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좋은 몫 (루카10,38-42)

2024. 10. 4. 오전 11: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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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8일 화요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좋은 몫 (루카10,38-42)


   


1독서<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갈라1,13-24)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화답송>시편139,1-3.13-14ㄱㄴ.14-15(24)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복음<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10,38-42)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갈라1,13~24)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5~16)

 

'따로 뽑으시어' 에 해당하는 '아포리사스'(aphorisas)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는 '경계를 지어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동사로서 '갈라내다'(마태13,49), '분별하다'(마태25,32), '따로 세우다'(사도13,2)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목적으로(15절)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따로 세워 임명했음을 의미한다.

즉 이 단어에는 단순히 사도 바오로의 개인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택하심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하신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란 표현은 하느님의 선택이 사도 바오로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할 때,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루어진 신비한 것이며 불변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표현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녔던 소명 의식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된 표현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사49,1; 예레1,5).

즉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성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아드님을'로 번역된 '톤 퓌온 아오투'(ton phion autu)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그분의 신성(神性)이야말로 복음 선교의 주요 내용임을 드러낸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당신의 아드님을', 곧 '하느님의 아들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계시해주셨습니다'라고 번역한 '아포칼맆사이'(apokalypsai)의 원형 '아포칼맆토'(apokalypto)는 본래 '덮개를 벗기다', '베일에 가리거나 덮인 것을 열어젖히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이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구원과 관련하여 이런 의미에서 발전하여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대해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마태11,25; 루카10,21; 1코린14,30).

본문은 분명히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계시를 받은 사건(사도9,1~19)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는 '아포갈맆토'동사 대신에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지닌 '호라오'(horao)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1코린9,1; 15,8).

 '호라오'동사가 외적인 경험을 나타낸다면,  본문의 '아포갈맆토'는 내적인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때 내적 계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번역하면 '나는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로'로 번역된 '유테오스'(yutheos)는 '즉시'(immediately)라는 뜻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또 이방 선교 사명에 대한 명령을 받은 '직후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사람'이란 표현은 '살과 피로'(with flesh and blood)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피를 나눈 가족(혈육)을 지칭하기 보다는 피조물인 연약한 인간을 지칭한다(마태16,17; 히브2,14). 

즉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와마리아


(루카10,3​8-42)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오늘 또한 어제 묵상했듯이 율법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읽어 행위의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여자와 그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찾고자 들음의 신앙을 사는 여자의 이야기인 것, 사람의 규정과 교리의 신앙은 예수님께 다가가 사람의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기도)

그런 이들은 마르타 처럼 말씀에 열중하는 이들을, ‘활동에 열심 하지 않는다‘ 비난하며 싫어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말하면 개신교 신자 같다느니, 하고 있으니 언제부터 성경이 개신교의 것이 되었는지 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교회 다닌다’하면 개신교 신자로,~ ‘기독교 신자’라 해도 개신교로 듣는다. 그 만큼 우리 신자들은 성경의 단어와도 멀어져 있고 말씀도 모르고, 말하는 것도 어색해 한다.

그러니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보다, 3~40분 걸리는 미사를 제사로 드리는 그 종교 행위에 만족해 하고, 좋아해 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聖 예로니모)

그리스도를 모르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그래서 죄인인 내가 그분과 한몸이 되었다는 사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모른다면, 믿지 못한다면, 그래서 내 밖에 그리스도로 시중드는, 섬기는 그 신앙을 불의라 하신 것이다.(마태8,21-23참조)

어느 사제께서는 ‘성경보다 교리가 먼저’라고 여기 굿뉴스에 묵상글을 올려 신자들을 헛 갈리게 하시는데, 아무래도 '그분은 성경을 모른다'는 결론이다. 성경을 올바로 보셨다면 그런 묵상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신자들이 얼마나 있겠냐는 것이다. 대부분 사제의 글이라면 맹종으로 신자들은 그냥 ‘딸랑 딸랑’이니 말이다.

 

(신명12,28) 28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

= 말씀을 듣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 좋은,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묵상했듯, 말씀을 하느님의 눈(뜻, 지혜, 계명)으로 보고 듣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관점)으로 보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마르타 신앙이 된다는 것이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좋은 일, 옳은 일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일 한 가지 뿐인 것, 예수님께서 그 한 가지 일을 하셨을 뿐이라 하셨쟌은가(요한7,21)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하느님의 일은, 그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길(십자가)을 구원(생명)의 진리로 믿는 그 한 가지 뿐인 것이다.(요한6,29참조)

그러나 천주교나 개신교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기 위한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본당(창4동)의 경우 많은 단체, 심지어 취미 단체도 많지만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단체가 거의없다. 참으로 답답해서 주임사제께~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단체를 부탁드렸더니 사정상, 여건상 힘들다 하신다.(코로나19발생전에~) 하느님의 교회에서 그분의 말씀 공부가 다른 단체들(세상적)에게 밀려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말라1,10) 10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너희 손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으리라.

= 지금은 제사 드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감사의 잔치(미사-에우까리스티아-①용서하다 ② 감사하다 ③ 이해하다.)를 드릴 때인 것이다.(히브서10장참조)


(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십자가)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 ! 오늘 같은 날에 주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고, 이웃과 매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매일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자매 가운데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보이십니까?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칭송을 받지만, 사실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그녀의 언니 마르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마르타가 겪는 마음의 동요와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여기서 ‘분주함’이란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움직인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이 흩어지고 어지러운 상태도 포함합니다.

 

사실 마르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그분을 집에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귀한 손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만 하였고, 마르타가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속 편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 철없는 동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언니 입장에서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참다못한 마르타는 동생이 자신을 거들게 해 주십사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언니가 동생에게 직접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큰 결례이지요.

그러나 마음이 복잡해진 마르타는 그런 요청이 실례가 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초대되신 예수님께서 사소한 집안싸움의 중재자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질투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을 비추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그분 말씀이 듣고 싶어서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동생이 말씀을 들을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그런 옹졸함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리지 못할 바에는 남도 누리지 못하길 바라는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7주간 월/화요일] 묶어서

좋은 몫을 빼앗기지 말자.

복음(루카10,25-42)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 문자 그대로 율법(제사와 윤리)으로 읽었느냐? 율법의 실체인 진리로 읽었느냐? 다시- 인간의 의로움을 위한 율법으로?, 하늘의 대속으로 거저 받는 의로움, 그 은총(은혜)의 복음으로 읽었느냐? 물으신 것이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그렇게 하여라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마음, 정신, 힘,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면 당연히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야고보서(2,8-10)는 말한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 이웃을,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 말씀으로~

3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 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요한10,8)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진리이신 예수님 이전의 율법 자들이 도둑이며 강도들이라 하신 것이다, 곧 율법(제사와 윤리)을 열심히 지킨 그 인간의 의로움을 지켜라 강조하여, 율법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그 진리를 헛되게 하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는 하늘의 의로움을 받지 못하도록 빼앗아 버리는 도둑이며 강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이 옷(의로움의 옷)을 빼앗긴 것이고, 그것이 죽음의 상태인 ‘초 주검’인 것이다.

 

(1코린15,56) 56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로마3,20)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자신을 돌아보라고, 알아들으라고 비유로 생명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 자들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나빠서, 못되서가 아니라 율법은 그 초주검의 사람을 도울 방법(길)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스폴랑코니조마임- 자비),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을 비유한 사마리아인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기름- 성령. 포도주- 계약의 피. 율법, 그 옛 계약으로는 돌볼 수 없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피(血)다.

 

(마태26,28) (성찬례) 28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두 데나리온- 신. 구약을 뜻하는 것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얻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곧 하늘의 영원한 생명,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

 

(요한5,39)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로마3,24) 24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요한4,9)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앞 28절에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마음, 정신, 힘,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람 하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타의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으로 다가오신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받아라’다. ‘너도 그렇게 하여라. 받아라.’ 하신 말씀이다.

 

(1요한3,18) 18 자녀 여러분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 그리스도의 진리의 자비, 사랑을 먼저 받아야 그 구원의 자비, 사랑을 이웃에게 주어 이웃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자비,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이웃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 마음 까지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결과인 것이다. 나는 그 이웃 사랑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하늘의 자비, 사랑을 더욱 깨달으려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

 

결론<책-황금률 중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기에 앞서, 우선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을 만났기에 생명을 구했듯이 너도 사마리아인을 만나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또 율법(제사와 윤리)주의 신앙을 열심히 하면 천국(天國)간다고 여기는 열심신자 일수록 초주검의 과정을 통해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려는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참뜻이다. -이상-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사마리아인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돌보심, 곧 그분의 기름(성령), 포도주(새 계약의 피)를 깨닫기 위한 신앙이 아닌 자신의 소망, 뜻, 의로움을 위해 그분을 섬기려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마르타이다.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마리아는 예수님의 영, 새 계약을 얻기 위해 말씀을 열심히 듣는다.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르타 처럼 섬기는 신앙을 말하면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는 곧 하느님의 은총, 은혜로 거저받는 신앙(信仰)을 말하면 싫어한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로 깨달아야 하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해야한다고 하면 싫어한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한다’고 핍박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필요한 그 한 가지, 그 몫을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 ‘다가가’ -  34절에서 처럼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면 하느님의 뜻인 용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마르13,1- 외 다수) 그러나 마르타 처럼 인간이 예수님께 다가가면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불만, 불법, 불의가 된다. (마태26,49와 다수) 그래서 성경은 34절에 ‘다가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40절의 ‘다가가는 마르타’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 즈카리야의 노래중~

(루가1,68-69. 78-79)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인간은 구원자를 찾아갈 수가 없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자께서 다가와 주시는 것이다. 다만, 다가와 주시는 그 그리스도를 율법으로 섬기느냐?, 다 이루어진 진리로 깨닫느냐? 그것이 문제다.

 

☨ 보호자 성령님! 저희 모두가 좋은 몫인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이 다가오시어 기르치시고 의탁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0,38-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

 

루카 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앞의 10장 25~37절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루카 복음 10장 27절에서 언급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보기를 역순으로 하나씩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의 교훈은 '이웃 사랑의 모델'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느님 사랑의 모델'은 '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대의 랍비의 문헌들은 여자들을 탐욕스럽고 호기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며 수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여,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은 '불신자나 야만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예수님 당대의 여자들은 그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과 이야기하고'(요한4,27), '여자들을 가르치고'(루카10,39), 그리고 '병든 여자를 치유하기도'(루카13,10; 마르1,31)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버림받고 소외받은 대표적 계층인 여자들을 수용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남녀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루카19,10).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타라는 여자가'에 해당하는 '귀네 데 티스 오노마티 마르타'(gyne de tis onomati Martha; a woman named Martha)에서 '여주인'이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여성형 고유명사 외에 '한 여자'에 해당하는 '티스'(tis; certain)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gyne; a woman)는 처녀든, 기혼이든, 그리고 과부든 모든 연령 계층의 여자를 일컬들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루카는 '한 여자'라는 기록을 첨가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0장 39절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앉아'에 해당하는 '파라카테스테이사'(parakathestheisa; sat)는 '옆에 놓다'를 뜻하는 '파라카티죠'(parakathizo)의 수동태 분사이다.  

수동태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발치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말씀을 들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은 당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즉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당대의 통념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여인들의 지위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인 하느님의 말씀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 민족 등의 모든 구분과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전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되는 '에쿠엔'(ekuen; and heard; listening)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kuo)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마리아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루카 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분주하였다'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periespato; was distracted; was cumbered)의 원형 '페리스파오'(perispao)는 '둘레',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 '당기다'를 뜻하는 동사 '스파오'(spao)의 합성어로서,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마르타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분주하고 들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10장 41절과 42절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마르타는 음식 준비도 하면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즉 마르타의 마음은 현재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신경을 뺴앗겼던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40절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의 말 속에는 음식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혼자서 편안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 얄미운 심정이 들어 있다.

마르타의 이러한 요청의 뉘앙스는 몹시 바쁜 와중에 있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과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연민을 품은 애정 가지고(반복된 호칭의 의미), 마르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여기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에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메림나스'(merimnas; you are orried; you are careful)는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마르타는 음식을 무엇을 준비할까, 좌석배치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지금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걱정하는구나'로 번역된 '토뤼바제'(thorybaze; upset; troubled)도 '어수선하다', '어지럽다'를 뜻하는 '토뤼바조마이'(thorybazomai)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서, 음식 준비로 인해 분주하고 어수선한 마르타의 심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택한, 말씀 경청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당시 마르타가 했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주도록 일러달라는 마르타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선택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has chosen)은 항상 중간태로만 사용되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마이' (eklegomai)의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혹은 '그녀 자신을 선택했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에는 마리아가 '좋은 몫'('아가텐 메리다'; 'agathen merida'; what is better; good part)을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파이레테세타이'(uk aphairethesetai; will not be taken away)는 부정어 '우크'(uk; not)와 '제거하다', '가져가 버리다'의 뜻을 지닌 '아파이레오'(aphaireo)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 나란히 쓰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타의 항의조가 담긴 요청이나 예수님의 권고로 인해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몫을 선택하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타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0241008일 화요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자신이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마르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사시는 동안은 당신께 음식을 마련하여 드릴 사람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천국에는 마르타가 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하지만, 현세의 삶에는 어제 복음에 나왔던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먼저 나의 일상생활을 해결하는 것부터 적지 않은 근심거리입니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부러워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면 마르타의 일도 좋은 몫입니다. 전에 어떤 곳에서 방 이름을 정하는데 제가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마르타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큰 특전이 아니었을까요?

마르타는 스스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는,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잊은 듯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바쁘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그를 예수님과 긴밀히 결합하여 줍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는다면, 우리 집을 찾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좋은 몫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고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그때는 세상의 무수한 마르타들도 수고를 멈추고 빼앗기지 않을”(루카 10,42) 몫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 음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08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나의 열심은 믿음을 낳지 못했다.

 

복음(루카10,37-42)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율법의 섬김은 진리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고자비를 베풀지도 않았음으로, ‘율법 교사야 가서 너도 사마리안의 이웃으로그 자비를 받아라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그 그리스도의 자비를 먼저 받아야 그 그리스도의 자비를 이웃에게 전해이웃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다.’까지 공부했다.

그러나 그 주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먼저 자신이 자비를 베풀기 위한 율법의 사람과말씀을 알아듣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얻기 위한 사람곧 진리의 길을 벗어난 율법의 섬김의 길과진리의 길을 걷기 위한 깨달음의 길그 두 길을 두 여자의 모습으로다른 관점으로 오늘 말씀하신다.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말씀과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는 여자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율법(제사와 윤리)의 시중, 섬김은 ‘깨닫고자 말씀에 머무는 꼴’을 못 본다. 열심히 본당활동하시는 교우가 말한다. ‘성경을 안다면서 왜 본당에서 활동은 안 하십니까?’

 “성경을 알기에 안합니다.”라고 답한다.(로마10,1-3 에페2,9-10)

말씀을 깨닫기 위해, 믿음을 낳기 위해, 곧 묵상글을 쓰기 위해, 말씀을 보고,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반복, 반복한다. 다른 분의 글, 강의를 찾아서 기본 4시간, 그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사도가 그랬듯이, 나에게도 산고의 시간이다. 나 또한 외롭지 않게 교우들과 함께 말씀으로 시중드는, 섬기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본당에 말씀을 위한, 깨닫고 믿기 위한 단체가 없다. 그래서 못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레지오 1~2시간, 성령기도회 2~3시간, 그리고 매일 미사 1시간, 그 본당에서의 시간, 활동은 편했고 쉬웠다. 외롭지도, 산고의 시간도 없었다. 모임이 끝나면 교우들과 함께 식사, 커피타임, 등 인간애로 즐겁고 재미있었다. 열심한 신자라는 자부심과 뿌듯함도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나의 열심은 믿음을 낳지 못했다. 마르타처럼 염려와 걱정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 율법의 섬김은 믿음과 상관이 없기에 열심 할수록 염려와 걱정은 그대로 남는다.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 예수님께서 하신 ‘한 가지’일을 믿는 것이다.(요한7,21) 곧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당신의 의로움을 전가 시켜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요한6,29)

어느날 폭풍갈은 시련이 왔고 고통에 시달렸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죄 의식 이었다. 형제, 친구, 교우, 그리고 사제들을 찾아 간절히 바랬지만 도와주지 못했다. 아니 도와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모두 진리의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렸다. 말씀에 머무르며 살았다. 그리고 깨달음과 믿음으로 자유하게 되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섬겨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알았다. ‘사랑은 받는 것, 하느님의 사랑을~’ 수시로 변하고 변질되는 인간의 감정,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말씀으로 섬겨 살려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회개란 반성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에서 ‘하느님의 의(義)를 위한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삶으로 돌아서는 것(유턴)이 회개라는 것.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폭풍같은 시련이, 그리고 내 안에 죄가, 말씀으로, 믿음으로, 자유로, 이끌었던 하느님의 은총, 은혜, 관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살게 되었다.

 

(로마5,20-21)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3,24-26)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 지금, 이 시대는, 제사와 윤리, 교리를 열심히 지킨 그 인간의 행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열심,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 그 십자가의 의(義)를 진리로 믿기 위한, 깨달음을 위한 신앙을 살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 

날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 욕망을 위한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더욱 그렇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종입니다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게 하시소말씀을 깨닫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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