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간 금요일]에파타!” 마르 7,31-37)

2018. 2. 9. 오전 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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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간 금요일]에파타!” 마르 7,31-37)



  아히야 예언자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찢으면서 예로보암에게 열 조각을 가지라며, 솔로몬의 손에서 나라를 찢어 내어 그에게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1열왕 11,29-32 12,19)
2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30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1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2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란다.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에파타!”곧“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열왕11,29-32; 12,19)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즉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0-31)


여기서 '새 옷'에 해당하는 '살르마 하다샤'(sallma hadasha)우선 남북으로 분열될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신생 왕국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또한 지금까지 입은 적이 없는 새 옷앞으로 이루어질 심판은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개입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서 비롯되고 준비될 것이라는 신적인 기원을 드러낸다. 이같은 상징적 주제는 이후 엘리사가 예리고의 샘을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새 그릇을 필요로 했던 사건을 통해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2열왕2,20).


한편 ''으로 번역된 '살르마'(sallma)는 어떤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정식 의복이라기 보다는 성경 용례상 밤에 덮고 잘 수 있는 '담요'(신명22,17)나 물건을 쌀 수 있는 '보자기'(1사무21,9)를 의미하는 물건이다. 그리고 열왕기 상권 11장 29절'입고 있었다'에 해당하는  '미트캇쎄'(mithkasseh)의 원형 '카싸'(kassa)'입다' 혹은 '걸치다' 정도로 번역된다.

따라서 본문은 아히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찢기에 용이한 담요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걸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찢어진 옷을 통해 왕권의 이동을 상징하는 것은 이미 예언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할 때에도 사용된 적이 있다(1사무15,27-29).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는 사울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 사울은 사무엘 예언자로부터 폐위 선고를 받고 급한 나머지 사무엘을 붙잡는 과정에서  그 옷이 찢어져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심판의 결과를 스스로 드러낸 반면에, 열왕기 상권 11장 30절에서는 예언자 아히야가 스스로 자신의 옷을 잡아서 찢음으로써 하느님의 강력한 심판 의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본문의 행동을 하느님 자신의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열왕기 상권 11장 30절의 행동은 이스라엘 왕국 분열이 우연한 사건이거나 사람의 계획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적 계획과 의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조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한다. '조각'으로 번역된 '케라임'(qeraim)의 원형 '카라으'(qarah)'찢다'라는 뜻의 동사 '카라으'(qarah)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열왕기 상권 저자가 동일 어근의 단어를 11장 30절에 1회, 31절에 2회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유예로보암이 취할 조각들이 11장 30절에서 예언자 아히야가 찢은 바로 그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국을 남북으로 가르시는 하느님의 주도적 행위를 통해서 예로보암이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왕권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을 통해 보다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열두 조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므로, 열왕기 상권 11장 31절문자 그대로 남부 유다와 유다 지파에 흡수된 시점을 말한다.  또한 여기 '내가'로 번역된 '히느니'(hinni)는 '보라'라는 뜻을 가진 감탄사 '힌'(hin)에 1인칭 단수 어미가 접미된 형태'보라! 내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문장의 새로운 전환을 강조하는 화법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 말씀을 하시는 주체인 하느님께서 친히 약속의 보증이 되셔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분명히 지킬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찢어 내어'에 해당하는 '코레아으'(qoreah)원형 '카라으'(qarah)의 능동 분사로서 예언적 문맥에서 사용되어 임박한 미래를 지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예언이 선포되는 상황에서도 계속 하느님의 행동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예언의 성취가 확실하며 오래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손에서'에서 '손'을 뜻하는 명사 '야드'(yad)단순히 인체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관용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과 돌봄 그리고 지배를 포함하는 권한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된다.

즉 이것은 '권세'(2사무8,3), '관할'(민수33,1)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권세와 관할에서 이스라엘의 10지파를 취해서 너에게 주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로보암은 요셉 지파의 공사를 독려하고 감시하는 일개 감독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솔로몬의 권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조그마한 권세만을 가진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친히 솔로몬의 권세를 강제적으로 부수어 그의 관할 아래 있던 열 지파를 찢어 내어 예로보암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복음(마르7,31~37)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2~34)


'데카폴리스'에 해당하는 '데카폴레오스'(Dekapoleos; of Decapolis)숫자 '십'(ten)을 뜻하는 '데카'(deka)'도시'를 가리키는 '폴리스'(polis)결합된 형태로서 '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들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에 위치한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헬라화된 열 개의 도시들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들이 언급하지 않은 지역을 소개하는 것은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7장 31~37절과 병행 단락인 마태오 복음 15장 29~31절에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 말고도, 예수님께서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 여럿을 치유하신 것으로 나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광범위하게 기록반면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행하신 치유 중에서 대표적인 한 사건만을 정선해서 그 치유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한 사람인데, '말더듬는 이'로 번역된 '모길랄론'(mogilalon; had an impediment in his speech; could hardly talk)기본형 '모길랄로스'(mogilalos)'어렵게'라는 뜻의 부사 '모기스'(mogis)'말하다'는 뜻의 동사 '랄레오'(laleo)에서 유래하여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더듬는 이'는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벙어리'라는 뜻보다는, 비록 어느 정도 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서 말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 7장 35절에서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손을 얹어 주십사고'

 유대 사회에서는 '손을 머리에 얹어 하는 기도'를 가리키는 안수(按手)는 널리 베풀어졌다. '손을 얹어'에 해당하는 '에피테 아우토 텐 케이라'(epithe auto ten cheira; put his hand upon him; place his hand on him; lay on by hands)상속권 수여(창세48,14-20), 직책 수여(민수27,18.23), 축복(마태19,13.15) 등을 위해서도 베풀어졌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건강 회복을 위한 안수(마태9,18; 사도9,12.17)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단순한 안수가 아니라, 마르코 복음 7장 33절에 나오는 데로 행동을 통해 그 병을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고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 여기서 '따로'에 해당하는 '카트 이디안'(kat' idian; aside)'사적으로'라는 뜻의 관용어로서 비밀리에 행한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비밀리에 그를 고쳐 주시려고 한 것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많다.

환자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기를 원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고 군중이 흥분해서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숨기기 위해서, 또한 군중 가운데서 호기심만을 추구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예수님께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치유하실 때에는 말씀으로만 하셨는데 (마르7,29.30), 여기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당시 사람들에게 침은 치료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리고 아픈 부위에 손을 대는 것도 흔히 행하던 방법이었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을 때, 그리고 침을 발라 혀에 손을 대셨을 때, 이 병자는 예수님의 극진한 자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말씀하신 당신 치유의 손길을 직접 느끼게 하셔서, 치유된 후에도 당신 사랑과 축복의 생생함을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여기서 '한숨을 내쉬신'에 해당하는 '에스테낙센'(estenaksen; he sighed; with a deep sigh)기본형 '스테나조'(stenazo)'좁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스테노스'(stenos)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스테나조'(stenazo) 동사는 '매우 답답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사람의 심정을 답답하게 하는 외적 요소에 의해 심적으로 몹시 압박감을 받는 상태(로마8,23)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귀먹고 말더듬는 것'에 대해 심적으로 압박감느끼셨다는 말인데, 그만큼 큰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매우 답답한 상태는 마르코 복음 7장 34절 후반부'열려라'말과 대조를 이룬다.


'에파타'(aphphatha)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열리다'는 뜻의 아람어 (예수님의 모국어) 음역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방인 독자를 위해 희랍어 동사 '디아노이크테티' (dianoichtheti; be opened)로 풀어 주고 있다. '디아노이크테티'(dianoichtheti)'열다'(루카24,45)는 뜻의 동사 '디아노이고'(dianoigo)의 수동태 명령법으로서 '너는 열려져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귀가 먼저 열려지고, 그 다음으로 혀의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을 뜻하지만, 앞의 예수님의 마음이 답답한 상태를 가리키는 '한숨을 내쉬신'대조된다는 점에서 '열려라'의 의미는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병자의 전체적인 상황이 풀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32-35).”


1)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치유 기적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갖 억압과 고통에서 풀어주려고 오신 ‘해방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신체장애로 인한 고통은 병고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억압하는 고통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자가 듣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장애 때문이지 그 사람 자신의 탓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6-17).”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이나 장애자들을 고쳐 주실 때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복잡한 행동을 하신 것은,

그 장애자가 볼 수는 있어도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각적인 방법으로 치유를 하신 것입니다.

또 그가 예수님을 모르고 있고, 그래서 아직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믿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2)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귀먹은 상태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또 말을 더듬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는 자기 탓이 아닌 외부의 억압으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외부의 억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나 나쁜 행실은

하느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주신 일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신 일들과 율법 문제로 논쟁을 벌이신 일들은 모두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주신 일들입니다.


3) 이 이야기를 복음 선포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에파타!” 라는 말씀을, “복음을 제대로 알아들어라.

알아들었다면 제대로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5)”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예수님은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들어야 할 복음을 제대로 듣는 일과 들은 복음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장애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6-37)”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장애를 고쳐 주셨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모순되는 일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쳐 주신 다음에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이 많습니다(마르 1,44; 5,43).

그것은 당신이 병을 잘 고치는 분으로만 소문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얻는 일에는 관심 갖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예수님 덕분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너무 기뻐서’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의 행동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불순종입니다.

따라서 그는 장애를 고친 다음에 말을 제대로 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아직은 자기의 신앙과 복음을 증언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즉 말을 제대로 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목격자들도 너무 놀라고 신기해서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제대로 믿지 않으면서

기적에 관한 소문만 퍼뜨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지만,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이를 알리지 않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목적은,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한다면 반드시 구원된다는 것을 일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일반적으로 잘 듣지 못하면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 말씀도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그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왜곡하여 전할 위험마저 있게 되지요. 그 경우 다른 이에게 끼치는 피해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느님의 목소리, 세상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세상의 많은 비극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신앙적으로 귀먹은 상태에 있다면 주님께서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며 치유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제대로 듣고 말하게 된다는 것은 참된 해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수많은 억압과 편견, 악습, 거짓 권위에 짓눌려 올바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올바른 가치관과 식별력마저 잃게 되지요. 그들에게 참된 해방이 주어진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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