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간 월요일]성령(요한14,21-26)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내려왔다며 두 사도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자, 사도들은 자신들도 군중과 똑같은 사람이라며 이를 말린다. (사도 14,5-18)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4,5~1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10)
사도행전 14장 6~7절에서는 이코니온에서 리카오니아 지방으로 온 사도 바오로 일행이 계속적으로 복음 전파 활동에 힘썼음을 포괄적으로 기록하였다. 사도행전 14장 8~18절에서는 리스트라에서의 선교 활동 중에 일어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치유 기적과, 그와 관련하여 리스트라인들이 두 사도를 신(神)으로 숭배하려고 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저자가 리스트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일어난 하나의 에피소드과 같은 사건을 이처럼 길게 다룬 것은 이 사건이 리스트라에서의 바오로 일행의 복음 전파 활동이 얼마나 역동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심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파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4장 8절에는 리스트라에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만난 하반신 마비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서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라는 이러한 중복적 표현은 본래 직업이 의사였던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전혀 걸을 가능성이 없는 그사람의 상태를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람을 '두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라는 말 한 마디로 완치시켜 주는데,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앉아 있는 하반신 마비자를 완치시킨 것(사도3,1~10)과 평행을 이루는 사건이다.
사도행전 저자가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오로가 사도 베드로와 동일한 기적을 일으킨 사실을 통해 그가 열 두 사도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는 사도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사도 바오로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으며, 그의 사도됨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유심히 바라본'으로 번역된 '아테니사스'(atenisas)는 '눈을 고정시켜'라는 의미로서, 아름다운 성전 문 곁에서 앉은뱅이를 바라보았던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에게도 쓰였던 단어이다(사도3,4).
그러나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있던 앉은뱅이는 동전 한 푼 구걸할 수 있을까하여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쳐다 보았지만(사도3,5), 리스트라의 앉은뱅이는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선교에 이끌려(9ㄱ) 그를 주목하고 있었으며, 사도 바오로도 그러한 그에게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무엇인가? 첫째, 그 앉은뱅이가 자신의 하반신 장애를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둘째, 그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은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구원받을 만한'으로 번역된 '소테나이'(sothenai)의 원형 '소조'(sozo)는 육체의 치유(마르6,56)와 영혼의 구원(마태1,21)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둘 다 해당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리스트라의 선교 현장에서 주변에 많은 사람을 청중으로 두고서 사도 바오로가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을 추측해 보면, 후자(영혼의 구원)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앉은뱅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사도13,38.39)을 듣고, 자기와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도 바오로는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진 앉은뱅이에게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성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0)
그런데 이러한 치유의 순간에 사도 바오로는 의술이나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가 다가가 앉은뱅이의 다리를 한 동안 주물렀다거나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는 묘사가 전혀없다. 오직 '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라'는 한 마디 말만 사용하였다. 이것은 치유의 근원이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이 기적을 주위 사람들도 보게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가 믿는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을 복음 전파의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다리가 오그라져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오로는 '똑바로'에 해당하는 '오르토스'(orthos; uprightly; straghtly; 일직선으로 곧게)라는 말과 '일어서라'에 해당하는 '아나스테티'(anastethi'; stand)라고 명령을 하는데, 이것은 그에게 어이가 없어 보이는 명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순종하였고, 그 결과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벌떡 일어날 뿐만 아니라 걷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기적은 많은 경우에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에 의하여 일어난다.
'벌떡 일어나'로 번역된 '할라또'(halato)의 원형 '할로마이'(hallomai)는 '솟아 오르다', '뛰어 오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한4,14; 사도3,2), 사도 바오로의 명령을 들은 그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마치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 일어섰음을 나타낸다.
'걷기 시작하였다'로 번역된 '페리에파테이'(periepatei)는 계속되는 행동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데, 이것은 일어선 그가 감격에 겨워 자기 주변을 이리저리 연신 걸어다녔던 것을 나타내며, 그 치유가 일시적이거나 속임수가 아닌 완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나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11~14)
리카오니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사도 바오로는 다른 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당시 국제적 언어인 그리스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너무나 놀랐기 때문데 자기도 모르게 출신 지역 사투리로 말했던 것이다.
'신들이 사람이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로 번역된 '호모이오텐데스 안드로포이스'(homoiothentes anthropois)에서 '호모이오텐테스'의 원형 '호모이오오'(homoioo)는 '유사하게 하다', '같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므로 '유사하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의 외모와 유사한 신(神)들이 내려왔다는 말이다.
말 한마디로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완치시키는 일을 보면서 리스트라 사람들은 전설로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가 그들 눈 앞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즉 리스트라 지역에서는 그리스의 주신(主神)인 제우스(Zeus)와 그의 전령신(神)인 헤르메스(Hermes)가 과거에 사람의 모양으로 그곳에 방문하였지만,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자 그들을 홍수로 멸망시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었다.
그 전설이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신(神)들 중 최고의 신(神)이며, 로마 신화의 쥬피터(Jupiter)에 해당한다.
리스트라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른 것은 그의 외모가 사도 바오로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사도 바오로에 비해 많고 사도 바오로 뒤에서 말없이 묵묵히 서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리스트라 사람들은 사도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이 신은 제우스의 신탁을 받아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신이었으며 로마 신화의 머큐리(Mercury)에 해당한다.
그들이 사도 바오로를 웅변과 연설의 神이기도 한 헤르메스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군중 사이에서 탁월한 말 솜씨로 연설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13)
'황소'로 번역된 '타우루스'(taurus)는 '몇 마리의 소들'을 가리키며 '화환'으로 번역된 '스템마타'(stemmata)는 제사를 드릴 때 희생 제물 위에 놓는 띠로서 꽃으로 만든 화환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문' 즉 '퓔로나스'(pylonas)는 리스트라성(城)의 문을 말한다. 고대 성읍에는 성문 주위에 넓은 광장이 있었고 여기서 대중 집회나 교역이 이루어졌다.
리스트라 사람들이 사람의 모습을 한 사도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쉽게 神으로 단정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神들이 모두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신(神)들은 유다인들이 믿었던 하느님과는 달리 제한된 공간 속에 인간과 동일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유한한 신(神)들이었던 것이다.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14)
여기서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근심과 슬픔을 표시하는 유대적 관습이며 주로 개인적인 슬픔 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 크나큰 죄가 되는 일을 목도했을때 취하는 행동이다(욥1,20; 마태27,65).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는 리스트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신(神)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느꼈다.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진정한 신(神)이신 하느님 대전에서 신성 모독적인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4,21~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6)
요한 복음 14장 26절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역할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중요한 말씀이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에 해당하는 '판타'(panta; all things)을 가르치실 것이다.
'가르치시고'에 해당하는 '디닥세이'(didaksei; will teach)는 '디다스코'(didasko)의 미래 시제로서, 미래에 성령께서 계속해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교사로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를 언제든지 하느님의 완전한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1코린2,10).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내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갈라5,22,23).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의 감화나 감동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일깨워 알게 하시는 것은 물론, 주의와 경고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1테살5,19).
둘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계속 기억시키신다.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에 해당되는 '휘폼네세이'(hypomnesei; will remind)는 '휘포밈네스코'(hypomimnesko)의 미래 시제로서 '계속해서 회상시키실 것이다', '계속해서 깨우치실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 땅에 남아 있어 구원의 길을 보여줄 것이며,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활동임을 보여 준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특히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당시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밝히 깨달았음을 기억하여, 초대 교회 신도들도 성령의 역사(役事)에 힘입어 말씀의 의미를 밝히 알게 된다는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타자를 향해 행동하고, 자신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관심에 공감하며, 하나의 목적에 도달하려는 열정을 일으킬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와 능력이 모두 예수님에게서 왔음을 확신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켰을 때,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던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사람 모습으로 내려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두 사도를 신으로 모시려는 우매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헛된 우상에 빠진 이들을 질책하며 자신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상대방의 생각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족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상대와 나누는 사랑의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려고 더 멀리 보고, 더 진지하게 들으며, 더 소중하게 상대를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짧은 시간이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