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 (요한 8,31-42)

2018. 3. 21. 오전 6:33:38

글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 (요한 8,31-42)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그의 신을 섬기지 않은 세 젊은이를 묶어 불가마 속에 던졌으나 천사가 그들을 구한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한다. (다니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그들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요한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불 속의  다니엘의 세친구(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와 주님의 천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다니 3,14-20.91-92.95)


히브리어로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부터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 시절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여호야킨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 일으킨 안티오코스 4세(BC175-164년)의 박해때이다. 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그런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를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그때 불가마속에서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 '세 젊은이의 노래'이다(다니3,24-90).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 (15)


본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은  '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의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한 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임금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 해당하는 '베잇따나 띠 티쉬메 (beiddana di tishmeun)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at the time you hear) 라는 의미이다. 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가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신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그 세 사람을 그 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단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 (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발언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을 염두에 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하신 신이셨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내놓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자신의 위치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 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행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19)

'일곱 배'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 '칠 배'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은 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 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  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2) 

'결박이 풀려서' 해당하는 '셰라인'(sherain)원래 '자유롭게 하다','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셰레'(shere)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유롭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불 속에 떨어진 세 사람에게 가해진 단단한 결박이 풀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하나는 불에 그 결박이 완전히 탔을 것이라는 설명과 다른 하나는 네번 째 하느님의 아들 같은 존재가 풀어 주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네 사람' 해당하는 '꾸브린 아르베아'(gubrin arbeah)'네 명의 남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불 속에 떨어진 사람의 숫자는 셋이었으며, 그들을 붙들고 던진 군사들마저 모두 용광로 밖에서 타 죽었기 때문에 이 역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거닐고 있는데'에 해당하는 '마흘레킨'(mahlekin) '걸어 다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할라크'(halak)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 속을 계속해서 이리저리 활보하고 있는 그 네 사람의 동작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속에서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다 사실을 암시한다. 주 하느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다친 곳 하나 없이'에 해당하는 '와하발 라 이타이'(wahabal la ithai)'상처가 전혀 없었다' 의미이다. 불 속의 네 사람의 상태에 대해 그 정도로 정확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위치가 그 용광로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신(들)의 아들'에 해당하는 '레바르 엘라힌'(lebar elahin)은  다신론(多神論)적 세계관에 익숙해 있던 당시 네부카드네자르의 이교적 인지 능력을 넘어서  그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을 천사 혹은 천사들 가운데서도 대천사 미카엘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육화(강생)이전의 그리스도의 형상이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뜻을 가진 제2위 천주 성자이신 임마누엘의 반영이라고 본다.  

제2위 천주 성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과 함께 친히 고난을 함께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뎌내게 하셨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던 것이다.


천주 성자 하느님의 그와 같은 임재와 보호하심은 사실상 당시 바빌론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시대와 장소가 변해도  여전히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베푸시는 은혜를 암시하는 예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말씀대로 실천할 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신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 말씀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꿔서 표현하면,

“너희가 나를 믿고, 내가 가르친 대로 살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고,

내가 가르친 대로 살면서 나와 일치를 이루면”이라는 뜻입니다.

‘머무르다.’ 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머무르다.’ 라는 말이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곧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라는 말씀을,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려면 내 말 안에 머물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내가 가르친 대로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진리’ 라는 말은, 예수님에 관한 진리, 또는 예수님의 복음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에 대한 신앙으로 참된 자유와 해방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일, 진리를 깨닫는 일,

진리로 자유롭게 되는 일, 이렇게 3단계로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3단계가 아니라, 이 말씀들은 모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뜻으로는 사실상 하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회개해서 내가 주는 참 자유를 얻어라.”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나라의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죄의 노예’ 상태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원죄 교리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그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서 참 자유를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집’에,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언제까지나’ 라는 말은 ‘영원히’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자유, 해방,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심판의 결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세속의 법정에서는 항소심, 상고심 등이 또 있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한 번뿐이고, 재심의 기회는 없습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 8,37-38).”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너희가 정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살아라.”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아라.”)

여기서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인간의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살고 있지 않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면서, 즉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내세우면서

너희는 왜 나를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가 전해 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했는데”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사탄의 말만 듣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희 아비’는 사탄을 뜻합니다(요한 8,44).


세례자 요한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7-9).”

(여기서 ‘독사’는 사탄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요한 8,39-41).”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요한 8,42).”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사탄의 편에 서는 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에게 임금이 세운 금 상에 절하고 우상을 섬기도록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오르는 불가마에 던져 죽일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그들은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우상 섬기는 것을 거부합니다.
다니엘 예언서의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불가마에서 구출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 명의 젊은이가 하느님께서 불가마와 임금의 손에서 목숨을 구해 주시지 않아도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한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정신은 목숨에 연연하지 않으며 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는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립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진리로 자유롭게 된 자녀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의 이성과 정신을 영적 자유로 충만하게 만듭니다.
죄의 종이 되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합니다. 그들은 죄에 조금씩 물들어 가면서 영적 자유를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반대편에 섭니다. 그들은 진리의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거짓과 위선의 편에 서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 안에 머물며 무한한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자유는 진실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