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나를 따르라 (마태 4,18-22)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바오로 사도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다며,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로마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가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른다. (마태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로마10,9-18)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9-10)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은 믿음의 의로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하고'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스'(homollogeses)의 원형 '호몰레게오'(homollogeo; confess)는 '함께', '동시에'란 뜻을 지닌 '호무'(homu)와 '말함' 이란 뜻이 있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 '동시에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실제로는 주로 법정 서약과 약속 혹은 고백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러한 고백은 공개적 성격을 갖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서원하다'라는 뜻의 '나다르'(nadar), '맹세하다' 라는 뜻의 '샤바'(shaba)등의 역어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호몰레게오'(homollogeo)를 '공개적으로 고백 또는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진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퀴리오스'(kyrios)는 일반적 경칭으로 영어의 'Sir'이나 독일어의 'Herr' 의 의미가 있다.
② 로마 황제의 일반적 호칭이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③ 그리스 신들의 이름 앞에 붙여, 인간과 다른 영역에 있는 신을 나타낸다.
④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70인역(LXX)에서 하느님의 명칭인 야훼의 역어로 사용되어 유일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을 '퀴리오스'(kyrios)라고 공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황제, 더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유일신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시금석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Dominus)로 시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神聖)과 존귀하심, 그리고 믿는 자 자신이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 사이에 이것은 신앙 고백의 신조(credo)로 사용되었고, 세례의식에서 고백의 문구로 사용되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공개적 진술과 함께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모두 필수이지만, 굳이 논리적 순서를 따진다면 '믿음'이 '고백'에 우선한다.
여기서 '믿으면'으로 번역된 '피스튜세스'(pisteuses)는 '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특히 여기서 과거의 일회적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제인 부정 과거형을 사용하여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 믿음임을 보여준다.
이 믿음은 앞에 나온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단정짓는데, 이 부활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모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는 확고한 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서약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0)
로마서 10장 10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원리를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9절의 말씀이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고 있고 9절 내용의 반복이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회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으로'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흔히 '마음'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레브'(leb)와 '레바브'(lebab)의 역어로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영적, 지적 생활의 자리, 곧 인간의 내적 본성이며, 책임의 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전체의 인간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카르디아'(kardia)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맨 처음에 하느님께 순종할 것인지,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도 되고, 신앙의 자리도 되는 것이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믿음은 감상적 충동이나 추상적 사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고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10절에서 그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의로움'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타이'(pisteuetai)나 '고백하여'에 해당하는 '호몰로게이타이'(homollogeitai)가 모두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은 믿고 고백하는 주체가 각 개인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형이란 사실은 이러한 믿음과 고백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과 고백의 주체가 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총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18-22).”
마태오복음만
보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어부들을 보셨고,
보시자마자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응답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40-42).”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이미
어부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자가 될 준비를 하면서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일과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 사이에는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떤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 놓은 시점에 맞추신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흥적인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
또는 어부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에 길을 갈 때,
제자는
항상 스승의 뒤에서 따라가는 관습에서 온 표현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서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사람
낚는 어부’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만일에
그들의 직업이 다른 일이었다면,
직업에 맞게 다른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서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물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물속’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 밖’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제
어부들은 먹고사는 일만 생각하는 인생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부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직업 덕분에
그 두 인생이 선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일은(마태 19,27),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즉 인생 전부를 버린 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음을 뜻합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 희망, 사랑 등만 필요하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필요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필요 없으니까 모두 버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 입장에서 ‘사람 낚는 어부’ 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물속에 있다가 사도들에 의해서 물 밖으로 꺼내진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길’을 몰라서 방황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그 길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서 먹고사는 일만 생각했든지 간에
어떻든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 인생에서
구원과
생명을 향해서 가는 인생으로 바뀐 사람들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물 밖으로 꺼내진 다음에 할 일은,
계속해서
구원과 생명만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물속을
그리워해도 안 되고, 되돌아가려고 해도 안 되고,
버리고
떠난 것들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면 안 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일은 사도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들처럼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야 합니다.
먹고사는
일에만 집착하는 세속 사람들에게,
또는
인생을 변화시키지 않고 세속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3-4).”
물속에서
물 밖으로 나온 다음에도,
즉
구원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세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 4,8).”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망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런 부르심이 일상생활 중에서 일어난다는 점에 먼저 머무르고 싶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모두, 생업에 몰두하다가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지요.
흔히 우리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또는 특수한 사람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부르심이 있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심지어 지쳤거나 고통 중에도, 억울할 때마저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를 요구하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우리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와 희생, 인내가 그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의 사랑과 관심이 상대방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당당하게 행동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문제와 걱정,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만큼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을 받아 주고, 그들의 벗이 되어 준다면, 우리는 분명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축일에
사도 성 안드레아가 못박혀 매달려서 죽은 X자형 십자가를 생각하며 지난번 그리스 성지순례의 여정 중에 묵주의 기도를 하는데 이런 깨달음과 묵상을 주셨다.
보통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면 사흘,그러니까 72시간이면 죽는다고 한다.
못이 살갗을 뚫고 들어와 근육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흘러 피가 폐에 가득차 고이면 죽는데, 그것이 7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비르짓다 성녀가 받은 묵시대로 예수님 당신 신성(神性)으로 헤아린 크고작은 매를 5,480대를 맞아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았기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뒤에 6시간 만에 운명하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도 말씀 한마디가 힘든 상태에서 가상칠언(架上七言)을 하셨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너의 어머니시다."
"정녕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리라."
"목마르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그런데, 사도 성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서 48시간만에 죽었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에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더 인도하고 구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예수님과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면서도 주님께서 목숨을 거두어가시는 그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시는 그 열정이 나를 감동시켜서 이 사실만 생각하면 성지순례 내내 내 눈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십자가에 못박힌 후 이틀 뒤에 하늘에서 큰 빛이 내려와 그 영혼을 거두어 가셨다.
주님께서는 사도 성 안드레아의 선교지요, 순교지인 빠트라스를 떠나 내가 순례버스안에서 묵주의 기도를 하는데, 기도 중에 이런 깨달음을 주셨다.
"안드레아 신부야!
너는 너의 주보이신 안드레아 사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네가 가진 아담의 이기적 자아와 본성의 요소는 나 주님 대전에 도무지 필요없다는 뜻으로 X표를 하고,
그 X표가 바로 그리스도인 나 예수의 이름이기에, 그리스도 예수인 내가 항상 너의 주인이요 주님으로 역사(役事)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목숨이 붙어 있어 사도 성 안드레아 영명축일을 맞이한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기에 생일이 11월 23일이니 제일 가까운 축일이 오늘 11월 30일 사도 성 안드레아 축일이어서 영명축일을 보낸다.
예수님, 감히 예수님 말고~~
사도 안드레아 성인의 아주 조금이라도 닮으면 좋겠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안드레아는 베사이다 출신으로 시몬 베드로와 형제다.
안드레아는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
그가 스승 세례자 요한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마침 그 옆을 지나갔다.
이를 본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라고 말했다.
순간 안드레아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요한을 보고 물었다 . "당신은 왜 나를 따라옵니까?"
그러자 요한은 "선생님, 선생님이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찬찬히 살핀 후에 나지막이 말했다.
"와서 보시오. 나와 함께 갑시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갔다. 때는 네 시쯤이었다.
도착한 곳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집이었다.
그 집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안드레아를 바라보시고 입을 떼셨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안드레아 자신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이며 직업은 어부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씀을 이어나갔다.
안드레아는 밤이 되어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예수의 말씀은 안드레아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 잡았다.
다음날 부랴부랴 집에 돌아온 안드레아는 형 시몬 베드로를 보자마자 말했다.
"형님, 어제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무슨 소리냐? 차근차근 말해보렴."
안드레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세히 전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시몬은
"그러면 나도 한번 뵙고 싶구나. 그분이 어디 계시니? 지금 당장 가자구나" 하며 동생을 다그쳤다. 두 사람은 다시 예수님께 갔다.
"선생님, 저의 형 시몬 입니다."
"어쩐 일이냐? 이렇게 이른 시간에…."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시몬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넌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정말 내 제자가 되고 싶으냐?"
"네, 진심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너를 게파라고 부르겠다."
"게파요?" 게파는 베드로, 즉 바위라는 뜻이었다.
"…그럼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시는 것이죠?"
이렇게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첫사람이 되었다.
실제로는 베드로보다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먼저 만났기에 초대교회는 안드레아를 "첫번째로 선택받은 사람"으로 불렀다.
안드레아는 그의 형인 베드로의 후광에 가려있지만 그 역시 주님을 따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적극적인 제자였다.
그는 예수님께 사람들을 많이 모아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그의 형인 베드로 뿐만 아니라 고향이 같은 필립보와 나타나엘도 소개했다.
전도를 하던 어느 날. 날은 저물고 광야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빵이 없었다.
그때 안드레아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이때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기적을 베푸셨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안드레아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이 점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형제이지만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우선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베드로는 다혈질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반면
안드레아는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안드레아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보면 친화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분명히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조용하게 뒷전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쓸모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안드레아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숨은 봉사자였다.
또한 안드레아는 개방적이고 미래적 안목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안드레아는 이방인인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요한 12:20-22).
이방인을 멸시하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 같은 생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안드레아란 말은 희랍어에서 유래되었다.
사내답다는 의미다.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그는 살았다.
초대교회 박해가 시작될 때 바리사이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사람은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리파였다.
그는 유다인들의 호의를 얻고자 초대교회를 억압했던 것이다.
베드로를 투옥했고 야고보 사도를 처형했던 인물이다.
안드레아도 투옥되었지만, 법정에서 매를 맞고 풀려났다.
이후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로 가서 선교했다.
로마의 박해가 그리스까지 확대되자 남쪽의 항구도시 파트라(Patras)에서 체포되었다.
혹독한 심문 끝에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중세 이후 안드레아 사도는 X형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전승이 첨가되었다.
X형 십자가를 선택한 것은 희랍어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였기 때문이라 한다.
사도는 러시아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남부 러시아에서 선교했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한편 스코틀랜드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 일부가 4세기경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사도에 대한 신심이 확대되었고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국기에 새겨진 파란 바탕에 흰 X자는 수호성인 안드레아를 상징하는 표시다.
사도의 유해는 357년 파트라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가 1208년 남부 이탈리아의 아말피(Amalfi)로 옮겨진다.
이곳의 성 안드레아 성당에 모신 것이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리스 정교회와의 친교를 위해 사도의 유해를 다시 파트라로 보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드레아 축일은 11월 30일이다.
기원후 60년 11월 30일 파트라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사도 안드레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을 위해 죽은 위대한 제자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