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금요일] 계명 (마르12,28ㄴ-34)

2018. 3. 9. 오전 6: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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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금요일] 계명 (마르12,28ㄴ-34)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고 한다. (호세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신다. (마르12,28ㄴ-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 그분은 한분 뿐이시고 그밖에다른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호세14,2~10)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6)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7)


호세아서 14장 4절에서는 주님께서 징벌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유하고 사랑을 회복시키실 것이 약속되었다. 이제 호세아서 14장 5~7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축복하실 때 그들이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을 예언한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이슬'처럼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슬이 되어'에 해당하는 '캇탈'(kattal; as the dew) '이슬과 같이', '이슬처럼'(like the dew)으로 번역된다.


'이슬'은 호세아서에서 3회 사용되었는데, 호세아서 6장 4절과 13장 3절에서는 이슬의 덧없음과 무상함, 허무함 등의 이미지를 나타내었고, 여기서는 당신 백성에게 촉촉히 내리는 하느님의 부드러운 은혜를 상징한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봄과 늦은 가을에 닥치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건기 때에는 밤에 내린 이슬이 농작물의 성장에 필수적이며, 산에 사는 동물들의 목을 축이는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호세아서 14장 6절에서 바로 비를 대신하는 이슬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고 야곱의 후손들은 안전하게 하늘이  이슬을 내려주는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산다.'(신명33,28). 

주님께서 그렇게 이슬처럼 은혜를 주실 때, 이스라엘은 아주 풍요롭게 번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서 14장 6절 후반부부터 7절까지에서는 이슬처럼 내리는 하느님의 은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된다.


'그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나리꽃처럼'에 해당하는 '캇쇼샨나'(kashoshanna; like a lily)의 원형 '슈산'(shushan)팔레스티나 평원에서 자생하는 흰색의 꽃으로서 넓게보면 오늘날의 '백합'(lily)으로 불릴 수 있다. 

이 꽃은 지고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아가2,2; 6,2). 그래서 나리꽃처럼 꽃이 필 것이라는 진술은 이스라엘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또한 '레바논처럼'으로 번역된 '칼레바논'(kallebanon; as Lebanon; like a cedar of Lebanon)'레바논 향백나무 같이'로 의역되기도 한다.

고대 근동에서 레바논은 향백나무의 산지였으며, 레바논은 곧 향백나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1열왕7,2).


향백나무 혹은 백향목은 견고하고 깊은 뿌리를 기반으로 해서 매우 굵고 튼튼하고 길게 자라나는 나무로서 고대 근동에서 왕궁이나 성전 등 크고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향백나무의 뿌리를 뻗으리라는 예언그들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하느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안전함을 누리며 크게 번성하는 나라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7)

이스라엘이 풍요와 번성을 위해 섬겼던 바알 우상은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풍요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진정 풍요로운 삶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언하는 호세아서 14장 7절에서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에 해당하는 '옐레쿠 요네코타이우'(yelleku yoneqothaiu)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어린 가지들이 나무에서 점차 돋아나 계속해서 밖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강조한다. 

'요네코타이우'(yoneqothaiu)의 '요네케트'(yoneqeth)봄이 되면 막 돋아나는 어린 싹을 지칭한다(욥기14,7). 


그리고 '돋아나'에 해당하는 '옐레쿠'(yelleku)는 미완료형으로서 그러한 일이 일회적이거나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올리브 나무'에 해당하는 '자이트'(zaith; an olive tree)는  가지와 잎사귀가 매우 많은 나무이므로 '그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호도'(hodo; his beauty)는 '그의 찬란함'(his splender)이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올리브 나무처럼 찬란하고 웅장한 민족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어서 이스라엘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와 같으리라고 예언된다. '향기'에 해당하는 '레아흐'(reah)는 하느님께서 과거 계약적 저주의 예언 가운데, 그들이 바치는 제물의 향기도 맏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다(레위26,31).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계약적 저주가 다 해결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향기로운 나라가 되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12,28ㄴ-34)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29ㄴ~31)


마태오 복음 12장 29절은 소위 '셰마 본문'이라고 하는 말씀 가운데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희랍어 '아쿠에 이스라엘'('Akoue 'Israel)은 히브리어 '세마 이스라엘'(shema Israrael)을 직역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신조로서 신명기 6장 4~9절과 11장 13~21절, 민수기 15장 37~41절을 포함하며, 유대인들은 이것을 아침,저녁으로 암송하였고, 이것을 양피지에 써서 작은 통(성구갑)속에 넣어 앞 이마나 팔에 매어달아 언제든지 꺼내어 읽을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계명이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6,4~6)

"Hear, O Israel ! The Lord is our God, the Lord alone !  Therefor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Take to heart these words which I enjoin on you today." 


'이스라엘아, 들으라!' 

본문으로부터 그 유명한 '셰마'(shema; hear)가 시작된다. 

본절은 6개의 단어 구성되어 있으며(세마 이스라엘 예흐와 엘로헤누 예흐와 에하드; shema israel yehwa ellohenu yehwa ehad; hear, o Israel the Lord is god, the Lord alone), 그 첫 단어가 '들어라' 뜻이 있는 '셰마'이다.

따라서 본 단락은 이 첫 단어를 따라 '셰마'(shema)로 불리워진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셰마는 원래 6단어로 구성된 신명기 6장 4절만을 일컬었지만, 후에 5절 포함되었고, 더 나아가 본문부터 시작해서 한 단락을 이루는 4~9절까지를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6장 4~9절(제1부분)에 이어 신명기 11장 13~21절 (제2부분), 민수기 15장 37~41절(제3부분)도 셰마에 포함하게 되었다.


제1셰마에 해당하는 신명기 6장 4~9절 유일신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여 항상 계명을 기억함으로써 주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명령과 자녀에게 그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추가된 신명기 11장 13~21절 이 명령에 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축복과 불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저주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민수기 15장 37~41절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라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 랍비들은 신명기 6장 7절에 근거하여 이 셰마 본문을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의식을 제정했으며, 이 셰마 규정의 준수 여부는 진실된 유대인임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이것은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매일의 고백과 모든 이단 종교와 우상 숭배에서 스스로 구별되는 유대 종교 교리의 근간이 된다.

'유일한'으로 번역된 '헤이스'(heis; one)는 단순하게 수사(數詞)로서 '하나'라는 뜻을 갖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유일신(唯一神)사상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사랑과 순종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밝히시는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즈카리아서 14장 9절 '그리고 주님께서 온 세상의 임금이 되실 것이다. 그날에는 주님이 한 분뿐이시고 그 이름도 하나뿐일 것이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그 이름도 하나뿐일 것이다'(우셰모 에하드; ushemo ehad)란 표현에 근거하여 '에하드'(하나 뿐; one)를 주님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라 본문을 번역하면,'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며 '하나 뿐'인 주님이시다'가 된다. '하나 뿐'이라는 고유 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주님이시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에하드' 주님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새 성경을 포함해서  대다수 성경과 같이 이것을 주님을 서술하는 '하나'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문대로 직역하면, '주님 우리 하느님 주님 하나'이며,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전반부는 '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다' 내용이고, 후반부는 '주님은 한 분이시다'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을 종합하면, 본문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알리는 구절이 된다.


이런 의미를 갖는 본문에 근거해 볼 때, 성경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다신주의 (多神主義; Polytheism) 뿐만 아니라 혼합주의(Syncretism)을 일체 배제하며, 실제로 모든 종류의 자연신론(自然神論)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인 사상에 의해 추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신, 예를 들어 '절대 존재', '절대 이데아'와 같은 개념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은 오직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절대적인 살아계신 하느님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새 성경에는 본문이 본절의 후반부에 있지만, 원문에는 본절의 맨 처음에 나온다. 

'웨아하브타'(weahabtha; therefore(and) you shall love; 너희들은 사랑해야 한다)로 시작하는 단어에서 '와우'(wau; therefore; and) 접속사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리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내용의 앞 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정리하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은 세상의 수많은 다른 헛된 우상이 아니고, 오직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한편,'웨아하브타'에서 '아하브'(ahab; love)동사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신명4,37; 11,1)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호세아서의 경우 남편과 아내의 사랑(호세3,1),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호세11,1)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바로 '아하브'동사가 매우 실제적인 차원의 사랑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특별히 구별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평이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지 종교적인 관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친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출애굽 이후 시나이산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 관계를 맺은(탈출19,5.6; 24,1.8)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현존하고 임재하셔서 그들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어 주셨으며,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를 사랑하듯이,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처럼 또는 자신의 연인처럼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신명기 6장 4절에서는 주 하느님을 '우리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반하여, 6장 5절에서는 '너희 하느님'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명기 6장 4절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대한 계시라면, 본문은 그 계시된 하느님께 대한 각 개인의 인격적 반응에 대한 촉구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카르디아'(kardia)는 히브리어 '레바브'(lebab)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che;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셰카'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 '너의 온 영혼을 다해'(with all your soul)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는 신명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정신성과 정신력을 의미하기에 '목숨을 다하고'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마태22,37참조)로 세분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이스퀴스'(ischys; strengt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with all your strength(might)>,'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 전영(全靈), 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6)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것이 네 마음 (위)에 있게 하라' (take to heart;  be upon your hearts)이다. 

여기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또한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인격(人格) 가리킨다.


따라서 말씀이 마음에 있게 하라는 말은 단지 말씀의 내용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감정에 언제나 말씀이 반영되어 있는 인격을 소유하여 실제로 자신의 삶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그리고 '새겨 두어라' 번역된 '웨하유'(wehayu)에 쓰인 동사는 '~이다'란 상태를 나타내는 '하야'(haya)동사로서, 이것은 말씀이 마음 위에 있는, 즉 말씀이 인격 위에 반영되는 삶이 일시적인 상태로 끝나는 일회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항상 지속되는 상태에 있어야 함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에'로 번역된 '알 레바베카'(al lebabeka; 너의 마음에)라는 표현은 신명기 5장 22절 나온 '알 셰네 루호트 아바님'(al shene luhoth abanim) '두 돌판위에'라는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의 대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두 돌판에 율법을 새겨 주신 행위가 실제로는 그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마음 위에 있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수 있다 (예례31,33참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으로서 십계명의 둘째 부분, 즉 사람에 대한 4~10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두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에 해당하는 '플레시온'(plesion; neighbour)는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살거나 혹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도 다 포함된다 (루카10,25~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웨아하브타 레레아카 카모카'(weahabtha lereaka kamoka;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이다.

여기서 '이웃'으로 번역된 '레레아카'(lereaka)가 '사귀다'라는 뜻의 '라아'(raah)에서 유래하여 '벗', '친구'(욥기6,14), '동료'(즈카3,8)로도 번역되는 '레아'(rea)에 전치사 '레'(le)와  2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너의 벗' 혹은 '동료들'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레위기 19장 34절에서는 함께 머무르는 객, 이방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볼 때(레위17,10.12.13.15), 넓은 의미에서 본문의 '이웃'이란 계약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다 포함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랑하다'라는 뜻의 '아하브'(ahab) 동사는 보통 전치사 없이 목적어를 취한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레'(le)가 목적어 앞에 붙어 있어서 다른 뉘앙스를 전달한다. 

즉 '레'(le)는 상대방에게 방향을 맞추고 있는 자세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에게 도움이 되어 주다', '~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사랑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언제 어디서나 도움과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를 말한다.

또한 본문은 사랑해야 하는 깊이와 정도에 따라 '카모카'(kamoka) 즉 '너 자신처럼', '네 자신과 같이'(as yourself)이라는 말을 쓴다. 

'이웃'이 곧  나 자신과 같다는 의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경우라면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지 말며, 나에게 쏟아 붓는 걱정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첫째 가는 계명에 이어지는 둘째 가는 큰 계명(마태 22,39.40; 마르12,31)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웃의 범위를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분명히 정해 주셨다(루카10,25~37).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자신처럼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0-31)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가장 본질적인 소명이요 삶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입고도 가나안의 풍요신을 섬겼고, 제관들은 재물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에서 멀어져버린 그들에게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14,2)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장 큰 계명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시선과 의식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쏟아 부어 미친 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언어를 빌면, 항상 하느님을 생각하고, 항상 갈망하며, 모든 지향을 하느님께 두고,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하느님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주님의 기도’ 묵상 5절). 

유한한 사랑에 갇혀버리곤 하는 우리가 이런 사랑을 살아내기란 매우 어렵지요.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도전으로 남는다 하여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써야겠지요. 하느님을 생각하고 갈망하는 시간을 늘리고, 딴데 시간과 힘을 쏟기보다 주님께 시선을 두려 노력하며, 내가 지닌 힘과 감각을 ‘먼저’ 하느님께 바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웃도 자신도 사랑할 수 없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떠나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만남으로써, 진정 자비의 사람이 되고 사랑할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 꿈틀거리는 그만큼 우리는 자신도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기에, 높은 자존감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지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장점과 단점, 온전함과 상처들, 자신의 한계와 내면의 어두움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런 자신을 남김없이 수용함으로써 자신도 사랑하게 됩니다. 

이제 하느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온 마음과 힘과 넋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깊이 사랑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나아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겠지요. 참으로 소중한 자신처럼 남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그리고 최고의 사랑을 받고싶듯이 극진히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깊이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애정 깊은 날이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가장 큰 계명>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모든 계명들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계명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사랑은 모든 계명들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고,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사랑이 없으면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도 않고,

자기 목숨을 바치지도 않는데, 혹시라도 사랑이 없는데도 그런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는 척’이고, 위선일 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이것이다.” 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못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도 “사랑은 무엇이다.” 라는 정의(定義)는 없는데,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은 많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하는 일이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이웃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두 사랑을 합해서 표현하면,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사랑만 있어야 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상 하나의 사랑이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3-2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하느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계명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음은 없이 겉으로만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위선자들의 단식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는 단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단식이고, 그래서 사랑 없는 거짓 단식입니다.

물론 위선자들도 단식할 때에는 실제로 밥을 굶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들이 진심으로 단식하는 것인지,

단식을 흉내 내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자기 자신의 양심도 알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위선자들의 자선은(이웃 사랑은) 이웃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명예욕입니다.

물론 위선자들도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내는 등의 자선을 실제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위선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데,

사람 속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하느님의 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자선을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또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을 주실 때에도,

계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직접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4).”

따라서 ‘사랑’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위선자들처럼 사랑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또는 겉으로만 잘하는 거짓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호세아 예언서의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하는 외침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삶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요약되며 그 사랑의 대상은 하느님과 이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은 주님의 길을 올곧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죄스러운 삶은 올곧은 길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올바른 길로 돌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앞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때,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충만하게 채워 온갖 잘못과 죄악을 녹여 버립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하느님을 심판주로 만나지 않으며 자비로우신 구세주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은 자선과 선행으로 나타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므로 그분의 사랑이 미치는 모든 피조물에게 우리의 사랑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에 목말라하십니다. 그분은 이웃 안에 계신 당신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여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분노를 거두시고 생명의 은총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도구가 되어 이웃에게 구원의 은총을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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