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26일 목요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소문(所聞) (루카9,7-9)
제1독서<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화답송>시편90,3-4.5-6.12-13.14와17(◎1)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
복음<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7-9)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코헬렛1,2-11)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
코헬렛은 질고에 휩싸인 인간의 구원이라는 성경 본래의 근본 주제를 태양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와 그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설파한 책이다.
본서에는 인생의 허무와 그 극복에 대한 문제가 크게는 세 부분에서 거론되고 있다.
즉 본문 부분인 1장 12절에서 12장 7절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네 가지 주제로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본론 부분의 전후에 서론(1장 1절~11절)과 결론(12장 8~14절)부분이 있다.
코헬렛 1장 1절은 표제로서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라고 시작한다.
원문은 이러한 표제가 '코헬렛(코헬레트)의 말'(The Words of Preacher)로 번역된 '띠브레 코헬레트'(dibre qohelleth)로 시작된다.
구약 성경의 각권의 이름은 때때로 첫 부분에 나오는 단어로 정해지는데, 본서도 그렇다.
즉 히브리어 성경의 본서 제목이 '코헬렛'(코헬레트) 이다.
본서의 영역본 이름인 'Ecclesiates'는 70인역(LXX;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에서 사용한 본서의 제목인 '엑클레시아스테스'(ekklesiastes)에서 나온 것인데, 이 역시 본문에서 '설교자'(전도자)에 해당하는 '코헬렛'(코헬레트)의 번역이다.
'엑클레시아스테스'는 '모임'(히브2,12),'집회'(사도19,32)라는 뜻을 가진 '엑클레시아'(ekkleisia)에서 유래하였다.
'코헬렛'(코헬레트)을 '설교자'라는 의미로 수정되는 '엑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한 것은 각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희랍어의 어원으로 볼 때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허무로다. 허무!' (habel haballim; '하벨 하발림')
'코헬렛이 말한다' 라는 문장 앞에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허무로다. 허무'를 서두에 배치하여 강조하는 것은 '허무로다'에 해당하는 '하벨'(habel)의 원형인 '헤벨'(hebel)이 나타내는 개념을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함이다.
'헤벨'(hebel)은 본래 '증기'(vapor),'호흡'(breath)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래하여 '실체가 없는', '덧없음', '허무함',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 등을 표현하는 단어로, 인간 존재의 헛됨과 인생의 무상함(욥기7,16),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무익함(신명32,36; 1열왕16,13)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희랍어 70인역(LXX)에서는 '허무'(vanity)를 의미하는 '마타이오테스'(mataiotes)로, 라틴어 Vulgata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것을 'vanity'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부조리', '불합리함'을 표함하여 인간의 삶의 총체적 허무를 기술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본절(2절)에는 '헤벨'(hebel)을 원형으로 하는 단어가 단수로 세 번, 복수로 두 번, 도합 다섯 번 사용되었다.
본문의 '허무로다'에 해당하는 '하벨'은 '헤벨'의 연계형이고, '허무'에 해당하는 '하발림'은 '헤벨'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 된다. 이러한 구조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최상급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창세기 9장 25절에서 '종들의 종'으로 번역된 '에베드 아바딤'(ebed abadim)이 '가장 천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최상급의 표현으로 상대적인 허무나 헛됨이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의 허무와 헛됨을 표현하고 있다.
즉 태양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바, 어떤 방법으로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허무와 헛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본질적 허무함에 대한 진술과 고백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반복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역경 속에 있었던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 날은 한낱 입김일 뿐 입니다" (욥기7,16) 라고 절규했다. 바로 이 욥의 고백에서 '입김'에 해당하는 단어가 '헤벨'(hebel)이다.
또한 다윗은 범죄로 인한 하느님의 징계로 그 모든 영화로움을 잃게 되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형편을 묘사하며, "당신께서는 죗값으로 인간을 벌하시어 좀 벌레처럼 그의 보배를 사그라뜨리시니 사람은 모두 한낱 입김일 따름입니다" (시편39,12)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입김일 따름입니다'로 번역된 표현 역시 '헤벨'(hebel)이다.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인생 자체를 숨결보다 가벼운 것으로(시편62,10),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시편144,4), 잠깐 나타났나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안개)(야고4,14)로 묘사하며 그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욥이 고백한 인생에 대한 비관적 선언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다윗의 고백은 범죄하는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고 그 허무함과 무의미함 등을 절감한 이후 내뱉은 고백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백된 '헤벨'(hebel) 즉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토로는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드러나는 설교자의 진술은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 누린 자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 더욱 더 절망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즉 인생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 그리고 모든 부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인생을 정리하며 얻은 체험적 결론이기에, 본문의 진술은 더욱 더 충격적이며어떤 인간도 이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염세주의나 비관론자의 푸념으로 매도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지향하는 인간의 온갖 자의적 수고와 하느님을 떠나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직시한 것에 따른 것이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인생이 참된 의미를 가진다는 긍정적 결론을 위한 신앙적 실존에 근거한 방법론적(기술적) 염세주의라 할 수 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habel haballim hakkol habel; '하벨 하발림 학콜 하벨')
'허무로다. 허무'에 해당하는 '하벨 하발림'(habel haballim)은 본절 서두에 이미 기술되었으나 후반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문장 서두에 언급된 표현이 다시 반복되어 인간의 삶의 헛됨을 보다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허무로다'로 번역된 '학콜 하벨'(hakkol habel)을 덧붙여 태양 아래 모든 것이 헛됨을 더욱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이'에 해당하는 '학콜'(hakkol)은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 '콜'(kol)과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학콜 하벨'은 '그 모든 것이 헛되도다'(the whole is vanity)로 번역될 수 있다.
본절에서 '학콜 하벨'에 선행하여 '헤벨'(habel)을 원형으로 하는 단어가 네 번 사용되었다. 이 네 개의 단어는 동일한 형태로 두 개의 어구를 형성하여 감탄의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태양 아래 인간의 삶의 헛됨을 탄식하는 이 표현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본문의 '학콜 하벨'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주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바로 '그 모든 것'이다.
여기서 '그 모든 것'이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세상과 인생을 의미한다.
결국 솔로몬은 단수, 복수로 제시된 허무에 해당하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진한 탄식을 내뱉은 후에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주어로 제시함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바라는 독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도무지 아무런 희망과 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강렬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1장 3절에 그 허무의 범위를 '태양 아래에서'로 제시하듯, '그 모든 것'의 영역에는 하느님과,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이 제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갈릴래아와 페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당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포레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더 발견되는데(사도 2,12; 5,24; 10,17 참조), 그때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매우 특별하고 기묘한 행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사실 헤로데를 그토록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죽었던 이가 되살아났다는 바로 그 소문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사실 내세의 존재와 의로운 생애에 대한 죽음 뒤의 보상(상선벌악)을 뜻하기에, 헤로데처럼 세상의 재물과 쾌락만을 탐닉하며 오늘만 사는 이는 커다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반복되는 세상사는 그저 인생의 권태로움과 무상함을 일깨워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냉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며 그분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을 이어 가는 가운데, 비로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8, 90년이며,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찰나와도 같겠지요.
감정과 소유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헤로데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와 무상함, 모순과 한계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7-9)
7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 하늘의 길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지적했던 요한을 죽인 헤로데~ 그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 왜요?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두려웠을 텐데~~~그러나 그 두려움 보다 자신의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하신, 또 하혈병 여인이 치유를 받고 죽은 소녀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능력의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나는? 헤로데처럼~ 내 뜻, 내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려 했다, 처음에는~~지금은 누군가 나에게 헤로데처럼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내가 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 하는지~~
오늘 바오로 사도의 기도로 확인 하고자 한다.
(에페3,14-21) 14 나는 아버지(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존재)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주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주님 마음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완전)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말씀)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하느님께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사도의 하늘의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닌~ 땅의 것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헤로데와 무엇이 다른가?
(마태6,7.9-10) 7그러니~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곧 세상의 것을 위한 기도는 ‘빈말기도’인 것이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느님의 뜻인 세상에서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다른 민족들처럼 주문 외우듯 하여 헛된 세상의 것을 위한 헛된, ‘빈말기도’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1,2-9)에서 알려주지 않는가?~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 땅의 모든 영광도 영원히 당의 것일 뿐, 인간의 모든 의로움도 영원한 흙으로 돌아갈 뿐, 하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 인간의 말로 , 듣고, 보는 모든 것이 구원을 주지 못하는 헛되고 헛된 것이기에~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처럼 예수님의 기도로 하늘을 담아야 새로운 것이 돼야 하는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로마5,21 8,1-4)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4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9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불러 갈릴래아 여러 고을로 파견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열두 제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어서 그들의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그 당시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던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 (B.C.4~A.D.39)에게 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미치면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풍문으로 인해 예수님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영주'에 해당하는 '테트라르케스'(tetrarches; tetrarch; the fourth-chief)는 분봉왕으로서 4분 영주(고대 로마의 한 주(州)의 4분의 1을 다스린 영주)나 작은 나라의 왕을 말한다.
헤로데 대왕이 10명의 부인이 있어서 자신의 배다른 왕자들에게 이스라엘의통치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9장 7~9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왕궁 안에서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두루 퍼져 나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당시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먼저 엘리야 예언자나 다른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 온다는 사상이 퍼져 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 대해서 이러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자신이 예전에 죽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복 동기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진언 때문에 그를 죽였으므로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일말의 양심이 있어 불안해졌고,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어했다고 본다.
2024년 09월 26일 목요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허무로다, 허무!”(코헬 1,2)로 시작되는 코헬렛은 때로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 책을 경전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색깔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았던 것처럼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그것도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삶은 꼭 그렇게 질서가 있지만은 않습니다.
노고에 반드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헬렛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합니다.
그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세상에 대한 밝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혜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코헬렛 1장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허무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또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루카9,7-9)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요한과 엘리야. 구약의 끝(마지막) 장, 절을 보면~
(말라3,23-24)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엘(하느님), 야(야훼). 야훼- “내 말을 네 말로 줄게(쓸께)”라는 뜻이다. 곧 모든 예언서, 문자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크고 두려운 날에 구원을 받는다 하심이다.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 마음을 돌리고 돌려 파멸을 내리치지 않으신단다. 곧 하느님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돌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돌려 파멸이 아닌, 구원을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돌려 구원하신다? - 구약의 인물들은 뱀의 선악의 유혹을 먹은 이후, 선악의 주관자로 하느님처럼의 자리에 앉아 하느님을 배반하여 하느님의 뜻, 마음, 말씀을 떠나 살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말라기서를 끝으로 말씀을 닫아 버리셨다. 하느님께서 자녀들에 대한 마음에서 ‘돌아섰다.’는 의미다. 그러면 남은 것은 파멸의 심판 뿐이다. 그런데 사랑의 하느님께서 그대로 자녀들을 버리실 수가 없으셨다. 당신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돌릴 용서가 필요하셨다.
그래서 구약을 닫으시기 직전, 마지막에 다시 구원하시기로, 곧 다시 구원의 말씀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400년후 신약이 열린다. 마태오복음을 시작으로~~, 곧 용서를 위한 속죄 제물로 죽으실 그리스도의 족보와 탄생(마태1장), 생명의 책이 열린 것이다.
(요한1,1.6-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한 처음- 빛, 물, 땅, 사람을 창조하신 말씀이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 엘리야로 온 세례자 요한이다. 이들의 예언을 예수께서 다 이루신다.(마태17,12-13)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 피조물은 빛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다시 오신 구원의 빛, 말씀이다.
10 그분(말씀)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구언, 뜻)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 하느님의 친 아들, 자녀라는 뜻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구원의 뜻인 하느님의 말씀이다. 곧 자녀(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아버지의 진노의 마음을 풀어드려 자녀들에게 마음을 돌리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죄됨을 깨닫게 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리게 하심으로, 하느님께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게 하시기 위해 기쁜 소식,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이 오신 것이다.
곧 파멸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자녀들, 모든 죄인들의 죄값을 치루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대신 죽으러 오신 것이다.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이루시려 오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새 계약- 예레31,31-34. 루가22,20 요한19,30- 히브10,15-22)
(에페2,13)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 그렇게 죄의 세상, 영원한 어둠속에서 받은 용서, 구원이다. 뱀이 약속한(창세, 루가4,6-7) 인간의 욕망, 의로움, 영광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죄로, 죄의 고난 속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분 앞에서 뱀이 약속한 세상의 것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 모두가 죄에 갇혀있다.
(갈라3,22-25)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제사와 윤리)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옛계약)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옛 계약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의 대속,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주신 것이다.
⁜사제께서 <헤로데가 확인하기를 원했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만나고 싶어 했던 당시의 예수님이, 한참 전성기의 예수님이셨다면, 정작 자신이 만났을 때의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예수님 이였습니다. 자신 앞에 죄인으로 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보이는 모습에 따라서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만남의 태도가 아닌, 한 인격체로 차별없이 만나는 마음가짐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모든 기적, 능력의 예수님과,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의 뜻을 위한 구원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이 아닌 죄의 대속으로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진리로, 구원자로 항구하게 믿었을 때, 하느님의 진노의 마음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1코린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깨달음과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천주의 성령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안식의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