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바리사이들아! (루카11,42-46)
제1독서<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5,18-25)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20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21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화답송>시편1,1-2.3.4와 6(◎요한8,12) ◎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2-4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갈라5,18-25)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22~23)
갈라티아서 5장 22절의 '열매는'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os; fruit)는 성령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와는 구별되는 말인데, 성령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이 인간 안에 작용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을 9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롭게 된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마땅히 드러내고 추구해야 할 덕목인 것이다.
갈라티아서 5장 19절의 '육의 행실'에서 '행실'에 해당하는 '에르가'(erga)가 복수형으로 쓰인 것에 반해, '성령의 열매'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카르포스' (karpos)는 단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주어진 은혜들이 그 자체로서 통일성과 완전성을 지니고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 love)는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한다(요한3,16; 로마5,8). 따라서 여기서 '아가페'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처럼 우리도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 13장에서 사랑의 진리를 장엄하게 외치고 있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1티모1,5).
② '기쁨'을 뜻하는 '카라'(chara; joy)는 저급한 인간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 오는 순간적이며 육적인 기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기쁜 마음을 의미한다(로마14,17; 15,13).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을 말한다.
③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이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화해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느님과의 평화를 말한다(로마5,1).
이러한 평화가 우리 자신의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의 상호 의존성은 코린토 2서 13장 11절과 콜로사이서 3장 14절과 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 속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그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면(필리4,7), 우리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도 평화가 충만하게 된다.
④ '인내'에 해당하는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 patience)는 '길다'라는 의미의 형용사 '마크로스'(makros)와 '마음', '감정'을 뜻하는 '튀모스'(thymos)의 합성어로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계속하여 참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관용할 줄 아는 성품을 뜻하는 말이며,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 (로마2,4; 1베드3,20)에 근거를 두고 있다.
⑤ '호의'를 뜻하는 '크레스토테스'(chrestotes; kindness)는 '친절한 성품',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려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의 자비하심, 곧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친절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루카11,27; 에페2,7). 성령의 열매로서의 '호의'는 이러한 하느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⑥ '선의'를 뜻하는 '아가토쉬네'(agathosyne; goodness)는 선한 성품과 행동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적인 선을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되고 있다(로마15,14; 갈라5,22; 에페5,9; 2테살1,11).
⑦ '성실'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 faithfulness)는 신약에서 '믿음'(마태8,10)이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믿음'으로 번역된 이유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나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미덕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이나 '충성'보다는 '성실함'이나 '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충성'은 수직적이고 상하 관계의 뉘앙스가 있다. '성실'이나 '신실함'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자질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하면 좋다.
⑧ '온유'에 해당하는 '프라우테스'(prautes; gentleness)는 이웃을 향한 윤리적 관용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하는 자에 대해 위협적인 보복으로 분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며(2티모2,25), '폭력'의 반대말이다.
⑨ '절제'에 해당하는 '엥크라테이아'(engkrateia; self-control)는 하느님을 향한 것도 타인을 향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한 미덕이다.
이 말은 특히 갈라티아서 5장 19절에 언급된 성적인 문제들에 있어서의 절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막는'에 해당하는 '카타'(kata; against)는 '~에 반하는', '거스르는', '~에 대항하는' 이란 뜻을 지닌 전치사이다.
그리고 '법'에 해당하는 '노모스'(nomos; law)는 '율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 곧 '성령의 열매'를 거스려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율법'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결코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며(갈라5,18), 오히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맺어진 이러한 덕목들은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기 때문이다(갈라5,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매일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당대 유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십일조의 세세한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에는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그 규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구현해 내야 할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회당이나 잔치에서는 언제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즐기며 언제나 높은 사람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신을 봉분 없이 평평하게 매장하고서 어떤 표식도 해 놓지 않은 그런 무덤을 뜻하는데,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거나 접촉한 유다인들이 결국 부정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민수 19,16 참조).
성화의 직무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더러움으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서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 받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서, 정작 사람들이 그 규정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도움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판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갈구하며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구, 계명이나 규정의 본질을 망각한 채 형식적 준수만을 강조하는 태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 경건함을 가장하는 태도,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의 고충과 힘겨움을 외면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만일 이런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신 그들 못지않게 우리 또한 매우 불행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말씀, 그 사랑에 머무르는 신앙(信仰)인가?
복음 (루카11,42-46)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 자기 이름, 자기 의(義)를 위한 온갖 종교 행위를 하면서 성경 말씀 안에 들어있는 당신 외아들(獨生子)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그리고는 영원한 용서, 하늘의 생명을 약속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의지하지 않는 것, 개의치 않는 것, 큰 불행이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의 용서, 생명을 현세에서부터 살게 하신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유다1,21) 2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 ‘깨달으시오, 낳으시오’다 * ‘종교 행위를 얼마나 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지켜주신다. 그러니 성경(聖經)을 모르고는, 나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 나를 지킬 수가 없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사제들뿐만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사는 이들은 신자들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대접(칭찬, 섬김, 칭찬)을 받으려 하면 안 된다.
(1요한3,16-17)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 재물을 나누어 받는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용서,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에, 받았기에 목숨인 재물(마음)을 나누는, 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목숨과 생각, 정신, 힘을 다하여 사랑한 결과(열매)인 것이다.
(1요한2,5) 5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사랑)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 그러나 잘 안되기에 기도하는 것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 온갖 종교 행위로 자신의 뜻(이름)을 빛낸 그 모든 것의 결과가 땅속(무덤)에 묻힐 뿐인 영원한 죽음이라는 말씀인데, 곧 그 자기의 뜻(이름)을 위한 의(義), 착한 행위로 그리스도의 대속, 그 구원의 사랑으로 거저 받는 의로움을 받지 못하도록,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로마3,24- 참조)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 지도자들 자신에게 하신 말씀임을 알아듣지 못한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7,7-9)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티토1,14) 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성사, 전례 행위가 중요하다고, 지키라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계명으로 주면서.... 그렇게 배웠다. 성당을 다니면서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 은혜의 말씀보다 성사(聖事), 전례(典禮)행위의 중요성만 배웠다.
너무 힘들고 아파, 찾았을 때 오히려 ‘무거운 짐’만 지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매달렸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만났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고서 ‘무거운 짐’같은 신앙에서 자유로와 졌다.
그리고 나와 같이 하느님 사랑을 몰라, 무거운 짐 같은 신앙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과 하느님의 사랑(말씀)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이들보다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더 많다. 이상한 소리 한다고 핍박하며 자신의 의(義), 뜻을 위한 열심을 더 부린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을 미리 알려 주셨기에 핍박을 받아들이고 있다.
(요한15,18)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마르8,35)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1코린15,1-2)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 계명인 복음을 인간들의 계명에 잃지 않고 받는 구원이다. 그것이 말씀(복음)을 지키는 실행이다.
(야고1,25)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복음)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2요한1,7-11)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잃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10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 이 가르침을 내놓지 않으면, 그를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인사하지도 마십시오. 11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의 나쁜 행실에 동참하게 됩니다.
☨ 보호자 성령님! 헛된 사람의 교리와 규정, 계명(티토1,14) 그리고 그릇되다 하신 세상의 죄, 의, 그 심판에 잃지 않고(요한16,8) 늘~ 말씀(복음)안에 머물게(지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복음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나와 이웃과 나누는 큰 계명을 실천하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42-46)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46)
루카 복음 11장 46절은 율법 교사들이 저주를 받는 세 가지 이유중에 첫번째 이유이다.
그들은 자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옥,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지 않는 파렴치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힘겨운 짐', '지기 어려운 짐'은 무엇인가?
이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원로들의 전통과 율법 교사들의 해석을 가리킨다.
그들은 심지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 대한 십일조 규정을 세부적으로 제정했고(루카11,42), 그 결과로 당대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기 위해 땔감까지도 계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여겼고(루카11,37), 하지만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었고 복잡하여 일반 사람들이 일일이 암기해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부담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태23,3).
여기서 '대다'에 해당하는 '프로습사우에테'(prospsauete; touch)는 가볍게 만지거나 살짝 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현재 직설법의 형태로 부정어 '우'(u; not)과 함께 쓰여, 마치 무거운 짐에 손가락 하나 살짝 건드리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율법 교사들의 파렴치한 악행이 관행처럼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이러한 모순되고 불의한 모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율법 교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의무를 무겁게 부과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율법 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그들은 그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결코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결코 쉽지도 않다는 것이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어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기 육[이나] 그 욕정과 욕망”(갈라 5,24)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길로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직 해방되지 않았고 아직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불륜이나 방탕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면, 적개심이나 시기가 일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기심을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율법에 매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방종한 상태에 있을 뿐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없거나, 어떤 상황 때문에 기뻐할 수 없거나, 다른 무엇 때문에 평화를 잃는다면 아직도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 육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성령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5,22)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자리하시면 이러한 열매들이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답송에서 말하듯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을 압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舊約은 新約으로 반드시 完成 되어야.
복음(루카11,42-46)
42ㄱ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 향(香)의 원료는 제사용 채소들이다.(탈출30,34참조)
42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 겉으로 드러나는 제사는 드리면서, 속(내면)을 위한 진리는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앞39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으로 자신의 소원, 의(義)를 위한 신앙을 살 뿐,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거저 받는 하늘의 생명, 용서, 의로움에는 관심이 없었음이다.(로마10,1-4참조)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회당, 장터, 곧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인정(대접)받기를 좋아 했음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혐오하신다.(루가16,15)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 자기 의로움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의(義)다. (에페5,12-13참조) 인간의 의(義)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 허무요 위선(거짓)일 뿐이다.(이사57,12 64,5참조)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율법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로마3,20) 그래서 그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구원의 진리로 믿어 그분의 의(義)를 전가 받아 ‘구원에 이르라.’고 주신 것이다.(갈라3,24)
그러나 율법교사, 신학자들은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켜 세상 복도 받고, 그 열심한 종교행위의 자가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라고 가르쳤기에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것이 ‘학자들,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았다.’ 하신 말씀의 진의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육의 행실, 곧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이라는 것이다.(이사64,5 개짐 ☞더러운 걸레)
그리고 *십일조☞ 십일조는 땅의 것, 인간의 열심, 의로움, 돈이 아니다.(요한6,27 마태6,33-34참조) 십일조는 하늘의 양식, 재물인 하느님의 열심, 의로움, 말씀이다.
(말라3.10) 10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요한4,34)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더러운 죄인들의 구원인 ‘아버지의 뜻, 말씀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완수하시고, 곧 하늘의 양식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심’이 우리의 십일조로 드려지심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가 주님께서 이루신 양식,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늘의 복, 생명을 넘치도록 받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하셨나?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前), 곧 십일조로 드려지시기 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내는 헌금은 십일조가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자비, 크신 사랑에 감사로 우리의 목숨과도 같은 돈을 정성으로 내는 것이다.
그 헌금이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사용이 되도록, 곧 이방인 뿐만 아니라 영적 고아, 과부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주어 하늘의 생명을 받게 하는 것, 그것이 신명기 14장에서 말씀하신 십일조 안에 감추어진 진의다.
구약에 머물면 모든 것이 헛 것이 된다. 구약은 신약으로 반드시 완성 되어야 한다.
독서(갈라5,22-25)
22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 직역하면 성령이 주는 열매다. 곧 육의 행실 위에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덧입는 것이다. 죽을 것을 생명이 삼키도록 말이다. (2코린5,4)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십일조로 드려지셨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러운 걸레’임을 깨달아야 한다. 곧 자기 버림, 자기 부인의 삶, 신앙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보호자 성령께서 영원토록 이끄신다.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 곧 믿고, 의탁하는, 갈망하는 것이다.
☨ 영원한 보호자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는 성령님의 성전입니다. 저희가 성령님의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를 입고 있음입니다. 육의 더러움, 죽을 행실을 계속 삼키고 계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심입니다.(로마8,10) 깨닫고 믿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봉헌,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