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월요일] 용서 (루카 6,36-38)
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다니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며,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니엘9,4ㄴ-10)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9-10)
선민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다니엘이 바빌론 유배를 초래한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3가지 단락으로 회개하는 다니엘서 9장 5-15절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다니엘서 9장 5-8절에서는 바빌론 유배가 하느님의 공의와 심판의 실현으로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며 회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다니엘서 9장 9-12절은 모세 율법에 규정된 내용이 실현되어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며 회개하는 내용이다. 9절의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키'(ki)는 '~에도 불구하고' 라는 양보의 의미로 번역하여야 한다. 즉 9절은 하느님께서 크나큰 자비와 용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께 크나큰 거역을 저질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9절 본문에서 하느님의 속성 내지는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으로 소개되고 있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심'에 해당하는 '하라하밈 웨핫쎌리호트'(harahamim wehasellihoth)는 둘 다 복수형 명사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정도를 매우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하느님의 자비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그분의 용서하심이 매우 풍성하다는 사실을 이중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특히 '자비'에 해당하는 '하라하밈'(harahamim)의 원형 '라함'(raham)은 본래 어머니의 자궁(womb), 혹은 사람의 내장(bowel)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대해 나타내는 강력한 사랑의 감정과 이에 수반하는 행동을 나타낸다.
이처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 하느님께서 뜨거운 사랑의 마음, 자비의 심정을 품으셨기에 이스라엘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사실 다니엘이 이것을 진술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거역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죄상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진술은, 이처럼 거역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외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니엘서 9장 10절과 11절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9장 5절, 6절의 진술과 유사하며,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께 대하여 크나큰 범죄를 자행했음을 자백하는 기도이다. 9장 10절의 '듣지 않고'에 해당하는 '웰로 사마으누'(wello sama(h)nu)는 '그리고 저희가 결코 듣지 않았습니다' 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특히 '저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번역된 '뻬콜 예호와'(beqol wehowa)는 '주님의 목소리'로 번역되고, 이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이 단순히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뿐 아니라 아예 하느님의 말씀 자체를 싫어하는 태도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주님의 종 예언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전파한 말씀뿐 아니라(다니엘9,6) 하느님께서 그들의 손을 의탁하여 이스라엘 앞에 내놓으신 율법까지(다니엘9,10) 선민 이스라엘이 듣지 않고 행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주님께서 ~~(부탁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에 해당하는 '나탄 레파네누'(nathan lepanenu)는 문자적으로 '그가 우리 앞에 주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처음 율법이 부여된 모세 시대에 관한 회상이 아니라 이미 부여된 그 율법들이 각각의 시대마다, 세대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통해 생생하게 선민 이스라엘에게 다시 각성되고, 그것에 대한 이행이 지속적으로 촉구되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본문에서 '법에 따라'에 해당하는 '뻬토로타이우'(bethorothaiu)의 원형 '토라'(thora)는 가르치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을 말한다.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십계명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규정들과 법령들 및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을 포함한다.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루카6,36~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6)
사람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절정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자비의 모델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루카 복음 6장 36절에서 '~처럼'으로 번역된 '카토스'(kathos; as)는 '~을 따라서' '~에 부합하여' 등과 같이 유사성과 동질성을 나타내는 전치사 '카타'(kata)와 '~같이', '~처럼'이라는 뜻이 있는 부사 '호스'(hos)의 합성어로서 '~와 같이', '~와 동일하게'라는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나약하여 늘상 죄(罪)를 저지르지만, 그 목표만큼은 절대선(善)에 두어야 하며, 그 절대선의 모델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카토스'(kathos)라는 부사가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루카 복음 6장 36절은 '~하신(것)'에 해당하는 '에스틴'(estin; is)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 (eimi)의 현재형이다.
희랍어의 현재형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불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항상 자비하신 속성을 유지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러 죄지은 인류가 멸망과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 무죄하신 예수님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드러나며, 그 사랑은 일회적이 아니라 오늘날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과 원죄성(原罪性)을 지닌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체, 말씀 앞에 부단히 인간의 자아와 본성을 내려놓고 비울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할 수 있는 신적 덕행이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말씀은,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으려면
먼저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미 받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자비 없는’, 즉 무자비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어떤 사마리아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카 9,52-55).”
여기서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모습은 무자비한 심판관의 모습과 같습니다.
두 사도의 말에는 “나는 무조건 옳다.” 라는 독선(獨善)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독선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인들을 심판하려고 하는 오만함이 생겼고,
독선과 오만에서 무자비한 태도가 생겼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나는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권한은, 또 사람을 심판하는 권한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옳은 내가 이웃의 틀린 점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오만이고, 큰 죄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느님의 큰 자비를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1티모 1,13-16.공동번역).”
만일에 하느님께서 박해자 사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고 그를 심판하셨다면,
그리고 천벌을 내리셨다면?
그러면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했을 텐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라는
신앙고백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모순되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이 힘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교회가(신앙인이) 자비보다 정의를 앞세워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한다면?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자비만 강조하다가 세상이 점점 더 악한 쪽으로 가면 어떻게 하나?
정의의 실현은 언제 이루어지나?”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을 모른 척 하여라.”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쳐야 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단, 그 방법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천벌이 내리기를 빌어도 안 되고, 저주를 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죄인을 꾸짖거나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용서하기 위해서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일마저도 하지 않고 악행을 내버려 두는 것은,
자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함께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처지의 죄인입니다.
최종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내가 의인이어서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죄인이기 때문이고, 또 그가 나의 형제이고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자비는 죄인인 내가 받은 은총을 다른 죄인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우리 사회에는 자비로운 마음이 절실합니다. 자비의 반대는 무자비이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점점 무자비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칠고 폭력적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무자비해진 것입니까? 성스러운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무자비함이 확산하는 데는 언어의 문제도 큽니다. 점점 우리말이 거칠고 척박해지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대중 매체에 이르기까지 말이 너무 거칠고, 비속어가 난무합니다. 오늘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파괴된 언어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해 주는 대로,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대방에게 더한층 관대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나의 상처부터 치유해야만 합니다. 내 안에 박힌 가시를 먼저 뽑아내야 하지요. 내가 입은 상처가 가시가 되어 다른 이들을 찌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내 안의 가시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게 악한 기운이 많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한 기운을 상대방에게 보내면 상대방도 나에게 따스한 기운을 보내 줄 것이 아닙니까? 이럴 때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더 작용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