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과부의 헌금 (루카 21,1-4)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을 쳐들어와, 다니엘을 비롯한 네 젊은이를 뽑아 교육을 시켜 자신을 섬기게 한다. (다니 1,1-6.8-20)
1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2 주님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과 하느님의 집 기물 가운데 일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신아르 땅, 자기 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물들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넣었다.
3 그러고 나서 임금은 내시장 아스프나즈에게 분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4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이 잘생기고, 온갖 지혜를 갖추고 지식을 쌓아 이해력을 지녔을뿐더러, 왕궁에서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으며, 칼데아 문학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5 임금은 그들이 날마다 먹을 궁중 음식과 술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세 해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임금을 섬기게 하였다.
6 그들 가운데 유다의 자손으로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있었다. 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 10 내시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주군이신 임금님이 두렵다. 그분께서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셨는데,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못한 것을 보시게 되면, 너희 때문에 임금님 앞에서 내 머리가 위태로워진다.”
11 그래서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청하였다. 그는 내시장이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를 맡긴 사람이었다.
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감독관은 그 말대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15 열흘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이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과 술을 치우고 줄곧 채소만 주었다.
17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18 젊은이들을 데려오도록 임금이 정한 때가 되자, 내시장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앞으로 데려갔다.
19 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시다가,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가진 것을 다 넣었다고 칭찬하신다. (루카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니1,1-6.8-20)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2)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13)
다니엘은 자신을 감독하는 자에게 진지하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특정한 기간을 정해서 임금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는 자신과 이를 먹는 다른 친구들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흘 동안'에 해당하는 '야밈 아사라'(yamim asarah)는 문자 그대로 10일을 의미한다. 다니엘서 1장 14절과 15절에 열흘 동안 시험했다는 사실이 부가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열흘은 동료들과 다른 음식을 먹고 얼굴빛을 통해 그 결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그러나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는 자들보다 채소와 물만을 먹으면서 얼굴빛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주권자이신 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다니엘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했는지가 드러난다.
'시험해'에 해당하는 '나쓰'(nas)는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나싸' (nasa ;test,prove)의 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불변사 '나'(na; please)와 더불어 문장을 구성하여 '시험해 보십시오', '시험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정중한 청원의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특정 기간동안 특정한 대상에게만 시범적으로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여 그 조치에 따른 결과를 조사해 본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채식을 주어 먹게 하시오'
'채식'에 해당하는 '핫제로임'(hazeroim)의 원형 '제로아으'(zeroah)는 씨를 뿌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자라으'(zara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씨를 뿌려 싹을 내는 것, 또한 씨를 맺는 곡물 종류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야채(vegetable)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과 생선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곡식류 및 그 곡식으로 만들어진 빵과 과일류까지 다 포함한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이 입증된다.
이어서 다니엘은 포도주 대신에 물을 줄 것을 청원한다. 다니엘서 1장 8절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술은 이교도의 제사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으며, 방탕한 생활을 지양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위해 율법이 금하지 않은 술까지도 거부하며 오로지 물만을 마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13)
다니엘은 자신이 시험을 요청한 사안에 대해 자신감있는 태도로 말한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하심을 통해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진수성찬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과 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자신과 자기 친구들의 얼굴빛과 건강 상태가 다른 동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임을 확신한다.
여기서 '비교해 보시고'에 해당하는 '웨예라우'(weyerau)는 '마르예'(marye; '얼굴')의 어원이기도 한 동사 '라아'(raah; '보다')의 수동태 3인칭 복수로 '(젊은이들의 용모와 저희들의 용모가) 보일 것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얼굴빛과 건강 상태는 감독관이 면밀히 살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이러한 자신감은 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대로 행한 후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바빌론 감독관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서 '하십시오'에 해당하는 '아세'(aseh; deal,treat)는 번역 그대로 행하라는 의미인데, 문맥에서는 '처분하십시오'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러한 처분은 음식에 관한 결정권뿐 아니라 다니엘과 그 동료들에 대한 징계도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니엘의 자신들에 대한 처분에 대한 의탁 역시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않아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자신들의 신앙의 정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도 있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21,1-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4)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마당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실 때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셨던 곳으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고, 여인의 뜰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의 홀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안의 회중석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사제들의 뜰은 성전 안의 제단에 해당하는 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들 성전의 네 지역에서 헌금함은 바로 여인의 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시다가 갑자기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당신의 시야에 들어와 보시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 '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통찰력으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21장 4절에서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정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는 두 대상의 형편과 관련된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 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 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부자들의 경제적인 상태가 흘러 넘칠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재물 중에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과부의 철저하게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어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과부는 너무나 빈곤한 가운데 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마저 모두 바쳤고, 이것은 그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부는 양적인 면에서 부자의 헌금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 양의 개념에 있어서 흘런 넘치는 부자의 헌금보다 더 귀한 것을 바치는 자들의 마음과 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부자한테는 있으나마나한 헌금과, 과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헌금의 가치를 절대적 양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바치는 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은,
그 과부가 바친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과부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쳤다는 것이 칭찬의 이유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 바쳤다는 것이 칭찬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어떤 사람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쳤다면, 그것을 칭찬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이지만,
온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가난한 과부’의 마음은 본받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일만 흉내 내는 위선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일은 부자들을 꾸짖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온 마음’을 바치지 않고, ‘마음의 일부’만 바쳤음을 뜻합니다.
(가진 것의 일부만 바쳤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일부만 바쳤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들의 ‘마음의 다른 부분’은 어디로 갔는가?
여러 가지 복잡한 세속의 일에 그들의 마음이 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속에는 하느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온 마음’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부자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마음의 일부 밖에는 바칠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잡다한 것들이 자리 잡는다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깨끗한 마음으로 시작하더라도,
그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즉 마음속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악령 같은 것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지게 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애착심, 또는 세상일에 대한 걱정들이
마음속에 가득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마치 악령이 마음속을 점령한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 들린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악령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지배하면,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예수님)만이 자기의 마음을 점령하시고 지배하시도록
하느님(예수님)께 ‘온 마음’을 내어드리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봉헌’은 ‘일치’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님께 바치는 일은,
주님의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희생’도 아니고, ‘희생’이 따르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 나를 드리는 일은 ‘사랑’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무의식중에 부담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가?
바친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가장이라면 가족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진 것을 다 바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되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은 ‘가난한 과부의 마음’과 같지만,
그 과부처럼 행동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니,
괜히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뭔가 많이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헌금’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가난한 과부’처럼 온 마음과 사랑과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이라면,
가진 것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바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니 각자 형편에 맞게 바치면 됩니다.
(우리가 기꺼이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고,
‘부담감’이 아니라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못하는 일인데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빈곤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입니다. 부자들이 넉넉한 데서 얼마씩 예물로 바쳤지만, 가난한 여인은 동전 두 닢만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쳤다고 칭찬하십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날에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정성이 많이 들어간 선물이 더 기쁘고 고맙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액수보다도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께 선물을 드려야 합니까?
첫째는, 기꺼이 드려야 합니다. 체면 때문이나 과시하려는 자세로 헌금을 낸다면 그 가치는 절감될 것입니다. 반면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헌금을 한다면 그 가치는 배가될 것입니다.
둘째는, 어느 정도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들은 자신들의 여유분 중에서 아주 일부분만을 내었지만, 여인은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놓았습니다. 부자들은 헌금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을 받지 않지요. 반면 여인은 당장 끼니 걱정부터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여인의 헌금이 훨씬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참고, 절약하고 희생하여 바치는 헌금이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은 헌금만이 아닙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능, 그 밖에도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주님께 봉헌하는지, 이 점을 성찰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