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화요일]탈리타 쿰! (마르 5,21-43)

2018. 1. 30. 오전 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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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화요일]탈리타 쿰! (마르 5,21-43)


자신을 해치려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파수꾼의 소식을 듣고 다윗은,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하면서 운다. (2사무 18,9-10.14ㄴㄷ.24-25ㄱㄴ.30-19,3)
그 무렵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그때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다. 그 노새가 큰 향엽나무의 얽힌 가지들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향엽나무에 휘감기면서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리게 되고, 타고 가던 노새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10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요압에게 알려 주었다. “압살롬이 향엽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4 요압은 표창 셋을 손에 집어 들고, 압살롬의 심장에 꽂았다.
24 그때 다윗은 두 성문 사이에 앉아 있었다. 파수꾼이 성벽을 거쳐 성문 위 망대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혼자서 달려오고 있었다.
25 파수꾼이 소리쳐 이를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그가 혼자라면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다.” 하고 말하였다.
달려온 그에게 30 임금이 “물러나 거기 서 있어라.” 하니, 그가 물러나 섰다.
31 그때 에티오피아 사람이 들어와 말하였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맞서 일어난 자들의 손에서  오늘 임금님을 건져 주셨습니다.”
32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그 어린 압살롬은 무사하냐?” 하고 묻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원수들과 임금님을 해치려고 일어난 자들은  모두 그 젊은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19,1 이 말에 임금은 부르르 떨며 성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였다.
2 “임금님께서 우시며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신다.”는 말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3 그리하여 모든 군사에게 그날의 승리는 슬픔으로 변하였다. 그날 임금이 아들을 두고 마음 아파 한다는 소식을  군사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옷에 손을 댄,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일으키신다. (마르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2사무18,9-10.14ㄱㄴ.24-25ㄱㄴ.40-19,3)


"요압은 표창 셋을 손에 집어 들고, 압살롬의 심장에 꽂았다." (14)


당시 요압이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압살롬을 굳이 죽이려고 한 이유를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먼저 압살롬을 죽이지 않으면 압살롬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여러가지 정치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옹립하려는 아도니아의 왕위 즉위에(1열왕2,28-34)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을 수도 있다.

또한 과거에 암몬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다윗에 대해 반란일으킨 압살롬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명분과 여론 때문에 죽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요압의 이런 행동은 과거 그가 우리야를 살해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우리야를 죽여 다윗의 마음에 만족을 주었던 요압이 이제는 압살롬을 죽여 다윗의 마음을 찢어 놓고 있으니 말이다.


본문에서 '표창'으로 번역된 단어 '세바팀'(shebatim)의 원형 '셰베트'(shebet)는 원래 '가지치다'라는 의미이 어근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나뭇가지', '막대기'라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구약에서 175회 사용'셰베트'(shebet)는 임금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지팡이를 가리키는 '왕홀'로 번역되기도 하고(창세49,10),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매)(탈출21,20), 이스라엘 열두 '지파'(탈출28,21), 지휘관이 가지고 있는 '지휘봉'(판관5,14), 감독관의 '몽둥이'(막대기)(이사9,3)등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셰베트'(shebet)의 복수형 '셰바팀'(shebatim)본문의 정황으로 보아서 작은 막대기 끝을 날카롭게 만들어서 사람을 해칠 수 있도록 만든 무기로 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darts','spears','javelines'등으로 번역했다.


요압은 압살롬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나무로 만든 표창을 세 개씩이나 집어들고 아직 나무에 달려 있는 압살롬에게 달려간 것이다.

그리고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위기에 처한 압살롬을 죽이고 말았다.


여기서 '꽂았다'에 해당하는 '와이트카엠'(waithqaem)'던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동사 '타카으'(thaqah)3인칭 복수 목적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서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던졌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요압은 압살롬의 심장을 향해 그가 가지고 간 표창 세개 중에서 적어도 두 개 이상을 던진 것이며, 이것은 그만큼 요압이 압살롬을 확실히 죽이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마르5,21~43)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7~28)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하늘의 수인 '3' 땅의 수인 '4'를 곱한 수로서 완전을 상징한다.

마르코 복음 5장 25절에서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혈루증)을 앓았다는 것은 그 여자가 길고 긴 세월 동안 고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 여자의 병을 자신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잘못된 진단과 비과학적인 진료, 또한 터무니없는 비싼 치료비의 요구 등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주는 경우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 5장 26절에서 여자의 지병이 완전히 인간적 치유의 불능 상태빠져 있음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드러내고 있다.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여기서 여자가 예수님 뒤로 올 수 밖에 었없던 이유는,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해 여자가 남자에게, 더구나 남자의 신체를 접촉하기 위해 접근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고, 정결법상 부정한 것으로 여겨진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대중 앞에 나와서는 안되었으며,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절대로 안되었다(레위15,19~27).


따라서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자신의 신분과 상태를 숨기기 위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다.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자신이 받는 종교 율법적이고 사회적인 제약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오히려 군중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뒤로 몰래 접근했다.


육체적, 종교 율법적, 사회적, 경제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는 극한적 상황에 있었던 그 여자그 누구로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처지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사람들을 민감하게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사용한 '옷'이라고 번역된 '히마티온'(himation; garment; cloak)이라는 표현에 '투 크라스페두'(tou kraspedu)라는 표현을 부가해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마태9,20; 루카8,44).

한글 새 성경에서 마태오 루카 '옷자락 술'(the fringe of His cloak) 이라고 번역했다.


또한 '대었다'에 해당하는 '헵사토'(hepsato; and touched)부정 과거형이므로,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 한 번만 스치듯이 옷자락 술을 만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여자의 하혈병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마르5,28) 여자의 믿음그 여자를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고쳐졌다할 수 있다(마르5,34).


마르코 복음 3장 9~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이 낫기 위해 당신을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피해 말씀을 전하기 위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하신다.

이처럼 수많은 병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지만, 마르코 복음 5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의 옷자락 술을 만진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자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이라도 만져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간절하고도 굳은 신뢰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구세주)라는 신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사도5,15; 19,12참조).



마르 5,21-43 연중 제13주일(나),연중 제4주간 화요일

<치유와 소생 그 너머의 것>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목대상자 앞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자 구원자로서의 당신의 능력과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두 케이스 다 절박했고 다급했습니다. 한 사람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선지 열두 살의 나이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 딸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었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 순간 야이로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듣자마자 야이로는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무조건 달렸습니다. 군중을 뚫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선 야이로는 그분 발 앞에 털썩 엎드립니다. 그리고 간절히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야이로의 간청이 얼마나 간곡하고 열렬했던지 예수님은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그 때 또 다른 여인, 정말이지 절박한 처지에 놓인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여인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이 멈추지 않던 여인이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매일 많은 피가 자기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여인의 걱정은 정말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치유 받고 싶은 마음, 그래서 한번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여인은 꽤나 큰 무례를 범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면서 몰래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댑니다.

‘지성이면 감천’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닿습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간절한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에서 오랜 여인의 하혈을 멈추게 하시고, 이미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십니다.


지금은 예수님 공생활의 절정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치유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조차 되살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소생 사건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의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하느님, 생사의 주관자, 곧 하느님 그분이심을 치유와 소생사건을 통해서 밝히십니다.


오늘 우리는 동시에 일어난 한 여인의 치유 사건과 한 소녀의 소생 사건을 통해서 꼭 기억할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단순히 치유와 소생 사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놀라운 기적 앞에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치유와 소생 사건 그 너머의 것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사실 인간 존재라는 것,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유한한 것이 인간 생명입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치유는 일생에 단 한번이었습니다. 야이로 딸의 소생도 일생에 단 한번 뿐입니다. 끝도 없이 계속 치유 치유, 소생 소생을 외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만일 계속 치유 받고, 계속 소생되어 300살, 400살까지 생명을 연장시킨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치유와 소생 사건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 시선을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그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몇 번의 치유와 소생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권위와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분은 언젠가 이 세상이 지나가고 또 다른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때 그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인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질병과 죽음은 모두 한시적인 것이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비록 언젠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듯이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믿음의 여정(旅程) -삶은 기도요 믿음이다 /이수철 신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마르 5,22-24).”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인데,

왜 굳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려고 하셨을까?”

어떤 백인대장이 와서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집에 가시지 않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그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8,5-13).


어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가 와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집에 가시지 않았고,

말씀만으로 그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마르 7,24-30).

야이로가 한 말을 보면 몹시 급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의 집으로 가실 것 없이 바로 고쳐 주시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다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를 만나서 시간이 더욱 지체된 것도(25절-34절),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몹시 안타깝고 괴로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죽었습니다(35절).

이 상황은 라자로가 죽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뒤늦게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요한 11,5-6).”


예수님께서 일부러 뒤늦게 가신 것은,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병든 라자로가 건강을 되찾는 것보다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이 더 큰 은총입니다.)

또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라는 것을 계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경우에도, 야이로가 청한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또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라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지체하셨다고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회당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절망하지 마라. 내가 너의 딸을 살리겠다.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회당장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심으로써(마르 5,41-42),

회당장의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제 회당장이 할 일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만난 여자를 고쳐 주신 일은,

당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그저 병을 잘 고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

또는 몸의 병을 고쳐서 건강을 되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영혼 구원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7-29).”

여자가 들었다는 소문은,

예수님에게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일 것입니다.


앞의 3장 10절을 보면,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고, 또 뒤의 6장 56절을 보면,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낫게 된 일 자체는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수많은 병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치유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낫게 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바라고,

병을 고친 다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치유 이상의 ‘참된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주시려고 여자를 찾으십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마르 5,30).”

예수님도 모르는 사이에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것은 아닙니다.

여자의 치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의지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르는 척 하신 것은 여자가 스스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옷’이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다면,

또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이 말씀은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여자를 위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참된 구원과 평화와 해방을 주겠다.

이제부터는 그것을 향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삶의 깊이-간절한 믿음-2014.2.4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서의 치유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실과 간절함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치유를 간절히 청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소녀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회당장은 믿음 안에서 죽음까지 이겨 내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고통 때문에 몸도 마음도 성하지 않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치유되지 못했던 자신을 예수님만큼은 낫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호기심으로 예수님께 다가서고 밀쳐 대기까지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하고 위로하십니다.

신체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시고, 몸과 마음이 성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게 된 다윗의 통곡은 반란자를 제거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찼던 그의 신하들과는 대조됩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들이지만,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했기에 다윗은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하며 슬퍼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자신의 죄과가 자손들에게까지 물려지는 아픈 현실을 하느님께서 살피시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의 마음이 읽힙니다. 


우리도 치유받고 싶은 내면의 상처와 병들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얼마나 간절히 하느님께 치유를 청하며, 믿음을 갖고 회심과 보속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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