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09일 수요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의 기도 (루카11,1-4)
제1독서<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갈라2,1-2.7-14)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화답송>시편117,1.2ㄱㄴ(◎마르16,15)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복음<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갈라2,1-2.7-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14)
'모든 사람 앞에서'
'앞에서' 에 해당하는 '앰프로스텐'(emprosten)는 부사 혹은 전치사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단어가 재판관이나 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마태27,11; 루카21,36; 사도18,17; 2코린5,10).
사도 바오로는 마치 검사가 피고의 죄목을 논고하듯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이민족처럼 살면서'에 해당하는 '에트니코스'(ethnikws)는 '이방인'을 뜻하는 '에트니코스'(ethnikos)에서 유래된 부사로서, '이방인같이'(like the Gentiles), '이방인의 방식을 따라'(after the manner of Gentiles)란 뜻이다.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에 해당하는 '유다이코스'(yudaikos) 역시 '유다인처럼', '유다인의 방식을 따라'란 뜻의 부사이다.
즉 '이민족처럼 살면서'라는 말은 율법을 수여받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매여 살던 베드로 당신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없던 이방인들처럼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의 옛 방식을 살지 않으면서'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할례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12절) 비겁하게 자리를 피함으로써, 그의 이방인을 향한 마음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결과적으로 그의 이 비겁한 행동은 위선이 되었으며, '억지로 이방인을 유다인답게 살게 하려'한 꼴이 되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사도 베드로의 이 행동을 놓고, 복음 선포자로서의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 일행의 예루살렘 사도회의 참석 및 사도 바오로의 이방인 사도직에 대한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공식 인정과 관련하여 보도하고 있는 2장 1절~10절에 이어서 2장 11절~14절은 사도 바오로가 사도 베드로 책망 사건 회상을 통해 율법주의적 잔재를 지적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은 그 구체적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사도 베드로가 사도 바오로가 사목하던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했을 때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사도 바오로가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 시점일 것이다.
책망의 사유는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 있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다인들을 피하였고, 그로 인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다인, 특히 바르나바까지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사도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한 데 대하여 책망하였던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매일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월요일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갈라티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의 서두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고정된 양식(1코린 1,4-9 참조)을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꽤 조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1,6).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갈라티아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한 이는 바오로였지만 그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 곧 할례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신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던 듯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닌 바오로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하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권위가 열두 사도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들에게 종속된다고 여기며 바오로를 폄하한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야말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갈라 2,16 참조).
바오로는 이 복음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1,11)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12), 곧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자 먼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변론합니다(1-2장 참조).
바로 어제와 오늘의 독서 말씀이지요.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회심 때 하느님께 직접 사도직을 받고 이를 한참 수행(修行)한 다음에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이는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께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직의 정당성은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진실성과도 바로 연결됩니다.
월등히 좋은 ‘새것’이 왔음에도 여전히 ‘옛것’에 미련을 두며 그 새로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익숙한 것에만 머무르며 편히 살려는 신앙인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며 늘 새롭게 자신을 성화하는 신앙인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의 기도
(루카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기도하셨을 때, 다른 복음에서는 집, 산으로 장소를 알려준다. 오늘은 어떤 곳이다.
주님의 기도는 부정 과거 완료 명령형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묵시1,8)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2a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 카이즘 구조로 나누어 있다.
A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 이름- 그분의 존재, 뜻. 하느님께서 만이 거룩하심을, 그 거룩함을 드러내시어 깨닫게 해 달라고~
B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아버지의 통치를 받게 해 달라고~(하느님나라의 통치는 섬김)
C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에피시우스(헬라어)- 위에 양식, 꼭 필요한 양식. 마헬(아람어)-내일, 다가올 날의 차원이 다른 양식. 곧 위에 것,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양식이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다. 하느님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날이다. 곧 영원한 생명(시간)을 위한 양식인 것이다.
B-1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 당시에 용서의 법이 모든 죄인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이다.(신명21,22) 그렇게 ‘용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라 하시는 것이다. 오늘 기도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기도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무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으로 대신 그 십자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 용서가 이루어지고 받는다. 그래서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기도를 하라 하시는 것이다.
A-1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그러니 십자가의 용서를 무시하는 우리의 힘, 의지로 용서하려는 그 유혹에 빠지지 말라 하시는 것이지요.
* 우리의 의지로 용서 하려는 노력은 우리를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용서할 수도,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용서를 얻지 못한다. 물론 사람이 ‘자기 의지로 용서 하려는 노력’ 해야 한다. 그래야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고, 모든 이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의 용서, 그 용서의 필연성,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다른 이도 용서 받았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나와 너, 우리의 용서(사랑)이다.
*성경은 샌드위치 빵 구조, 곧 카이즘 구조로 쓰여져 있다. 한 가운데 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히브리의 문학법 이란다. 오늘 주님의 기도 역시 그렇다.
A 와 A-1가 연결되고 B 와 B-1 가 그리고 가장 중심인 C 일용 할 양식이 남는다. 곧 하느님의 뜻, 말씀(율법)을 위에 양식(에페시우스), 내일의 양식(쎄메룸)으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에 것,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읽고 먹었을 때, 곧 말씀 양식으로 A 하느님(이름)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고 A-1 인간 스스로의 거룩,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고, 또한 그 위에 양식으로 B 아버지의 나라를 이 땅에서 부터 살 수 있는 곧 땅(흙)인 우리(나)에게 이루어지기를 B-1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그 용서의 삶으로 하늘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하늘의 생명을 구하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것이다.
*인간의 뜻을 위한 기도를 빈말 기도라 하셨다(마태6,7) 일용할 양식, 내일의 차원이 다른 양식, 말씀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체 또한 말씀으로 먹는 것, 요즈음 성체를 못 먹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십자가의 복음, 곧 구원의 새 계약, 그 말씀이 진리임을 모르고 먹는 파스카 제물, 그 성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니까~~
* 말씀이 구원의 양식이다.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 아멘.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루카11,1~4)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2ㄷ-4)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가 '아버지'인데,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 하느님 아버지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 Father)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아람어 '압바'(Abba; 마르14,36)를 번역한 것이다. 주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에서 창조주로서의 두려움과 엄위를 전제한 전능하신 하느님의 호칭 '엘로힘'과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며 계약에 충실하심을 보여 주는 고유 명사 '야훼'를 사용한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가 얼마나 긴밀하고 친근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제 나아가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친밀함이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며,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호칭 다음에 두 종류의 간구가 나온다.
하나는 하느님과 관련된 것이며(2절), 다른 하나는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3~4절).
하느님께 대한① 첫번째 간구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에서, '이름'에 해당하는 '오노마'(onoma; name)는 존재 자체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선하시고 공의로운 속성 등 그 이외의 모든 속성이 그 이름 안에 들어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거룩히 드러내시며'로 번역된 '하기아스테토'(hagiastheto; hallowed be)는 '거룩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 '하기아조'(hagiazo)의 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인데,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께서 공경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나타낸다(이사8,13; 29,23; 에제36,23).
말하자면,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이 '인간들에 의해서' 거룩해지기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하고 거역해서 범죄하는 대신에, 하느님을 경외하고 예배할 수 있는 상황과 기회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영광과 존귀와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②두번째 간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다. 여기서 '오게 하소서'로 번역된 '엘테토'(eltheto; come)는 '가다', '오다'를 뜻하는 '에르코마이'(erchomai)의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은 그 내용이 결과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열망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하여', '결과적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강한 욕구를 포함한다.
또한 '나라'로 번역된 '바실레이아'(basileia; kingdom)는 정관사 '헤'(he)와 같이 사용되어 '그 나라'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바실레이아'(basileia)라는 단어는 특정한 영토와 장소, 공간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의 통치와 지배, 다스림'을 의미하는 역동적 개념(reign; govern)이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으로서, 하느님께서 직접 왕이 되셔서 사탄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당신이 직접 다스리시는 그 마지막 종말의 때가 속히 올 것을 갈망하는 간구인 것이다(루카4,43; 마르9,1).
이제 기도의 내용 중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필요과 관련된 '일용할 양식'과 '죄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의 구원'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언급하신다.
①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에서 '일용할'로 번역된 '에피우시온' (epiusion; daily)은 '바로 오늘 필요한 것'과 '오는 날', 즉 '내일의 양식'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날마다'라는 '카트 헤메란'(kath hemeran; by day; each day)이라는 관용구를 사용해서 '일용할 양식'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그날그날의 실존적 삶에 필요한 실제적 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다'의 뜻인 '디도미'(didomi)가 현재 능동태 명령형인 '디두'(didu; give)로 사용되어 계속과 반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보아야 한다.
②인간의 필요를 구하는 두번째 간구는 '죄의 용서'에 관한 것이다. 새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가르'(gar; for)가 '왜냐하면 ~ 이기 때문에'라는 이유 부사절을 이끈다.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하려면, 전제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기도는 아무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잘못한'으로 번역된 '오페일론티'(opheilonti; that is indebted; who sins)는 '빚지다'는 의미를 가진 '오페일로'(opheilo)의 현재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죄도 용서해 주시고'라는 뜻이다.
당시 유대 풍습대로 빚을 진 사람들이 채권자의 노예가 되거나 옥에 가두거나 하지 말고, 탕감해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18,23~35).
이러한 사실은 '용서하오니'에 해당하는 '아피오멘'(aphiomen; we forgive)에도 잘 드러나는데, 이 단어는 현재 능동태로서 계속해서 용서할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③인간의 필요를 구하는 마지막 간구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이다.
'유혹'으로 번역된 '페이라스몬'(peirasmon; temptation)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eirasmos)는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유혹을 뜻한다(야고1,12; 1티모6,9).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믿음과 거룩함으로 벗어나 타락하도록 하는 외적, 내적 유혹거리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빠지지'에 해당하는 '에이세넹케스'(eisenehkes; lead)는 '들어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원형 '에이스페로'(eisphero)의 가정법 과거형이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달라'(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는 뜻이 된다.
한편, 마태오 복음 6장 13절에서는 '다만 악에서 구해주소서'라는 말이 주님의 기도 끝에 더 붙어 있다.
여기서 '악'으로 번역된 '투 포네루'(tu poneru; from evil; from the evil one)라는 단어는 중성으로 볼 수도 있고, 남성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성으로 보면 '악'(evil)은 추상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남성으로 보면 '악한 자'(evil one)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앞의 문장과 연관지어 보면, 우리로 하여금 유혹에 빠트리는 악한 자, 즉 마귀로부터 구하여 달라는 간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2024년 10월 09일 수요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기도를 아직 다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려면, 먼저 내 안에서부터 그 나라를 가로막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때로 우리에게 작은 겟세마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오도록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도 아버지의 나라를 바란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저에게”가 아니라) “저희에게”(11,3) 양식을 주시기를 청한다면 오늘 양식이 없는 이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어야 하고.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내일을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11,4)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 형제의 죄는 하느님께만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용서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자신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바치다 보니 쉽게 느껴지는 이 기도는 아직도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0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의 기도(祈禱)
복음(루카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성경은 다른 때와 달리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와 청하는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기도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제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도라는 의미다. 당시에는 시편을 외우는 것이 기도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한 구절씩 살펴보자.
먼저 ‘아버지“
= 전지전능하신 천지의 창조 주 하느님으로 나를 손수 빚어 태어나게 하신 친 아버지시다.(요한1,12-13참조)
(요한20,17)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기도 숫자를 기억하며~
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이름은 존재의 의미를 뜻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 말씀이 거룩하심을 손수 드러내 주셔야 피조물인 우리가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창조주의 존재, 거룩하신 뜻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깨달아 알고 믿도록 가르치실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셨던 것이다.(요한14,26 1코린2,9-10)
②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아버지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하느님 통치의 나라다. 곧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존재하는 이곳이 아버지의 나라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고 지탱하고 있다. (히브1,3)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본성(本性),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인 사랑, 그 영원한 사랑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다.(로마1,20참조) 그 하느님, 말씀으로 사랑을 담고 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요한1,14 루가17.21)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나라를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다.
③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사제께서 <오늘 주신 양식은 저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저희에게 주신 것이니, 앞으로는 혼자서만 독식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 공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하셨는데
인간의 양식 나눔은 인간의 도리지 신앙인의 기도가 아니다. 땅(세상)의 양식이 절대 아니다.(마태6,31~ 요한6,27참조) 말씀(매일복음)을 생명의 물, 영생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게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하심이다.
예(例); 본문 앞 절로(루가10,41-42)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예수님께서 하신일, 말씀 안에, 예수님께서 하신 “한 가지”를(요한7,21)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 의탁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생명,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길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요한14,6)
(아모8,11)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④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 모든 인간은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모두가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물에 씻어봐야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죄는 티도 흠도 없는 깨끗한 피로만 씻긴다.(히브9,22- 에페1,7. 2,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고, 용서 받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잘못한 이도 나처럼, 그리스도의 피(血)로 용서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 “저희도 용서 하오니,”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죄의 유혹이다. 곧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 처럼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해 말씀을 먹는 삶, 그 인본주의에 빠지지 않게 ‘허무의 삶을 살지 않게 해 달라’ 가도하라 하심이다. 곧 내 뜻을 들어주는 능력의 예수님이 아닌, 죄(罪)에서 구하시려 내 죄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히브리 문학법인 ‘카이즘 구조’, 곧 ‘샌드위치 공법’으로 다시 보면 ③에서 ①과 ⑤로, 그리고 ②와 ④로, 빵의 핵심인③.
③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 곧 복음 말씀 안에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생명, 진리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고, 입으면 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나’ ⑤ 유혹(육의 욕망)에 빠지지 않게 되고, 그것이 ② 아버지의 나라가 (내 안에)오신 것이며, ④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 모두 보호자 진리의 성령께서 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음 5절이하 빵 세 개, 곧 하늘3의 빵(말씀), 그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9절이하에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하시고~
(루가11,13)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주님의 기도는 성령을 청하고, 구하고, 두드려라, 하고 맺는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가능하기 때문이다.(1코린2,9-10)
(로마8,26)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 주님의 기도로 내 뜻, 소원, 욕망을 위해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면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15절 이하에서 올바른 기도, 올바른 말을 못하는 벙어리 이야기로 이어진다.
☨ 하느님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도록 날마다 의탁합니다. 깨닫고, 믿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