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금요일]성전 정화 (루카 19,45-48)

유다와 그 형제들은 적을 무찌르고 성소를 정화하여,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그날, 새로 만든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단 봉헌을 경축한다. (마카 상 4,36-37.52-59)
그 무렵 36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산으로 올라갔다.
52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 53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54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
55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56 그들은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다. 57 또 성전 앞면을 금관과 방패로 장식하고 대문을 새로 만들었으며, 방에도 모두 문을 달았다.
58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59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해마다 그때가 돌아오면,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부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로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 (루카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제1독서 (1마카4,36-37.52-59)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36)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 산으로 올라갔다. (37)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카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 (52)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53)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54)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55)
마카베오 상권의 제2부인 마카베오 상권 3장 1절~9장 22절은 유다의 공적을 다루고 있는데, 오늘 독서가 들어있는 마카베오 상권 3장 1절~4장 61절은 유다의 초기 승리들을 다룬다.
덕분에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아 새로 봉헌하게 된다. 유다를 소개하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시를 인용한 뒤에(1마카3,1~9), 저자는 아폴로니우스(사마리아 통치자)와 벳 호론에서 세론과 싸워 이긴 놀라운 승리를 기술한다(1마카3,10~26).
유다는 자기가 승리하는 것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돌린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크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에 달려 있다."(1마카3,19)
안티오쿠스 4세는 돈을 모아 오기 위해 페르시아로 가면서(1마카3,27~31) 리시아스에게 예루살렘에 군대를 보내어 거기에 남아 있는 자들을 없애버리라는 임무를 맡긴다(1마카3,32-27). 그러나 유다는 엠마오에서 리시아스의 장수들인 고르기아스와 니카노르를 무찌르고 (1마카3,38-4,25), 이어서 벳 추르에서 리시아스 마저 퇴각하게 만든다(1마카4,26-35).
이 전투에서 유다의 군인들에게 표어가 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상태이다. "성소는 짓밟히고 성채는 외국인들에게 점령되어 이민족들의 거처가 되었다"(1마카3,45; 3,50ㄴ-53).
게다가 유다는 율법에 따라 행동하며 성서의 인물들의 본보기를 따른다. 마카베오 상권 3장 56절을 보면 유다는 신명기 20장 5~8절에서 명하는 대로 전투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마카베오 상권 4장 9절에서 유다는 얼마 되지 않는 자기 군사들에게 "파라오가 군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을 때, 우리 조상들이 홍해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상기하여라." 라고 말한다.
그들은 엠마오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하늘을 향하여 찬미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1마카4,24).
유다는 리시아스와 싸우기 전에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께서 다윗의 손으로 거인 골리앗의 공격을 물리치시고 요나탄의 손에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넘기셨던 사실을 상기한다(1마카4,30; 1사무14장,17장참조). 유다는 전형적으로 성서적인 전사이다. 그는 승리를 위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에 기댄 사람이다.
유다의 초기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한 일이다(1마카4,36~61). 유다와 그의 병사들은 시온 산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이 형편없이 황폐해진 것을 발견한다(1마카4,36~40).
유다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성채 안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게 한 뒤에 흠이 없는 사제들을 뽑아 성전 예배를 복구하고, 더러워진 번제 제단의 돌들을 제거하고 제단을 다시 쌓으며 거룩한 기물들을 새로 만들게 한다(1마카4,41~51).
그런 다음 기원전 164년 키스레우 달 스무닷샛날(12월 14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친다(1마카4,52~53).
곧 이민족들이 성전을 더렵혔던 바로 그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회중과 함께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는 새 하누카('봉헌'을 뜻함) 축일을 지낸다. 그 결과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1마카4,58).
유다의 지도력의 첫 단계는 예루살렘 성전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고 성채 벳 추르(예루살렘 남쪽 약 29km지점에 있음)의 수비를 강화한 것이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5-46)”
당시에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서로 결탁해서,
성전에서
장사를 하면서 엄청난 폭리를 취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장사를 한 품목은,
제물로
바칠 짐승들과 성전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었기 때문에,
성전 예배를 하러 온 신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비쌌고, 장사를 해서 얻은 수익금을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나눠 가졌기 때문에
성전에서의
장사는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워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었고,
따라서
하느님과 성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사야서
56장에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7).”
성전은
하느님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당시의 성전은
하느님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백성들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곳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장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7,9-11).”
“내
이름으로 불리고 너희가 그토록 의지하는 이 집에,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내가 실로에서 한 일과 같은 일을 하겠다.
내가
모든 형제를, 곧 에프라임 후손을 모두 쫓아낸 것처럼
너희를
내 앞에서 쫓아내겠다(예레 7,14-15).”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일은,
예레미야서의 예언을 실현시키신 일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했는데도 당시 사람들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
이 의문에 대해 세 가지 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힘이 없어서. - 당시의 일반 백성들은 ‘힘이 없어서’
교회
권력과 기득권층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것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래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더라도, 힘이 없어서 어쩌지 못하면서,
메시아께서
오셔서 바로잡아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르 11,18).
2)
몰라서. - 사람들 가운데에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옳지 않은 일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까 우리는 그냥 따를 뿐이다.” 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몰랐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선’과 ‘악’을 판단하지 못하고,
악행을 따른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입니다.
3)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전에서 팔고 있는
물품의
값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값비싼 물품을 사서 하느님께 바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바치는 신심이 아니라,
물품의 비싼 가격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바치는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들.)
물론
그런 심리를 악용해서 폭리를 취하는 장사꾼들과
그런
장사꾼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제들이 더 나쁘지만,
현세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면서, 성전에서 팔고 있는 값비싼 물품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구입한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들은
착취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장사꾼들과 한통속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파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7-48).”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일은 일종의 종교 개혁과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사제들의 권위에 큰 손상을 입힌 일이었고,
기득권층을
정면으로 공격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회개하기는커녕
더 큰 죄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죽인다는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지만 죽이는 방법은 정해지지 않아서,
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지만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기득권층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은 바로 배반자 유다입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방도를
함께
의논하였다.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유다는
그것에 동의하고, 군중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루카 22,4-6).”
예수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정화하려고 애를 쓰셨는데,
제자인 유다는 바로 그 강도들과 한편이 된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기원전 200년경,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안티오코스는 유다교를 없애려고 갖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금지하고, 백성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며, 이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전마저도 그리스의 신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마카베오라 불리는 유다를 중심으로 항쟁한 끝에 기원전 165년 성전을 되찾고는, 제1독서에서 보듯이 성전 제단을 다시 봉헌하며 제물을 바칩니다.
유다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으려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요. 그런데도 세월과 함께 점점 세속적이고 정치적으로 흐르면서 신앙심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들이 순례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악용하여 온갖 폭리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이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꾸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순례자들의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담보로 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전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미는 이유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분위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말씀을 더욱 깨닫도록 도와주려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성전이 순수하게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 되어 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오늘 미사의 복음말씀 (루카 19,45-48)→대체(요한2,13-22)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4~16)
요한 복음 2장 13~25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제1차 성전 정화 사건과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유대인과의 언쟁 및 기적을 보고 믿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을 제1차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 후반에 제2차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마태21,10~18; 마르11,15~19; 루카19,45.46).
그런데 제1차 성전 정화 사건은 요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제2차 성전 정화 사건은 공관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유사한 두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상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된 후기 사건만을 기록한 반면에,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공관 복음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초기 성전 정화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 있었던 이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대인들의 종교적 부패상을 부각시키며, 예수님의 이들의 위선과 죄악상을 깨우치기 위한 새로운 역할이 필연적이었음을 보여 주려고 했다.
요한 복음 2장 14절의 '보시고'에 해당하는 '휴렌'(huren; found)는 '휴리스코'(hurisko)의 부정 과거이다. 이 동사는 그 무엇을 집요하게 찾다가 본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하거나 만난 것을 나타낸다.
시기적으로 이때는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첫 해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 안에서 자행되던 불법 행위들은 너무나 쉽게 목격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우연히 이러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성전'에 해당하는 '히에론'(hieron)은 '성소'(sanctuary), '성전'(temple) 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정관사 '토'(to)와 같이 쓰여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한다. '히에론'(hieron)은 성전 건물 그 자체를 가리키는 '나오스'(naos)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는데, 성전의 건물은 물론이고 마당(뜰)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예수님께서는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던 성전 마당의 이방인 뜰을 유심히 보셨다.
하느님께서 성별하신 이런 성전 영역 안에서 불법이 행해진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타락의 심각성을 보여 준다.
성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던 범죄는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을 팔며 돈을 바꾸는 일과 관련 되어 있다. 멀리서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희생 제물을 가져올 수 없어서 예루살렘에서 구해야 했다.
이 제물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고, 사제가 적격 여부를 심사했다. 비록 흠없는 제물이라 할지라도 멀리서 가져온 경우, 사제들은 쉽게 트집을 잡아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사제들은 가져갈 수 없는 제물들을 헐값에 사들여서 성전에서 비싼 값에 되팔았다. 결국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은 불합격을 받을 우려가 없어서 선호되었고, 대사제 무리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환전 행위는 많은 순례자들이 성전을 찾는 기회를 이용해서 매년 바쳐야 하는 성전세 반 세켈을 바치는 것과 관련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데, 이것은 이방의 군주나 우상의 얼굴이나 각명이 들어 있지 않으면서 순도가 높은 은으로 만들어진 세겔 주화여야 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이 주화를 바쳤다(마태17,27). 파스카 축제 약 20일 전부터 환전소가 예루살렘 성전에 설치되었고, 이때 환전 수수료는 12.5% 정도였다.
대사제 무리들은 자신들의 직권을 이용해서 이러한 일에 관여하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사제 무리들은 큰 부(富)를 누렸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2장 19절에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전'에 해당하는 '나온'(naon)은 2장 14절의 성전 경내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hieron)보다 좁은 의미로 쓰였는데, 이것은 비유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성도의 몸(1코린6,19), 교회(1코린3,16.17; 에페2,21)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성전은 바로 자신의 몸이며, 그분은 이것을 허물어 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안에서 행해지던 일체의 의식들이 이 땅에서 소멸되고 없어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업은 아무도 막거나 없애지 못한다는 중요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요한 복음 2장 20절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나오스'(naos)라는 성전은 '헤로데 성전'으로서 b.c.19년에 착공하여 a.d.46년에 이르러셔야 완공이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아직도 20 여년 가까이 앞둔 시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 2장 19절에서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위의 성전이 아니라, 인류 구속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어야 하는 당신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며,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은 사흘 안에 부활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강도의 소굴♡♡♡.-반영억 라파엘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