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전 토요일] 세례 (마르 1,7-11)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그 증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라고 한다. (1요한 5,5-13)
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ㅇ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신다. (마르 1,7-11)
그때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1요한5,5-13)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5~6)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5)
'누구입니까'로 번역된 '티스 에스틴'(tis estin)에서 의문 대명사 '티스'(tis)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의법적 표현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승리를 매우 구체적이며 개인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원리와 수단이기는 하지만(1요한5,4), 삶속에서 실제적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주체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이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니콘'(ho nikon)에서 '니콘'(nikon)은 현재분사로서 계속적으로 '쳐부수는 자','정복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완성적 차원의 승리가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계속되는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면서 승리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많은 이단들의 속임이 있었는데, 그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감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그리스도론적인 메시지와 함께 당시에 있었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6)
사도 요한은 이제 요한1서 5장 6~9절에서 육화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확실한 믿음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물'로 번역된 '휘다토스'(hydatos)와 '피'로 번역된 '하이마토스'(haimatos)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많다.
첫째는 물과 피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물과 피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물과 피로써 수난을 상징한다는 견해이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절의 물과 피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연관시켜 해석하였다.
세째로 물과 피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마지막 생애를 마감하실 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이라는 견해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께서 물세례(수세; 水洗)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인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셨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생활 활동의 시작을 상징하는 물과 공생활 활동의 완성을 상징하는 피란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행하신 활동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새 성경은 '오신'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은 '오신 분'(호 엘톤; ho elthon)이다.
'엘톤'(elthon)의 원형 '에르코마이'(erchomai)는 기본적으로 '오다'(come), '가다'(go)란 뜻인데, 여기에서는 부정 과거 분사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이미 우리에게로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이단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 되심이 세례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증명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또한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not~but'의 용법과 같이 전자를 부정함으로써 후자의 긍정적 의미를 보다 강조하는 '우크~알르'(uk~all)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만이 아니라'에서 '만'(only)에 해당하는 '모논'(monon)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물' 단 하나와만 연관시키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잠시 동안만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했다고 보는 견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사도 요한은 '단 하나 그것만'이란 매우 강한 배타적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여 이러한 이단 사상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며, 또한 '우크'(uk)란 부정어를 사용하여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반절의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로 번역된 '엔 토 휘다티 카이 엔 토 하이마티'(en to hydati kai en to haimati)에서는 '토'(to)란 정관사와 더불어 '~안에'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엔'이 '물'과 '피'란 단어 앞에 개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물'뿐 아니라 '피'도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며, 둘 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됨을 역설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증언하시는 분'으로 번역된 '토 마르튀룬'(to martyrun)의 원형 '마르튀레오'(martyreo)는 법적 용어로서 어떤 사실을 공적으로 증언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사도22,5; 1코린15,15).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성령의 역사(役事)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곧 성령께서 친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느님의 아드님 되심을 증언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튀룬'(martyrun)은 현재 분사이므로, 그 증거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요한15,26; 16,13.14).
'성령은 진리입니다'로 번역된 '호티 토 프뉴마 에스틴 헤 알레테이아' (hoti to pneuma estin he alletheia)를 직역하면,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because the Spirit is truth)가 된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그 성령이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며, 그가 진리 자체이시므로 그가 증거하는 내용 역시 진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역시 진리인 것이다. 성령께서 진리라는 사실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내용이다(요한14,17).
한편 본문의 시제는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변치 않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령이 진리'라는 사실은 예수님 활동 당시에도, 초대 교회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변치않는 진리임을 나타낸다.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복음(마르1,7~11)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0~11)
마르코 복음 1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를 받으셨다'에 해당하는 '에밥티스테'(ebaptisthe)의 원형 '밥티조'(baptizo)는 '물에 담그다'(2열왕5,14)는 뜻 뿐만 아니라 '물로 씻는다'(루카11,38)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세례는 물속에 들어가 씻기우는 의식으로서 죄씻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세례를 믿는 이들 역시 모두 다 받는다는 측면에서 신약의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3~4)
이것을 구약의 제사 제도의 차원에서 보면, 완전한 제물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동참하여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1장 8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계시되었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복음 1장 9절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모순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즉 그분은 모든 인간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영광의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죄인인 모든 인간들과 동일시되어 세례를 받으시는 육화(강생)하신 '겸손한 인간', 이시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몸소 세례 의식에 동참하심으로써, 그것으로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예표하시고, 세례가 인간 구원의 절대 필수 조건임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죄씻음의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새로운 의미를 더하셨다.
한편 마르코 복음 1장 10절에 나오는 '하늘'에 해당하는 '투스 우라누스' (tous ouranous; the heaven)는 복수형이므로 직역하면 '그 하늘들'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언급하는 '샤마임'(shamaim)과 동일한 형태로써 하늘이 삼층천(눈에 보이는 하늘, 물을 담아둔 곳, 천국)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우주관에서 기인한 표현이다.
그리고 '갈라지며'에 해당하는 '스키조메노스'(schizomenos; opend)의 원형은 '스키조'(schizo)인데, 마태오나 루카 복음사가는 '열다'라는 뜻의 '아노이고' (anoigo)라고 기록한 반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찢다'(tear) 또는 '가르다' (split)라는 뜻의 '스키조'(schizo)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수세(水洗)를 통한 천상의 변화를 훨씬 더 극적으로 묘사했다.
성경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현상은 주로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나타내기 위한 묵시문학적 표현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세례가 의미하는 그의 죽음과 부활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막혔던 세상과의 친교를 허락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오셨다는 것은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합쳐진 세례성사의 완전한 모습과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또한 '성령의 내려오심'에 해당하는 '카타바이논'(katabainon; descending)는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을 위한 '기름부음'이라는 의미가 있다(이사61,1).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성령으로 도유된 자'라는 뜻이며, 구약에서는 왕, 사제, 예언자들에게 '기름부음'을 통해 직책이 주어졌듯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바로 이 삼중직에 대한 공적 인정이며, 위임의 뜻이 있는 것이다.
즉 만왕의 왕, 우주의 왕, 영원한 대사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시며 참된 예언자시라는 당신의 지상 사명이 이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루카 복음 3장 2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오신 것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부 하느님께 바친 기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느님 음성의 메아리나 인간의 음성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되심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1절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에이'(ei)는 현재 직설법이고, 그러나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의 '내 마음에 들다'에 해당하는 '유도케사'(eudokesa)는 부정 과거 직설법이다.
전자의 문장은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정확히 묘사하는 구절로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자 관계가 영속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현재형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후자의 '마음에 들다', '기뻐하다'라고 번역된 '유도케사'(eudokesa)의 원형 '유도케오'(eudokeo)는 '마음에 들다'는 뜻과 더불어 '동의하다', '결정하다'는 뜻도 있다.
여기서 이 단어가 부정 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세우신 사건은 세례를 받으신 당시에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계획되어 과거에 결정된 일이었고,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단지 그 사실을 확인하는 공적 절차였을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고백합니다. 내 영혼을 뒤흔들 정도의 기쁜 소식은 누구에겐가 전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무엇을 ‘증언’한다는 것은 사실을 입증하고 증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증언은 삶을 변화시킨 체험을 전하는 것이기에 객관적인 지식이나 정보로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증언의 진실과 확실성은 오직 증언하는 사람의 삶의 회심과 놀라운 변화, 그가 어떤 역경에서도 기뻐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하느님께 희망하는 모습 속에서 드러납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죽음과 악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믿지 않을 수 없음을, 자신의 삶의 증언을 통해 고백하고자 합니다. 증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도 제자들은 실망하지 않고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지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에서부터 전해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했고, 사람들의 칭송에도 자신을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낮춥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증언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후 헤로데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 주님이심을 확신하며 살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내 가족과 이웃에게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