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 (마르 3,31-35)
다윗은 다윗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2사무 6,12ㄴ-15.17-19)
그 무렵 12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3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4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7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18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19 그는 온 백성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온 백성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하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 (마르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예수님께서그들에게,“ 누가내어머니고내형제들이냐?”하고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2사무 6,12ㄴ-15.17-19)
그 무렵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2)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3)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4)
사무엘서 하권 6장 1~11절은 다윗이 성의를 기울여 시도한 계약 궤 운반 시도가 우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중단되었음을 보도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사무엘 하권 6장 12~23절은 드디어 계약 궤 운반이 성공하여 다윗성에 안치한 사건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룬다.
다윗이 계약 궤를 다윗성으로 운반하려는 생각을 다시 가진 것은 하느님의 궤로 인하여 오벳 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재산에 주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우짜의 죽음이 계약 궤를 잘못 다룸으로 인한 재앙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다윗은 이번이야말로 계약 궤 운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준비 상황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와 병행되는 역대기에서는 무려 24절을 할애하여 계약 궤를 모실 처소를 준비하고(1역대15,1) 계약 궤를 운반할 레위인들을 임명할 것과(1역대15,2-15) 계약 궤의 이동에 있어서 성가대와 악대부들의 찬양이 있었으며(1역대15,16-21) 계약 궤를 운반하는 레위인의 직책까지(1역대15,22-24) 기술하고 있다.
즉 다윗은 계약 궤의 먼저번 운반 시도의 실패를 통해 두번째 운반은 더욱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다윗은 하느님의 궤로 인하여 오벳 에돔의 집이 복을 받은 것을 하느님의 궤로 말미암아 장차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복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며 계약 궤를 옮겨도 좋다는 하느님의 승인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사무엘 하권 6장 12절에 '모시고 올라갔다'로 번역된 '야알'(yaal)은 '올라가다'라는 뜻의 '알라'(alla)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올라가게 하다', '올리우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역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다윗이 직접 메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단지 계약 궤를 다윗성으로 올리우도록 명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 궤는 반드시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크핫 자손만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민수4,2-6) 유다 지파인 다윗이 이 일을 직접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여기서 '올리우다'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예루살렘의 지형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들여오는 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의 회복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오벳 에돔의 집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보면서 과거에 자신을 축복해 주셨던 그 하느님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두번째 계약 궤 운반시 하느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홀대한 자신의 경솔한 모습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1역대15,13).
사무엘서 하권 6장 12절에서 '기뻐하며'로 번역된 '뻬시므하'(besimhah; with rejoicing)가 나오는데, 이 '기쁨'은 하느님과 멀어진 상황에서 다시 가깝게 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전에는 악대부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머물렀지만(2사무6,5) 지금의 상황에서는 기쁨에 겨워 다윗이 주님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2사무6,14).
'주님의 궤를 맨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3)
사무엘서 하권 6장 13절은 두번째 계약 궤의 운반이 얼마나 주의 깊고 경건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멘 이들이'로 번역된 '노세에'(nosee)는 '나르다'라는 뜻의 '나사'(nasa) 동사의 복수 분사형으로 '나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역대기 상권 15장 26절에는 이들이 '레위 사람들'로 분명히 밝혀져 있고, 역대기 상권 15장 15절에서는 하느님의 궤를 채에 꿰어 그들이 어깨에 매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우짜의 사건 때에 다윗이 미리 생각하지 못해 마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하느님의 뜻대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역대기 상권 15장 13절에 나오는데로 하느님의 궤를 레위의 자손들 중에 크핫의 자손들이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를 통해 운반하였기 때문에 우짜가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옮기자'로 번역된 '와예히 키 차아두'(wayehi ki tsaadu)에서 '와예히 키'(wayehi ki)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그리고 ~할 때에'로 번역할 수 있고, '차아두'(tsaadu)는 '걸음을 걷다'라는 뜻의 '차아드'(tsaad)의 완료형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걸음을 걸었다' 이다.
여기서 '와예히 키 차아두'(wayehi ki tsaadu)는 '그들이 걸음을 걸었을 때에'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처럼 완료적인 의미가 사용된 것은 매 여섯 걸음마다가 아니라 처음 여섯 걸음을 걸은 후에 제사를 드렸음을 암시한다.
즉 다윗은 계약 궤를 멘 레위인들이 여섯 걸음을 걸어 아무런 이상이 없자, 처음 계약 궤를 운반했을 때와는 달리 하느님께서 계약 궤 운반을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왜 하필 여섯 걸음을 걸은 후에 제사를 드렸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아마도 다윗은 걸음의 수와 관계없이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몇 걸음을 걸어도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병행 구절인 역대기 상권 15장 26절에는 걸음의 수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편 본문은 제사를 드린 주체를 다윗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과거 사울은 필리스티아와의 미크마스 전투 전(前)에 사무엘 예언자의 지시를 어기고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다가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듣고 왕위 폐위 예고까지 받았으며(1사무13,8-14) 그 예고는 실제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본문은 다윗의 제사 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망도 언급되지 않으며, 다윗이 계약 궤를 다윗성에 모신 이후에도 제사를 드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제사 제도가 확연히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훗날 우찌야 임금이 분향 제단 위에서 향을 피우려고 주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나병에 걸렸던 사실(2역대26,16-21)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정 시대의 사제 직분은 어느 누구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성역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제물을 바쳤다는 본문의 표현을 그가 직접 제사를 집전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다윗이 제사를 드릴 때이 중심 인물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당시 이 제사는 사제에 의해 집전되었지만, 사무엘서 하권 저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상징인 계약 궤를 다윗성으로 모신 다윗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신정(神政) 왕국인 이스라엘의 중심 인물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사가 다윗 중심으로 진행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열왕기 상권 3장 3~4절에서 솔로몬이 직접 제물을 바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제사 집전은 사제가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대기 상권 15장 26절에 보면, 이때 드린 제물이 황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언급하고 있는데, 제사를 드린 주체가 '다윗'이 아닌 '그들'로 언급되고 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4)
다윗이 입었던 옷은 '아마포 에폿'이었다. '에폿'(epod)은 사제들이 입는 겉옷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단어이다(탈출28,4.6-14). 다윗은 사제가 아니었으므로, 이때 다윗이 입은 옷은 사제 에폿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왕복을 벗고 입은 예복이었을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다윗의 겸손함은 그가 임금의 체면까지 버리고(2사무6,20) 몸소 춤을 추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더욱이 '춤을 추었다'로 번역된 '메카르케르'(mekarker; danced)는 '빙빙 돌다', '춤추다'라는 뜻의 '카라트'(karad) 동사의 분사형이기 때문에 한 번 추고 그만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그가 이처럼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아마포 에폿'(베 에폿) 속의 맨 살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오즈'(bekol oz)인데, 이것은 힘차게 빙글빙글 도는 다윗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주님 앞에서'는 '하느님의 궤 앞에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은 '리프네 예흐와'(lione yehwa; before the LORD)인데, '주님이 보는 앞에'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와 현존을 나타내 준다.
아마도 다윗은 자신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며, 하느님의 목전에 서 있다고 느끼고 온 힘을 다하여 기쁨의 춤을 추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춤이 당시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는 백성의 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볼 때 춤을 추는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된 통치자는 하느님이시고, 자신은 다만 하느님의 대리자일 뿐임을 겸손히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르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5)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당신 자신의 혈연적인 가족 관계를 부정하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영적 의미의 가족 관계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만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혈연적 가족 관계의 부정에 있었다면, 가르침의 대상은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강제로라도 데리러 온(마르3,21) 가족들이 되었을 것이고, 가르침의 내용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35절의 결론은 영적 의미의 가족이 누군가에 대한 정의에만 머물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 의미의 가족에 대한 정의를 통해 당신 공동체의 내적 결속을 강화하신다.
당시 열 두 제자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은 보잘것 없었다(마르3,32).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공동체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의 베엘제불 논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는 그릇된 풍문과 더불어 이제 막 시작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가세하여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바로 이런 위기에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도래하는 시대는 사회적 신분이나 가문, 지식에 상관없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세상적으로 낙오된 자들도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에, 이런 위기의 순간에 펼쳐진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있는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집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계실 때 육신의 가족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르침을 중단하고 가족들을 만나셨다면, 당신을 추종하던 제자들에게도 교육상 좋지 않은 예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3장 32~33절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인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말씀하셨을 때의 표정과 어투의 단호함과 엄격함은, 공사를 명백히 구분하고, 혈연과 육정을 초월해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만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해야 할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참 가족>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느님의
참 가족에 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나의 가족인가?” 라는 뜻인데,
실제 속뜻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됩니다.
(가족이
‘되는’ 기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당신의 참 가족으로서 ‘사는’ 원리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은 원래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 아니었다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사는’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 생활이 완성되는 일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고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원래 다 당신의 가족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사는’ 사람입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 경우에는, 가족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을 향주삼덕의 실천으로,
즉 믿음, 희망, 사랑의 실천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다른 가족을 믿어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공동체가 위험해집니다.
믿음이 없어서 공동체가 깨진다면 개인의 구원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혈연의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 같은 믿음을(같은 신앙과 종교를)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서로 믿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일에 가족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가정이 있다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구약성경 토빗기를 보면, 토빗이 아내 안나를 믿지 못해서 다투고,
그래서 큰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야기가 나옵니다(토빗 2,11-14).
그렇잖아도 앞을 못 보게 되어서 고통을 겪던 토빗이었는데,
부부가 서로 믿었다면, 서로 힘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희망’은 믿음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믿음은 희망과 하나입니다.
우리는
희망하기 때문에 믿고 있고, 믿기 때문에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믿고 있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희망하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희망하지 않고, 희망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가족 중에 지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동포들의 구원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 9,1-3).”
표현이
좀 과격하긴 해도, 이 말은 동포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했지만,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는 선교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의 가족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심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간절한 심정으로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가족에게는 더욱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사랑은 지금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했는데(1코린 13,2),
이
말을 넓게 적용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가족으로서 함께 살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맹목적인 애착심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과 희망 안에서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가족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볼 때,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죄를 함께 짓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죄를 막고,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참된 가족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부모와 자식 관계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식의 혈연관계로만 강조하는 시대는 지난 듯싶습니다. 평생 신의를 지키며 사는 부부들도 많지만, 혼인을 단순한 사회적 계약으로 여기고 계약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갈라서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 자식 관계가 정다운 것도 아닙니다. 가족이라면 함께 몸을 부대끼며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주거 공간이 넓어지고 삶이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가족들 간의 끈끈한 유대는 약해진 듯합니다.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던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가족이 되는 기준을 정해 주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들끼리도 서로의 생각과 뜻을 읽어 주지 않고, 희생과 배려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보다 못한 가족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된 가족의 기준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나누며 이웃에게 전하는, 실천하는 사랑에 있습니다.
다윗이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모시려고 벌이는 축제의 장은 단순히 자신의 권세와 치적을 쌓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을 집에 모시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듯이, 내 가족과 이웃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 안에 새로운 가족이 탄생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