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마태 11,16-19)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라고 한다. (이사야 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시편 1,1-2.3.4와 6(◎ 요한 8,12 참조)
◎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가 들렸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한다고 하신다. (마태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사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8)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은 주님을 떠나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토로된다.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 백성이 번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명령과 규정을 주심으로서 옳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였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루'(lu)는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했더라면'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경을 반영한다(민수20,3; 22,29; 여호7,7; 판관8,29).새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로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0,13)을 경청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축복이 아닌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풍성한 평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심령과 삶에 놓인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서(시편68,20)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의 평화'에 해당하는 '셸로메카'(shellomeka)의 원형 '샬롬'(shal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well-being)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생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평화를 강물에 비유한다.이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풍성한 소출을 맺게하는 물이 풍성한 강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넘치는 삶,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살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축복은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로움'은 앞에 제시된 '평화'와 더불어 주님의 통치의 성격과 관련된다(이사32,17). 사실 의로움은 평화를 초래하는 원천이다.
여기서 '의로움'(정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kah)는 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삶의 태도, 의롭고 정직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 의로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로움을 누릴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삶으로까지 확대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 물결 같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이다. 바다 물결은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한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연결되면서 계속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의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들의 삶에서는 마치 바다 물결같이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힘입게 하며, 그야말로 '샬롬'(shallom), 즉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형통한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세울 것이다.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19)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이란 표현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9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축복을 성취하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 즉 저주스러운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흩어졌으며, 남부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면서도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가는 무너졌으며, 왕의 자손들 역시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민족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의 수효는 급감하고 말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축복으로 여겨졌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된 번성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본문은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 상반절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미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느님의 명칭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와 성품, 사명과 활동 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느님 대전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제들의 나라(탈출19,5.6)로 삼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거룩한 직책을 박탈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같은 영예로운 이름, 그 안에 함축된 복된 직책과 임무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업신여김으로써 그 모든 축복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바빌론에 의해 패망을 당하여 결국 그들이 지닌 거룩한 이름과 정체성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예수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했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선포는 따로 떨어져 있는 다른 선포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로 이어지는 선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려면
먼저
회개를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회개를 하게 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마귀가 들렸다고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싫어하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예수님도 싫어한 것은,
사실은 회개하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는 아이들과 같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철없는 아이들처럼 어리석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대’ 라는 말은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의
회개 선포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데,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마태 13,13).
이
말은, 그들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서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여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들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고집 센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즉
구원과 생명의 은총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시는 분인데,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만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시는 빵은 거부하고 돌을 청하는 자들이고,
주시는 생선은 거부하고 뱀을 청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혹시
세상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잠시
손에 쥐었던 그것들은 언젠가는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길이
지푸라기를 삼키듯, 검불이 불꽃에 스러지듯,
그들의 뿌리는 썩고 그들의 꽃은 먼지처럼 날아가리라(이사 5,24).”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라는 말씀은, “요한이 한 일들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은
그
일들의 결과로써 증명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거부한 사람들이 많지만,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얻은 구원의 은총은,
세례자
요한은 마귀 들린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또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예수님을 믿는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6).”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자,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보아 넘기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그들의 슬픔과 고뇌를 받아 주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먹보요 술꾼’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에 귀를 막고, 보고 싶지 않은 대상에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러기에 편견과 선입견이 당연한 것으로 그들 안에 자리 잡습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선입관과 비판에 대하여 ‘장터에서 패를 갈라놓고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인생이 연극 무대라고 하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때는 통곡하는 역할을 하고 또 다른 때는 박장대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쁨과 슬픔으로 짜인 옷감과 같습니다.
우리가 소외된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패를 갈라 싸우며 회개하지 않는 무리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자 헌신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비방한다면, 우리는 자기 착각에 빠지고 시기심에 갇혀 빈정거리는 사람이 되고, 회개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일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 그 진면모가 알려져 있지 않아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꾸준히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모욕과 수치 가운데서 더 진가를 발휘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 사람을 단련시키고 완성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영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두고, 장터에서 패를 갈라놓고 노는 아이들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패는 통곡을 하며 장례 놀이를 하고, 다른 한 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지만 아무도 장단을 맞추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주석 성경』은 통곡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외침을 말하고, 잔치 놀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는 슬픔과 기쁨이 어우러진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관념으로 삶의 자리와 동떨어진 그들만의 고상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를 위한 외침도, 구원의 기쁜 소식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예수님을 두고 “저 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빈정댈 뿐이었습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지닙니다. 그래서 연꽃을 두고 군자의 모습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우리 삶도 연꽃처럼 세상의 현실 속에 깊이 들어가 아픔과 기쁨을 함께하면서도 세상 것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주님께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살면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때로는 ‘먹보요 술꾼’처럼 흐트러져 보여도 중심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하겠습니까?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 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져 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 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라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