750 년경에, 그리고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서 유명하며,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아모1,9; 요엘 4,4~6)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이사23장; 에제26~28장)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보다 갈릴리의 도시들이 더 사악하고 완고한 곳이라고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티로'(Tyro)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라는 지명을 거론하시면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이 바위보다도 더 마음이 굳어지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비가 와도 조금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바위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루옷'으로 번역된 '삭코'(sakko; sackcloth)는 낙타의 짧은 털과 같은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이며, 흔히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맨 살 위에 바로 입었다(2사무3,31; 1열왕21,2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인 회한(悔恨)을 표현하기 위해  '재'(먼지; ash)를 머리 위에 끼얹거나(애가2,10),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3,6), 재 위에 드러 눕기도 하고(에스테르4,3), 그 위에 뒹굴기도 하였다(미카1,10).

 

이렇게 구약에서 회개의 행위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던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 '티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완고하고 사악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0장 14절에서 '심판 때에'에 해당하는 '엔 테 크리세이'(en te krisei; at the judgment)라는 말로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관으로 재림하셔서(사도17,31; 2베드2,9) 죄악에 대하여 엄격히 심판하시지만, 허락되었던 특혜와 특권을 감안하셔서 더 많이 받은 그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는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도시는 나 자신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하면 된다.

 

인간이 회개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 대전에 언제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은총과 현세적 축복과 영적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더 큰 내세의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의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20241004일 금요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기 38,18).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욥이 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욥 자신에게서 이미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질문하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히려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하여 본 적이 있는지, 새벽에게 자리를 지시하여 본 적이 있는지, 많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욥은 이 물음들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고,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들로, 욥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고통이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듯이, 동물들이 살아가듯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은 입을 막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내 삶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다 아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욥기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被造物과 創造主각 제자리에 앉는 것이 眞理.

 

독서(욥기38,1.12-21; 40,3-5.42,2-6)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深淵)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42,2 저는 알았습니다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그렇습니다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 깨달음의 눈(호라우)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의인으로 살았던 자신에게 시련, 고난이 닥치자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시련,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며 하느님께 따지겠다며, 원망했던 욥이 자신은 피조물인 흙, 없음임을 깨닫고 한 고백이다.

땅의 재물, 의(義)가 허무, 헛 것임을 깨달아 하늘의 의인 이 된 것이다. 자신은 피조물, 없음의 자리에 앉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코헬8,17.9,1-3) 17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관련하여 태양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인간은 파악할 수 없음을 보았다인간은 찾으려 애를 쓰지만 파악하지 못한다지혜로운 이가 설사 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는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9,1 그렇다나는 이 모든 것을 내 마음에 두어 고찰해 보았는데 의인들도 지혜로운 이들도 그들의 행동도 하느님의 손안에 있었다사랑도 미움도 인간은 알지 못한다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이 허무일 뿐. 2 모두 같은 운명이다의인도 악인도 착한 이도 깨끗한 이도 더러운 이도 제물을 바치는 이도 제물을 바치지 않는 이도 마찬가지다착한 이나 죄인이나 맹세하는 이나 맹세를 꺼려하는 이나 매한가지다. 3 모두 같은 운명이라는 것 이것이 태양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악이다인간의 아들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고 살아 있는 동안 그들 마음속에는 우둔함이 자리한다그런 다음 죽은 이들에게로 간다.

= 흙(어둠, 없음)에서 왔으니 흙(어둠, 없음)으로 돌아갈 뿐~, 그러나 하늘의 의로움을 찾으면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가 ‘있음의 존재(存在)’가 된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로마3,20.23-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제사윤리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그런데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해 제사와 윤리를 열심히 지킨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산다면, 자신을 위한 의로움의 성전(카파르나움)을 짓는다면, 영원한 어둠, 땅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의미, 뜻을 깨닫지 못해 믿지 못하는 이도 그와 같다.

 

복음(루카10,13-1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너 코라진아불행하여라너 벳사이다야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 회개 - ‘메타노이아’ ☞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코라진, 베싸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곳이며 ‘티로, 시돈’은 지중해 주변에 있는 도시로 당시 이 두 도시는 이방인들을 상징했고, 하느님께 심판 받을 도시로도 상징했다.

중요한 것은 어제, ‘나타엘’처럼 예수님 쪽으로 돌아옴(회개)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1,47)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집, 고을, 성전), 하느님의 말씀 대신 인간 자신들의 노력, 힘으로 안식처의 집, 성전을 짓는 ‘카파르나움’이다. 곧 카파르나움은 하느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말을 전했기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신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 전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6ㄴ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사제께서 ~

<성인 예로니모는 평소 꿈꾸어왔던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여러개의 수도공동체를 건립한 그는 34년 동안 성경과 관련된 번역과 저술작업에 몰두했으며 성경에 관련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많은 주해서를 남겨 교회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 공부와 묵상에 우선권을 두라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시오 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성경을 흠모하시오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을 감싸줄 것입니다성경을 파고드시오성경 안에서 찾으시오거기서 모든 것을 다 얻을 것입니다.”

성경(聖經)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하느님의 지혜도 모르는 사람입니다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삶에 의문이 생길 때, 난데없는 예기치 않았던 고통이 찾아올 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억울할 때, 다른 모든 것 다 제쳐두고 성경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의 지혜진리의 영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깨닫고 믿게 해 주세요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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