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저는 아니겠지요? (마태26,14-25)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며, 주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시니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사 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차린 식탁에 앉으시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50,4-9ㄴ)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4-5)
이사야 예언서의 '위로의 책'(40-55장)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네 개의 노래로 되어있는 '야훼의 종' 또는 '주님의 종'에 관한 신탁이다(42,1-9; 49,1-7; 50,4-11; 52,13-53,12). 여기서 주님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는 주님의 종의 선하신 성품과 주님의 종을 향한 하느님의 전적인 보증을 강조했다(42,1-9). 두번째 노래는 하느님의 전적인 부르심과 영광과 승리의 약속을 강조하였다(49,1-7). 이에 비해서 세번째 노래와 네번째 노래는 모두 종의 고난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독서가 들어있는 세번째 노래(50,4-11)는 주님의 종이 고난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인내하며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주님의 종의 고난에 집중적으로 촛점을 맞추는 네번째 노래(52,13-53,12)와 구별된다. 세번째 노래의 말하는 자(話者;화자)도 두번째 노래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종 자신이다.
이 종은 하느님께 순종적이고 신실한 자이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큰 고난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참 신앙의 표본이 되는 인물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4)
본문에서 주님의 종은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주 하느님)을 자신의 '주'로 칭한다. 이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단순히 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권한을 가진 주인이란 의미가 아니라 온 우주의 주재권을 가지고 있는 만왕의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님의 종은 바로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제자들'에 해당하는 '림무딤'(limmudim)은 '배우다'(신명5,1),'본받다'(신명18,7)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드'(lamad) 에서 유래하며,'배우는 자'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 8장 16절에서에서 '제자'란 의미로, 54장 13절에서는 '교훈을 받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식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워 스승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자의 혀를 주시어'란 말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아래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후반절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는 내용 역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님의 종의 열정을 보여준다. 즉 주님의 종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깊이 이해하여 순종하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주님의 종은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님의 백성에게 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의 '주시어'에 해당하는 '나탄'(natan)은 '위임하셨다', 또는 '임명하셨다'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실 때에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자인데 어디에서 그런 깊은 지식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셨다(요한7,15-16). 주님의 종이셨던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을 통해 참된 지식을 공급받으셨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파하셨던 것이다(요한8,28).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4)
이 본문은 왜 주님께서 종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지 그 목적이나 결과를 말해준다. 즉 본문은 제자의 혀를 가지신 주님의 종의 주요한 사명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그는 지친 이<困苦(곤고)한 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지친 이'에 해당하는 '야에프'(yaeph)는 피곤하여 지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 '야아프'(yaap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해 기진맥진한 사람을 의미한다(40,28.30.31).
그리고 '말로'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은 창조의 권능과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가 원하는 주님의 말씀은 지친이로 하여금 생명과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움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소망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 그리하여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4)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가르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매일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 그의 이성과 영성을 일깨우신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일깨워 주신다'에 해당하는 '야이르'(yair)의 원형 '우르'(ur)는 문자적으로 잠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모두 65회 사용된 용례에서 이 단어는 주로 마음을 부추기거나 감동시켜 어떤 일을 하게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영성을 일깨우며 사명감을 북돋운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이어지는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란 예언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듣게 하신다'에 해당하는 '리쉬모아으'(lishimoah)는 '듣다'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으'(shamah)의 부정사에 '~하기 위하여'란 뜻의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듣도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문제(이사48,8.18)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먼저 들으시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4)
본절은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순종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주님께서 종의 귀를 여셨다는 본문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귀가 모두 열리지 않았다는 이사야서 48장 8절의 진술과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너는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다. 예로부터 네 귀가 열리지 않았으니 네가 배신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라 불릴 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사48,8)
원문상으로도 '열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타흐'(patah)가 본문과 이사야서 48장 8절에 각각 사용되었다. 그들은 듣는 귀가 닫혀 있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며(이사6,9) 아예 주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이사48,8).
반면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순종한다. 바로 여기서 주님의 종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근거가 나온다. 따라서 믿는 이들도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거역하고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종의 듣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5)
원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라는 인칭 대명사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의 종만큼은 부르심과 말씀에 절대 순종의 자세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거역하다'에 해당하는 '마라티'(marathi)의 원형 '마라'(mara)는 원래 음식의 맛이 매우 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사1,20; 민수20,10; 신명1,26). 그러나 주님의 종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신다(요한8,29).
또는 '뒤로 물러서다'에 해당하는 '아호르 네쑤고티'(ahor nesugothi)는 겁을 집어 먹고 뒤로 도망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의 종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섰을 때 온갖 두렵고 떨리는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사명은 메시아의 공생활 가운데 그대로 구현되었다.
성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6,14~25)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3ㄴ~24)
마태오 복음 26장 23절(ㄴ)의 '넣어'라는 현재 진행적 의미로 번역된 '엠밥사스' (embapsas; dipped)는 '담그다', '적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엠밥토' (embapto)의 부정 과거 분사이다.
따라서 '엠밥사스'(embapsas)는 구체적으로 대접에 담겨 있는 과일과 식초 혼합 스프(soup)에 빵을 담그어 찍는다는 뜻이며, 그 시제는 과거로서 이미 빵을 담그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과 함께 스프에 빵을 찍어 먹기 위해 대접에 손을 넣은 사람은 유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전부였을 것이기에(마태26,21),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배반자가 될 가능성이 열두 제자 모두에게 열려져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병행 구절인 요한 복음 13장 26절에는 예수님께서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시면서 당신 빵을 받는 자가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일은 그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던 일이었을 것인데, 마태오 복음사가와 요한 복음사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차이에 따라 각각 한 사건만이 선택되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한 복음사가는 배신자가 유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서 주님의 참된 제자들 가운데서는 배신자가 나올 수 없고, 그리고 나와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배신자가 제자들 중 누가 될지 모른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기록함으로써 자칭 주님의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배신의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자'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 the same)는 지시대명사로서 '바로 이 사람'이라는 뜻의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후토스'(hutos)는 예수님을 팔아 넘길 자가 예수님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은 그자, 곧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적 표현을 하는 이유는 구약에 나타난,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에 대한 예언의 성취에 중점을 두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즉 시편 41장 10절에서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제 빵을 먹던 그'가 본문에서 '예수님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의 가까운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떠나간다'에 해당하는 '휘파게이'(hypagei; goes)의 원형 '휘파고'(hypago)는 '~아래에' 또는 '~에 의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가져가다'는 뜻의 동사 '아고'(ago)에서 유래한 합성 동사로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동사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에 의한 떠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떠나가는 것이지만, 그 섭리를 적극적 의지로 따르셨음이 나타난다.
한편 이 동사는 단순히 장소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인생을 떠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죽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마르5,19; 요한7,33; 16,5).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 가시는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십자가를 통한 죽음의 길을 갈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실제로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 (루카18,31; 24,25-27; 44-47; 시편22,2 ;이사53,2-12).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 차원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권력가들과 배신자가 예수님의 생명을 놓고 좌지우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팔려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지적으로 순종하여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불행하여라'에 해당하는 '우아이 데'(ouai de; but woe)에서 '데'(de; but)는 접속사로서 앞의 문장과 대조된 정반대의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즉 하느님의 섭리대로 죽게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팔아 넘기는 자의 책임은 결코 면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불행하여라'에 해당하는 '우아이'(ouai)는 일종의 감탄사로서 '화가 있도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우아이'(ouai; woe)는 특히 하느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징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므로(마태11,21; 묵시8,13), 이 단어가 말하는 '불행'(화)의 종류는 하느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형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서운 심판의 선언을 들은 유다는 두려움이나 회개의 감정은 커녕,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 천연덕스런 모습을 보인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인간에게 사용되던 속담적 표현이다.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비극'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욥기(욥3,2.10.11)나 에녹서 38장 2절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유다의 비극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원문은 '좋았을 것'으로 번역된 '칼론'(kalon; good)이 문장의 서두에 나와, 존재함으로 생겨난 현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욱 더 중폭시킨다.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양으로 은돈 서른 닢을 챙긴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뻔뻔스레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입니다.
"혀로 예수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짓을 합니다. 서로 험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험담할 때 그 사람은 하나의 물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가 한 짓입니다. 험담할 때,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길 때에 바로 유다가 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이해심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우정이 없었어요. 우리도 역시 남들에 대해 슬데 없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으며 모든 것이 死藏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지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합시다.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입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를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그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과 뜻에 순종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호칭, 모든 피조물이 무릎을 꿇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호칭이 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수석 사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모의하고 은돈 서른 닢을 받습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그의 처지는 예수님의 선택된 제자에서 예수님을 배반한 자로 바뀝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유다는 자유 의지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쓰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을 배반하는 데 씁니다.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을 남용한 유다는 죄의 노예가 되어 영원한 멸망에 이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자신의 배반 계획을 감춥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저버립니다.
우리는 유다의 삶과 모습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소중하게 사용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거스르면 유다처럼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지 않고 자신의 안락과 욕심을 좇는 사람은 예수님을 거스르는 길에 들어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순명의 십자가는 구원의 생명력을 지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르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