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수요일]요나의 표징 (루카 11,29-32)

2018. 2. 21. 오전 7: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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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수요일]요나의 표징 (루카 11,29-32)


요나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 (요나 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하신다. (루카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순 제1주간 수요일제1독서(요나3,1-10)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5-6.8)


요나서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촘; tso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호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6)

당시 니네베 왕은 아시리아 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샬만에셀 4세(Shalmaneser IV; B.C.782~773), 혹은 앗슈르단 3세(Asshurdan III; B.C.772~755)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니네베 왕이 주 하느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진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 대전에 더 이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권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왕복까지 벗고 대신 자루옷 입었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에 잿더미위에 앉았다. '재'에 해당하는 '하에페르'(haeper)의 원형 '에페르'(eper)흩어 뿌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물질이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매우 가벼운 분말 상태의 찌꺼기인 재(ash)를 의미한다(민수19,10).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재 위에 앉거나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심적 고통을 나타내거나(2사무13,19; 욥2,8),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다니9,3).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를 자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자루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는 것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 누구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서쪽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온 이름없는 한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위를 하느님 대전에 내려놓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에게 은총을 구했다.

이러한 아시리아 왕의 태도는 실로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구하는 자, 회복을 간구하는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 누구나 마땅히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온 국민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7~8)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에 매우 큰 위기가 닥쳤거나 최고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성이 없는 우매한 가축들 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네베 성읍 전체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모두 다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통해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나서 3장 7~8절은 니네베 읍성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법 네 가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음식 뿐만 아니라 물까지 입에 대지 않는 완전한 단식, 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 것,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각기 악에서 떠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네번째 사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즉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8)

바로 이것 때문에 심판이 닥쳤으므로, 백성들에게 악과 폭행을 버리고 선한 길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돌아서야 한다'에 해당하는 '웨야슈브'(weyashubu)의 원형 '슈브'(shub)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폭행'에 해당하는 '훼하마스'(whehamas)의 원형 '하마스'(hamas)는  어원상 강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악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죄악이었다(창세6,11.13).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또한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神法)과 자연법(自然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義怒)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회개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이다.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29-32)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29ㄴ~30)


악한 의도로 표징을 구하는 자들(루카11,16)에게 예수님께서 진정한 표징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내용이 루카 복음 11장 29~36절에 전개된다. 여기서 '세대'로 번역된 '게네아'(genea; generation)혈통 또는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라고 표현하고 있다(마태12,39). 사실 표징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악함을 드러내는이다.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이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냈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고서도 또 다른 표징을 구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표징만을 구하는 것을 진실된 마음의 결여로 보고, 진실된 마음의 결여는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신실함의 상실이기에 이것을 '영적 절개없음'으로 보고 악하다고 질책하신 것이다.

또한 '표징'을 뜻하는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여기서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기적적인 '증거'(token)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궁금해했으며,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판단하고 식별할 수 있는 '표징'을 구한 이다. 

그리고 '요구하지만'에 해당하는 '제테이'(zetei; they seek)'발견할 때까지 찾다'를 의미하는 원형 '제테오'(zeteo)현재 직설법으로 쓰여서, 이들이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이실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구했다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의 마음으로 메시야로서의 표징을 구하는 이들에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보일 표징이 없다고 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마태오 복음 12장 40절나오듯이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나가 실제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머물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후에 니네베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감당하여, 그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징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그리스도, 즉 약속된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흘 만의 부활로서 명확하게 입증하겠다는 이다(사도1,3; 17,31).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사건이 메시야되심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징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루카 복음 11장 30절을 본다면, 이것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복음 9장 22절의 첫번째 수난 예고에 이은, 또 하나의 간접적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요나의 표징, 회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이 말씀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표징만 요구하고 있으니 ‘악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은,

어떤 놀라운 기적 등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고 싶어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뭔가를 보여주셨다고 해도,

그들은 여러 가지 트집을 잡으면서 새로운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나온 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는

“나의 죽음과 부활은 이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보여주기를

거부하시는 말씀이 되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강력한 표징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자체를 안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표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에서 ‘표징’이라는 말은,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갈림길의 신호등 같은 역할을 하는 ‘어떤 일’을 뜻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것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난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그 일을 전해 들었다는 말이 요나서에는 없지만,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요나가 탔던 배의 뱃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요나 1,6-10).

그런 그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진 다음에 하느님께 제사를 바칩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요나 1,15-16).”

그 뱃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이 니네베에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니네베는 원래는 하느님을 안 믿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도 낯선 외국인인 요나가 와서 멸망을 예고하자마자

바로 단식하면서 회개한 것은, 요나가 겪은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이고,

요나가 섬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을 표징으로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었고, 회개했고,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요나의 표징을 무시했다면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어떤 놀라운 표징을 보여주셨다면, 당시 사람들이 그 표징에 압도되어서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표징을 하나도 안 보여주시고 설교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요한 2,23-24).”


믿는 사람들은 표징이 없어도 믿고, 표징을 보게 되면 더욱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표징을 보아도 안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표징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더 깊은 차원의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냥 기복신앙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요나는 니네베라는 한 도시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였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심판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대는 유죄다.” 라고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는데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을 향해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이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멸망이 두려워서 회개한 것이긴 해도,

어떻든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니네베 사람들도 회개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회개하지 않느냐?”

이 말씀에는 너무 늦기 전에, 즉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멸망당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는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내리시려다가 취소하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요나 3,10),

아마도 원래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내리신 말씀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가 아니라,

“사십 일이 지나도록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였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주님께서 요나에게 분부하십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가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게 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갈등이 심하였겠습니까? 요나가 하느님 말씀을 피해 도망가다가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하였듯이, 그들 역시 엄청난 고뇌와 논란 끝에 하느님을 받아들였을 것이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결국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엄청난 기적이나 어떤 표징보다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염두에 두시고, 바로 그것이 이 세대 사람들에게 큰 표징이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날마다 성체성사를 통해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헛된 우상이나 찾아 헤맨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모시며,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늘 변화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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