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토요일] 요한 (루카 1,57-66)

2017. 12. 23. 오전 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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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 토요일] 요한 (루카 1,57-66)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주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리라고 한다. (말라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엘리사벳이 할례식에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자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여 이 일이 유다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된다. (루카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말라3,1-4.23-24)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그는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은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1~2)

'말라기'(malaki)란 이름은 '나의 사자'(使者)라는 뜻으로 말라키서 3장 1절에서 나왔다. 기원전 539년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독려에 힘입어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B.C.520~515년), 성전 전례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사제들이 스스로 제사와 전례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백성들은 십일조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이방 민족과 통혼하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주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말라키서 3장 3절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은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오늘 독서의 말씀은 말라기의 네 번째 신탁(2,17~3,5)에 포함된다. 여기서 예언자는 주님의 공정 또는 정의(justitia)를 선포한다. 공정 정의와 더불어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에 속한다. 

그분은 자애로우실 뿐만 아니라 공정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악을 적당히 보아 넘기지 않으신다.


따라서 주님께서 악인들을 좋아하신다고 말하고, 주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은 그분께 대한 모독이다. 그분은 대장간의 불이 금과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빨래터의 잿물이 옷에서 더러운 때를 빨아내듯,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정화하실 것이다.


주님 심판과 정화의 날에 앞서 먼저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킬 것이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그는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3,1~2참조)


사자를 보내어 주님의 길을 미리 닦아 놓는다는 생각은 이사야서 40장 1~11절과 맥을 같이 한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주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신다는 것은 그곳이 주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장소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주님께서 심판하실 자들의 목록 말라키서 3장 5절에 열거된다. 주술사, 간음하는 자(배우자를 배신하는 것과 우상숭배 모두를 뜻함), 거짓 맹세 하는 자, 품팔이 꾼의 품삯을 떼어 먹는 자,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을 억압하는 자, 주님께 불경하는 자들이다.


말라키서의 마지막 세 구절(3,22~24)은 신탁 여섯 개에 덧붙은 부록 같지만, 엘리야 예언자를 시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렙 산(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내린 율법과 계명을  되새기라고 당부하신다(3,22).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불마차를 타고 승천했던 엘리야 예언자 (2열왕2,11)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말씀이 선포된다(3,23~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24ㄱ)

말라키서 3장 24절에서는 엘리야의 사명을 통하여 주님과 선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예언함과 더불어 그의 사명을 거부하는 자에 대하여 경고를 주고 있다.

 말라키서 3장 24절은 장차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으로 올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예고된다(루카1,17). 본문에서 '부모'에 해당하는 '아보트'(aboth), '아보탐'(abotham)모두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관련해서 그의 사명에 적용한 주님의 천사는 루카복음 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여기서 '부모의 마음' '의인들의 생각' 같은 뜻의 표현으로 보고, '자녀'와  '순종하지 않는 자들' 같은 뜻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경건한 조상들의 신앙을 불경건한 후손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하여 그들의 신앙을 조상들의 신앙처럼 경건하게 만든다는 뜻이 된다.


말라키 예언자 당대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당시의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과거에 신앙의 조상들이 주님 대전에 가졌던 경건하고 의로운 신앙의 결핍이었다.

이를 감안할 때 세례자 요한은 부모들, 즉 이스라엘의 경건한 조상들이 가졌던 그 신앙심을 자녀들, 즉 그 후세대들이 회복하여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사명을 맡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돌리리라'에 해당하는 '웨헤쉬브'(weheshib; and he will turn)'그가 회복시킬 것이다'(he will restore)라는 의미인데, 문맥과 구세사의 전개 과정을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오늘 복음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 ('하느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뜻)의 탄생 예고가 나온다. 구약의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성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고, 회개를 통해 주님을 잘 맞이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복음(루카1,57~66)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즈카르야는 글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59~61.63)


루카 복음 1장 59절의 '할례식에'로 번역된 '페리테메인'(peritemein; to ircumcise)원형 '페리템노'(peritemno)는 원래 '둘레를 자르다','칼자국을 내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할례 시행을 나타내는 단어로 굳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남자 성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 행위를 통해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백성임을 인정받았고(1사무17,26), 또한 하느님과의 계약의 표징으로서 그의 백성됨을 인정받았다(창세17,11).


또한 이 할례출생 후 8일째 되는 날에 시행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출산한 어머니가 7일 동안 부정했듯이(레위12,2) 그 아이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통해 7일간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하느님의 계약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할례를 행하는 생후 8일째는 현대 의학에서 인간이 가장 고통을 적게 느끼고, 또한 후유증이 거의 없는 때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 당시 자녀의 할례는 원래 가장에 의해서 시행되는데, 친척들과 이웃들이 함께 참석하여 공개적 의식으로 치러졌다.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친척들과 이웃들은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짓고자 고집한다. 여기서 '부르려 하였다'로 번역된 '에칼룬'(ekaloun; they called; they were going to name)'부르다','이름짓다' 등의 뜻을 가진 '칼레오'(kaleo)미완료 과거형으로 이름을 짓고자 했던 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 준다.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그들이 그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라고 부르고자 계속 고집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고집은 그 당시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던 이스라엘의 사회 풍습과 이름을 중요시했던 유대인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여기서 '안됩니다'에 해당하는 '우키'(ouchi; no!)는 부정사 '우'(ou) 강조형으로서 '결코 ~아니다'라는 강렬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 단어는 뒤에 '그러나' 등의 뜻을 가진 '알라'(alla)와 연결되어 더욱 더 강한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엘리사벳은 천사의 예언(루카1,13)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에 따라 자식의 이름을 짓는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닌 '요한'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벳의 이러한 담대함은 바로 하느님의 계약을 확신하는 믿음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인의 이름으로는 흔했는데,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뜻의 히브리어 '요하난'(yohanan)에서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늙어서 수태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를 세우시는 큰 은혜가 동시에 잘 표현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여기서 '글쓰는 판'에 해당하는 '피나키디온'(pinakidion; a writing tablet)글을 쓰는 판으로서(이사8,1) 고대 아시리아나 바빌론에서는 구운 점토판을  많이 사용하였고,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돌판(탈출24,12)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의 서판은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으로서 그곳에 철필로 글을 쓰곤 하였다.


여기서 서판에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즈카르야의 모습은 1장 22절에서 천사의 예언을 믿지 못했던 이전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데, 이것은 이름을 짓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표현하는 믿음의 행동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즈카르야가 주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이후에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바로 그 현장에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는 기적들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혜는 불신의 허울을 벗고 그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그 순간에 기적처럼 쏟아 부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 풀려'로 번역된 '아네욱테'(aneuchthe; was opened and loosed)'닫혀진 것을 열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노이고'(anoigo)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즈카르야의 입과 혀가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순식간에 정상으로 회복되어 말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표현은 완전히 봉해졌던 입이 열렸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그 기능이 정지되었던 혀가 말하는 기능을 회복했다는 시적인 표현이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말하는 기능이 회복된 즈카르야가 최초로 내뱉은 말하느님을 찬미하는 언어들이었다. 

여기서 '찬미하였다'로 번역된 '율로곤'(eulogon; and praised; praising)은 '찬양하다', '축복하다' 등의 의미의 '율로게오'(eulogeo)현재 분사형이므로 '말하는 것''찬미하는 것'동시에 이루어진 일임을 나타내준다.

또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로 번역된 '엘랄레이'(elalei; he began to speak)'소리내다', '말하다' 등의 뜻을 가진 '랄레오'(laleo)미완료형으로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즈카르야는 자신에게 내려온 천사의 저주가 풀려지는 그 순간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유롭게 된 그 입과 혀를 가지고 가장 먼저 하느님을 계속하여 찬미했던 것이다. 

엘리사벳이 수태한지 약 10개월간의 긴 고통과 침묵의 시간을 끝마치고, 하느님을 향해 외치는 찬미는 세상의 그 어떤 찬미보다도 더 감동스러웠을 것이며, 지난 10개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음에 대한 깊은 회개가 따라왔을 것이고, 예언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서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에 신실한 분이심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은 것은,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가(루카 1,13) 실현된 일입니다.

(천사의 예고는 실제로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즈카르야는 자신과 엘리사벳의 나이가 많다는 것만 생각하고서

천사의 말을 못 믿었지만(루카 1,18),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아기에 대해서 천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고만 생각합니다.

즉 아이를 못 낳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은 것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주님께서 전 인류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14-15ㄱ).”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만일에 이웃과 친척들이 태어난 아기가 어떤 인물이 될지를 알았다면,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1,59-63).”

이웃과 친척들이 왜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는 것과

가문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지어 주는 것에 대해서 놀라워합니다.

(‘요한’은 ‘야훼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지시했었습니다(루카 1,13).

즈카르야가 그 지시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으로 지은 것은,

그가 천사의 말을 모두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는 처음에는 아기의 탄생 자체를 못 믿었지만,

아마도 엘리사벳이 임신했음을 알게 된 그 순간에(루카 1,24)

천사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속에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말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었기 때문에, 그는 아기가 태어나면

자기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도 믿었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과 믿음 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 속에서 기다리는 일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은,

의심, 불안, 두려움 등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입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4-66).”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도 표징이고, 다시 말을 하게 된 것도 표징입니다.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믿음 없이 사는, 또는 불충실한 신앙인들에 대한

징계성 표징으로, 그리고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은,

세례자 요한의 임무를 나타내는 표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임무를 나타내는 표징.)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루카복음 1장 68절-79절의 ‘즈카르야의 노래’가 그 찬미가였을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 일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찬미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즈카르야의 노래’를 제대로 듣지 않았거나

들었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라고 말한 것은

‘즈카르야의 노래’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못 낳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과

말을 못하고 있던 즈카르야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 등,

겉으로 보이는 일들만 보고,

그 일들의 진짜 의미와 중요성 등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자체는 중요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 탄생의 서막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즈카르야는 이렇게 찬미하고 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6-79).”

여기서 중요한 말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밝혀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단순한 명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날이고, 우리의 구원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의 명절처럼 지내면 안 되고,

더욱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모세신부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고 나서, 침묵하며 많은 상념에 잠겼을 것입니다. 구세주의 앞길을 준비하는 위대한 ‘예언자의 아버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헤아리도록 주변의 환경과 차단됩니다. 즈카르야의 모습은 말문이 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할례식에서 아기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려 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즈카르야에게 확인합니다. 즈카르야는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깊이 되새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 준 대로 하였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입이 풀려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대로, 즈카르야는 ‘은총’의 아들을 품에 안고 감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이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탄이 눈앞까지 다가온 이때에 우리는 즈카르야처럼 침묵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새기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왔으니 머리를 들고 허리를 펴서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세속적으로 성탄을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잘 모시도록 우리가 준비하기를 바라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신성을 알아보고 만지고, 그 음성을 듣기를 바라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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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박해 (마태 10,17-22)17.12.26조회 194[주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요한 1,1-18)17.12.25조회 200[대림 제3주간 토요일] 요한 (루카 1,57-66)17.12.23조회 53[대림 제3주간 금요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 1,46-56)17.12.22조회 59[대림 제3주간 목요일]행복 (루카 1,39-45)17.12.21조회 55[대림 제3주간 수요일] 주님의 종 (루카 1,26-38)17.12.20조회 50[대림 제3주간 화요일]세례자 요한(루카 1,5-25)17.12.19조회 49[대림 제3주간 월요일]임마누엘 (마태 1,18-24)17.12.18조회 322[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 (마태 17,10-13)17.12.16조회 242[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마태 11,16-19)17.12.15조회 52[대림 제2주간 목요일]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마태 11,11-15)17.12.14조회 48[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내 멍에 (마태 11,28-30)17.12.13조회 50[대림 제2주간 화요일]길 잃은 양을 찾아서 (마태 18,12-14)17.12.12조회 53[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 병자치유 (루카 5,17-26)17.12.11조회 158[대림 제1주간 토요일]거저 주어라 (마태 9,35─10,1.6-8)17.12.09조회 48[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주님의 종 (루카 1,26-38)17.12.08조회 55[대림 제1주간 목요일] ‘주님, 주님!’ (마태 7,21.24-27)17.12.07조회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