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주님의 종 (루카1,26-38)

2018. 4. 9. 오전 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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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주님의 종 (루카1,26-38)  



 이사야 예언자는 다윗 왕실에게,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한다. (이사 7,10-14; 8,10ㄷ)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8,10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한다. (히브10,4-10)
형제 여러분,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하자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한다.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독서(이사7,10-14;8,10ㄷ)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렵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7,10~14참조)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반기를 든다. 남부 유다의 아하즈 임금(b.c.735~716)이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그들 동맹을 거절하자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를 침공한다 

아하즈의 목숨뿐 아니라 다윗 왕조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저 유명한 임마누엘의 표징을 아하즈에게 알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한 아하즈는 하느님께 매달리는 대신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 댓가로 아시리아의 이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사야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그가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시 근동의 초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무모하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아시리아에 의존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10) 

이사야서 7장 1~9절은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하즈에게 남부 유다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략에서 보존될 것 예언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7장 10~16절은 남부 유다의 보존 예언을 확증하는 표징으로서 임마누엘의 예언을 주는 내용이다. 

즉 이것은 주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아하즈에게 다시 한 번 주님을 믿고 그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일종의 신앙적 도전이라 할 수 있으며, 표징을 구하지 않는 그에게 주님께서 친히 표징을 주심으로써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이르셨다' 말씀은  7장 13절의 '이사야가 말하였다' 연결되는데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자신의 지성과 언변에 담아 아하즈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11) 

여기서 제기되는 '표징' 즉 '오트'(oth)는 어떤 추상적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표적과 같은 것을 지칭한다. 

아하즈에게 하나의 표징(징조)을 구하라는 것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주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는지를 표현하라는 이다. 따라서 그 제안을 표면적으로 보기에 하느님을 시험하라는 의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하즈의 믿음을 시험하는 제안이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인간이 구하는 어떠한 표적도 다 보여줄 수 있다. 더욱이 주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시공간을 벗어나 가상적인 것이 아닌, 현실 가운데 실제 역사하는 것이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즉 이것은 세상에서 그분이 구체적으로 행사하시는 일, 실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보다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제안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느님을 가리켜 '너의 하느님' 즉 '아하즈의 하느님'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헛되고 무력한 거짓 신을 섬기는 이방 민족의 왕이 아닌, 하느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계약의 백성들 중에 통치자로 존재함을 확인시켜주는 표현인 것이다.

그는 지금껏 이방 신을 섬기고 온갖 패역을 자행하는 자였지만, 이 일을 계기로 하느님을 다시 자신의 하느님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계약 국가 유다를 하느님의 섬기는 나라로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있는 것이다.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11)

 아하즈가 표징을 구하되 그 표징을 깊은 데서 오게 해 달라고 혹은 높은 데서 오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의미이다. 이 두 장소는 인간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곳으로서 음부와 하늘 지칭한다. 

만약 그곳에서 표징이 보인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요구까지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징표로 구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12)

이것은 아하즈가 주님께서 제안하시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음을 보여주며, 그가 아시리아와 손을 잡고 그 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겠다는 것을 이미 결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하즈는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서 주 하느님이 아닌, 장차 유다를 침공할 이방 아시리아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본문은 두 절 모두 강한 부정어 '로'(lo)와 더불어 동사의 미완료형이 사용된 구문으로서, 결코 영원히 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써 아하즈가 얼마나 완고하고 사악한 자인지, 그리고 하느님께 대체 얼마나 무관심한 자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시험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아낫쎄'(anaseh)의 원형 '나싸'(nasah)구약성경에서 34회 사용된 동사로서 어떤 물건의 품질이나 인격의 진정성을 알아내기 위해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아하즈도 신명기 6장 16절의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근거삼아 이렇게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명기의 말씀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그를 시험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금한 말씀이다.

 

반면에 지금 이사야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을 하느님께 어려운 징조를 구함으로써 표현하라는 것이므로 이 둘은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  그 점에서 볼 때 아하즈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그의 백성이 마땅히 올려야 할 기도인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기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능력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한다는 표시이며, 하느님을 도무지 신뢰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13)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실을 가리켜 '아하즈의 왕실'이라고 칭하지 않고 '다윗 왕실'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윗 왕실은 다윗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의 이스라엘의 왕실을 의미하는데, 그 왕실은 주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통치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수백년이 흐르면서 그 믿음의 표상은 불신앙의 표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응당 믿음의 표상이 되어야 마땅한 유다의 왕실이 어찌하여 불신앙의 표상이 되었느냐고 물으면서 한탄의 어조로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유다 왕실을 대표하는 자로서 그의 뜻은 곧 왕실 전체의 뜻이기에 아하즈의 태도에 따라 왕실과 나라 전체가 복을 받기도 하고, 심판을 받기도 하는데 말이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렵 합니까?'(13) 

여기서 '사람들'에 해당하는 '아나쉼'(anashim)은 흔히 유한하고 병약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명사 '에노쉬'(enosh)의 복수형이다. 

자기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주권자를 의지하여 도움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유다 왕실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는 무력한 백성들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7장 11절까지만 해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너의 하느님', 즉 아하즈의 하느님으로 지칭하다가 여기서는 '나의 하느님', 즉 이사야 자신의 하느님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렇게 호칭이 바뀌게 된 것은 이사야서 7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하즈의 불신앙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불신앙과 교만으로 가득하여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탄없이 등을 돌리시는, 겸손하게 그를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성가시게 하고서' '할르오트'(haleoth)의 원형 '라아'(laah)구약 성경에서 19회 사용된 단어로서 피곤하게 하고 진절머리가 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탈출7,18; 욥4,2; 16,7; 예레15,6).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14)

아하즈가 구하기를 거부한 표징을 주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실 것이 선포된다. 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다는 것은 아하즈가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그것을 그분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실 하느님은 유다 백성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의무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다는 것은 무상의 선물인 은총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은총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될 수 없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14)

 여기서 '젊은 여인'(처녀; virgine)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알르마'(haalmah)이다. 이 단어의 원형 '알르마'(almah)는 구약에서 7회 사용되었는데,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 즉 결혼 적령기에 있지만 성(性)경험이 없는 여자라는 의미사용된다(창세24,43; 탈출2,8; 잠언30,19). 

더욱이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본문의 이 단어를 숫처녀를 의미하는 희랍어 '파르테노스'(pharthenos)로 번역하였다.   '파르테노스'(pharthenos) 숫처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 '뻬툴라'(bethula; 창세24,16)의 번역어이기도 하며, 마태오 복음 사가가 마리아를 가리켜 '처녀'(동정녀)라고 한 희랍어 '파르테노스' 동일한 단어이기도 하다(마태1,23).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가리키는 예언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난점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징조가 당시 아하즈 임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700년 후에 일어날 징조가 당시 아하즈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그러하다면 그 징조가 아하즈에게 어떻게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징조가 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난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난제를 이렇게 해석하면 물의가 없다.

사실 700년 후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그 사건을 예언하면서 그것이 자기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고, 또 아하즈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고, 그 예언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그 광대한 진리를 하느님께서 계시로 주신대로 왜곡이나 변조없이 그대로 증거한 것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주장을 취하게 되면, 여전히 이사야서 7장 16절이 난해한 구절로 남는다.

'그 아이가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혐오하시는 저 두 임금의 땅은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7,1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700년 후에 태어날 임마누엘의 예표로서 이사야 시대에 한 아들을 주셨을 것이며, 이사야서 7장 16절은 아마도 그 아들에 대한 예언일 것이다. 

그 아들은 이사야서 8장 3절, 8장 4절과 관련하여 이사야가 그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이 분명하며 그 이름은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이다.


이사야서 7장 16절의 아들이 임마누엘을 예표하는 것은 구약 시대의 이사악이나 요셉, 여호수아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는 사실과 관련지을 때 조금도 부자연스런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요셉 동정녀를 통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 또한 이사악이 비록 제단에서 문자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가 십자가상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 그 여자가 낳게 될 아들 역시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되고 불신자에게 심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14)

'임마누엘'은 '~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임'(im)에 1인칭 복수 접미어가 결합하여 '하느님'이란 뜻의 명사 '엘'(el)이 함께 쓰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이름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달리 이 아이를 낳은 어미인 그 처녀가 지어줄 것이다.  

즉 '이라 할 것이다' 해당하는 '웨카라트'(weqarath)는 '칭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라'(qara)의 여성 3인칭 단수형이다.


사실 700년 이후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을 낳아 천사의 지시대로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마태1,21). 그런 점에서 '임마누엘' 그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그 아들의 인격속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를 통하여 이 땅에 보내실 분은 하느님 당신 자신이 육화(肉化)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명칭이 바로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logos)이신 성자 하느님께서 (요한1,1~3) 이 땅에 강생(육화)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직접 그의 백성 바로 곁으로 오신 것이다(요한1,14).

곧 임마누엘은 제2위 하느님이신 성자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에 대한 예언이며, 그의 백성이 하느님을 볼 것에 대한 축복의 예언인 것이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복음(루카1,26~38)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37~38)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 루카 복음 1장 37절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자에게 임신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의 '말씀'에 해당하는 '레마'(rema)는 일차적으로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카 복음 1장 37절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 탄생에 관해 예언된 모든 말씀의미하며, 이러한 예언들이 마치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 is impossible)'아뒤나토스'(adynatos)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아뒤나토스'(adynatos)'능력있는', '강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뒤나토스' (dynatos)에 부정 접두사인 '아'(a)가 붙어서 '능력없는', '약한'이란 뜻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는 앞의 '우크'(ouk; nothing)와 연결되어 이중 부정의 의미를 갖고서 매우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마리아에게 선포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노쇠하여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던 아브라함에게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며 아들 이사악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18,14)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루카 복음 1장 38절하느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믿는 마리아의 순수한 신앙을 잘 보여 주며, 이러한 신앙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고 잔치집 일꾼들에게 지시함으로써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일어나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자신을 지칭한 단어 '둘레'(doule; servant)'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doulos)의 여성 명사로서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하녀(계집종)'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주인', '주님'을 의미하는 '퀴리오스'(kyrios)의 소유격 '퀴리우'(kyriu)와 연결되어 철저하게 주님께 예속된 능력없는 계집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맡기겠다는, 철저한 순종과 겸손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본문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보십시오'에 해당하는 '이두'(idu)라는 단어는 마리아의 이러한 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이두'(idu)의 용법은 이야기의 생기를 돋우어 주거나, 듣는 이나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킬 때, 그리고 좀 더 깊은 생각을 촉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루카 복음 1장 38절에서는 이 단어가 동사없이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마리아 자신의 '종'으로서의 존재를 천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신의 겸손함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 대로'에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타'(kata)라는 전치사는 목적격과 연결되어 뒤에 오는 명사의 내용이나 본질이 조금도 훼손되는 일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에 해당하는 '게노이토'(genoito; may it be)'발생하다'는 뜻의 '기노마이'(ginomai)의 희구법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리아의 염원을 담고 있다. 

비록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보증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는 위대한 순종의 신앙을 보여 주었다. 

바로 이 순간이 마리아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의 모친으로서의 성소를 허락하는 순간이며,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피와 살을 취하고 인간의 역사안으로 들어오는 강생(육화; incarnatio)의 순간이기에, 우리는 사도신경과 삼종경을 바칠때 고개를 숙여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의 예를 드리는 것이다.



<마리아의 응답과 헌신>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원래 3월 25일인데,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성주간 어떤 날에 올 때에는  언제나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는 전례력 규정에 의해서 4월 9일로 옮겨졌습니다.
3월 25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을 기준으로 계산해서 정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심을 경축하는 날이고,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오심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예고 말씀을 들으신 그날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 라는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을 축하하는 말이기도 하고,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득히 받은 은총과 주님께서 함께 계심은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고, 선택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크게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만일에 그 일이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라면,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같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찬미하기는 해도  마리아를 본받자는 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본받자는 말을 하려면, 성모님 쪽에서 하신 일과 삶과 노력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리아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셨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도 충실하게, 또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주시는 분인데, 그 은총에 응답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은총에 대한 '응답'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에서  모든 사람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시고 모범이 되신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응답'과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자, 마리아는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루카 1,34).
이 질문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한 질문과 비슷한데(루카 1,18), 즈카르야의 질문은 믿지 못해서 표징을 요구하는 말이었고, 마리아의 질문은 믿기는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 말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법으로는 유부녀였지만, 정식 부부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동정녀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지금 바로 제가 요셉과 결혼을 해야 합니까?"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경우에는, 가브리엘 천사는 그에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고  믿지 못하는 그를 꾸짖었습니다(루카 1,19-20).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

이 말은, 믿지 못하는 마리아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믿기는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네가 따로 할 일은 없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잉태 방법에 관한 설명은 아닙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의 잉태는  인간이 과학적으로(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도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한 일로 보이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네가 따로 할 일은 없다."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잉태 과정에 사람의 힘은 전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즉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일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게 될 것입니다.

천사가 엘리사벳의 임신을 언급한 것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지만,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또 단계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설명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하느님께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하나도 안 보이는, 또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라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마리아의 응답은(루카 1,38),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응답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응답이기도 하고, 동시에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응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 인류의 어머니'로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응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있는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어머니의 믿음과 응답과 순종과 헌신을 경축하고 있고, 그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순종 없는 믿음은 그림의 떡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이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은 그야말로 노예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에는 그 고통을 미리알고 그것을 참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그런데 그 종에게 견디어 내는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말씀하신대로’라고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함께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단테의 표현대로 "처녀인 어머니로서의 고통", 그리고 "아들의 딸" 즉 하느님의 딸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경청의 달인이요, 행동하는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도 일상 나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행하는 성모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루카 복음은 주님 탄생을 예고하는 가브리엘 대천사와 처녀 마리아의 만남을 인류 구원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인사말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미 섭리된 여인이심을 암시합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고, 그 아이가 임마누엘이신 하느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참된 표징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가브리엘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낮추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하느님 안에서 철저하게 봉헌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실을 보호하시고자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징을 드러내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고되고 약속된 메시아의 오심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섭리하고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순종을 통해 마리아는, 이 세상이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고백합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나 믿음에 바탕을 둡니다.

처녀로 아이를 잉태하는 위험을 감수하신 성모님의 믿음과 십자가에서 모욕과 멸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선택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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