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수요일]아버지의 뜻(요한 6,35-40)

2018. 4. 18. 오전 6: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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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수요일]아버지의 뜻(요한 6,35-40)

2010. 4 .21.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요한 6,35-40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아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지고,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하는데,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사도 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그분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8,1ㄴ-8)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3)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4)


원문에 '사울'로 번역된 '사울로스'(saulos)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회심하기 전 사울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모습을 강조하여 그 이후의 헌신적인 사울의 모습과 대조시키기 위한 기교적 표현이다. 

여기서 '없애 버리려고'로 번역된 '엘뤼마이네토'(ellymaineto)'황폐하게 하다', '망하게 하다', '학대하다' 등으로 번역되는 '뤼마이노마이'(lymainomai)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 단어는 멧돼지가 밭에 들어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묘사할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잠언 18장 9절에 '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파괴자의 형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못쓰게 만들다', '철저히 파괴하다', 비유적으로 '사람을 망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사울은 매우 강렬한 기세로 그리스도교를 계속 핍박하려고 덤볐던 것이다. 

사울의 의도는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는 것이었으며, 그 양상은  그리스도교를 짓밟고 못쓰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울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고 박해하여도,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결코 진멸되거나 말살되지 않았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역사 및 교회사를 통해 여실이 증명되고 있다.


한편, 사울이 박해의 대상으로 삼은 자는 '남자든 여자든'으로 표현된 '안드라스 카이 귀나이카스'(andras kai gynaikas)이다. 


이것은 사울이 '남녀'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는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표현인 동시에 당시 교회안에서의 여자의 비중도 매우 컸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 더 늘어났다.' (사도5,14) 


당시 사회 관습으로 볼 때 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충만을 받은 여자들은 복음 전파나 교회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4) 


사도행전 8장 4절부터 13절까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복음이 두루 널리 퍼져서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장 8절'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대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되는 시발점 기록된 구절이 바로 사도행전 8장 4절이다.


본문의 '흩어진 사람들' '핍박으로 흩어진 그리스도교 교인들'어떤 안전한 곳에 숨어 버린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다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흩어진 사람들'을 뜻하는 '디아스파렌테스'(diasparentes)원형 '디아스페이로'(diaspeiro)'분배'(distribution)를 의미하는 전치사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이로'(speiro) 합성어이다.따라서 원어적 뉘앙스로 볼 때, 이 흩어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마치 씨앗처럼 널리 퍼져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로 번역된 '디엘톤'(dielthon)'~을 통하여 다니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에르코마이'(dierchomai)부정(不定) 과거 복수(pl.)이다. 

'디엘톤' '모든 곳으로 갔다'(went everywhere)'가는 곳마다'(wherever they went) 그리고 '주위를 다녔다'(went around)등으로 번역되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선포를 암시하고 있다.


스테파노가 순교를 당하였고, 많은 그리스도교 남녀 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었는데도, 복음의 전파가 더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더욱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필리1,14).


결코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박해와 핍박이 나쁜 것만이 아니며, 교회의 영혼인 성령께서는 박해를 통한 흩어짐을 통해 더 많은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살다가 겪게 되는 고통이나 핍박 때문에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그럴수록 더욱 더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요한6,35~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40)


요한 복음 6장 40절요한 복음 6장 39절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 복음 6장 39절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구원의 확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그 일에 함께 동참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목적이 선택받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을 통한 완전한 구원임을 밝히셨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40절예수님을 믿게 된 자의 구원의 확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의 선택이 예수님을 믿는 결과로 나타나며, 이것이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귀결됨을 나타내는, 반복을 통한 강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라는 문구는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성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정하셨는지 명확하게 알게 한다.

그것은 바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보고'에 해당하는 '호 테오론'(ho theoron; who see)'보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아무 의미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요한12,45).


'테오론'(theoron)의 원형 '테오레오'(theoreo)는 단순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호라오'(horao)와 달리, '지각하다', '인식하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이 동사의 현재 분사'호 테오론'(ho theoron)은 인간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지 단순히 호기심으로 구경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각이나 인식 행위 자체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시 '믿음'이라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믿는 사람'에 해당하는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pisteuon eis auton; who believes in him)이 되어야 비로소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새 성경은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him)이라는 대명사를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았는데, 믿음의 대상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번역하는 것이 좋다.


또한 '믿는 사람'에 해당하는 '피스튜온'(pisteuon) '피스튜오'(pisteuo)현재 분사 동작의 계속 및 반복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하는 시제이다. 

이것은 과거의 믿음이나 단절되는 믿음이 아니며, 계속적인 신뢰와 끊임없는 순종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예식에 따라 형식적으로 하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삶이라는 언어로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나타내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2016. 4. 13 부활 제3주간 수요일(요한 6,35-40)/<생명의 빵>

<아버지의 뜻>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 6,35-36).”

“내가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과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라는 말과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빵의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너희는 영원히 배부르게 할 양식은 찾지 않고, 일시적으로 배부르게 하는 양식만 찾는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은 보지 않고 빵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누가’ 그 빵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누가 주든지 간에 그렇게 자기들을 배불리 먹인 일 자체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아닌 어떤 자가, 즉 세속의 정치 지도자나 사탄이 그렇게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면, 그자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메시아가 아닌 자를 따라가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라는 앞의 말씀의 ‘말’은, 바로 이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7-38).”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인도를 받아서 나를 믿게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도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는 그 은총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안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리 정해 놓으신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차별적으로 편애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은총을 받아들여서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은총을 배척하고, 믿기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에게 안 주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라는 말씀은, “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나의 가르침대로 살 것이고” 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은 당신이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을 당신이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인데,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는 뒤의 39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 때문에 ‘하느님의 뜻’과 다른 ‘예수님의 뜻’이 따로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다른 ‘예수님의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두 분의 뜻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표현일 뿐이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뜻에 따라 이렇게 다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왔다. 다른 일도 없고, 다른 뜻도 없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39절과 40절의 말씀은, 표현만 조금 다를 뿐이고 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전부 다 구원을 받을 것이고, 전부 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한다면, 전부 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를 잃지 않았는가?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서 잃은 사람이 아닌가?”

사실 배반자 유다의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미스터리(mystery)인데, 그는 예수님께서 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8).” 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약속의 말씀인데, 신앙생활은 결코 헛일이 아니라는 것,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는 나라입니다. 자격만 갖춘다면, 모두 다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데리고 들어가실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가 지닌 위대한 신앙의 넓이와 깊이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특정한 민족과 시대, 인종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며, 여전히 악의 세력과 죄의 시대를 살더라도 마지막 날에 이루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줍니다.
초기 교회는 스테파노의 순교와 박해의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 신앙의 놀라운 표징과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그 표징은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중풍 병자와 불구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표징이었고,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기쁨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표징을 세상에 드러내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려고 파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마다 세상의 가치들이 달라지고, 영혼의 아픔이 치유되며, 감추어진 삶의 진실을 만나는 희망의 감탄이 쏟아집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통해 고통을 딛고 희망을 보며, 자발적 가난을 통해 연대하고, 섬김과 희생으로 세상의 죄를 보속하며 예수님을 증언해 왔습니다.
믿음은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느님의 능력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나를 벗어나 이웃을 향할 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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