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목요일]하느님의 나라 (루카 17,20-25)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는 어떤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고 한다. (지혜 7,22ㄴ─8,1 )
22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24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5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29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30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사람의 아들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고 하신다. (루카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지혜7,22ㄴ-8,1)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4)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5)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6)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28)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30)
지혜서 7장 22ㄴ절 - 8장 1절까지는 '지혜의 본성'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된다.
첫째, 저자는 지혜서 7장 22ㄴ절-23절에서 지혜의 21가지 속성(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등등)을 밝히고, 이어서 지혜를 세상의 영혼(지혜1,7참조)과
동일시하여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민첩하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라고 한다.
그 다음 지혜서 7장 25-26절에서 저자는 '숨결', '발산', '광채', '거울', '모상'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지혜가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고 나면 지혜서 7장 27-28절에서 "지혜는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라고 하면서 지혜가 사람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그리고 지혜서 7장 29-8장1절에서 저자는 지혜가 지닌 우주적 차원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혜는 해와 별과 빛보다 빼어나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라고 지적한다.
또한 지혜에는 도덕적 차원도 있다.
그래서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묘사들은 지혜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해 실천적인 조언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부각시키고, 지혜를 우주적, 역사적, 도덕적, 신학적 의미를 가진 인격체가 되게 한다.
지혜는 분명 이스라엘의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여신이 아니다.
저자는 유일신 사상을 믿는 유다인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시며,
유일하게 참된 하느님이시라고 믿는다.
지혜는 정의나 자비처럼 기껏해야 하느님의 속성이다.
하지만 지혜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지혜가 여성의 특성을 갖는 것은 단순히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호크마'(hokma)와
그리스어 '소피아'(sophia) 명사의 성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혜는 여신 '이시스'(isis; 많은 학자들은 지혜서 7장 22-24절에서 이시스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을 제시한다고 본다)나 다른 여성 신들을 가리키는
유다인들의 용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의인화된 지혜의 속성들을
예수님께 부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콜로1,15-20; 요한1,1-18; 히브1,1-4참조).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7,20-25)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0ㄴ~21)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때'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의 실체에 대한 대답을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의 실체에 대해 모르고, 그 도래의 시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인식을
잘못하고 있음을 먼저 가르쳐 주신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모습'에 해당하는 '파라테레세오스'(paratereseos;
observation)의 원형 '파라테레시스'(parateresis)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즉 가시적 방법으로서의 '관찰'이라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는 표징들에 대한 관찰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 속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 어떤 징조가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대답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이 가시적으로 어떤 표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내어서 그 정확한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가운데 가시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시는
지극히 복된 나라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인간의 물리적 시각으로 확인되는 세상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미래에 당신의 재림을 통해 온전히 완성되어져
나타날 하느님의 나라를 부정하신 게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도래로 이미 이 땅 가운데 영적인 하느님의 나라,
즉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영적 무지와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여기서 '가운데에'에 해당하는 '엔토스'(entos; in the midst of; among;
within)을 '안에'(within)라고 번역하면, 하느님의 나라가 '개인의 내부에',
'마음 안에'라는 뜻이 되고, '가운데에'라고 번역하면, '너희 가운데에'
혹은 '이 세상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을지라도, 당시 예수님 앞에는
함께 동행한 제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후자가 더 타당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있다'에 해당하는 '에스틴'(estin; is)은 원형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이다.
이 시제는 하느님의 나라의 미래적 측면보다는 하느님의 나라의 현재,
즉 현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활동을 통해
현재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구원과 통치를 인정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이들 가운데 이미 임하고 있는 나라이므로,
바로 이 순간도 우리는 실제로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씀은, 어떤
표징이나 징조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나라는 인간 세상의 나라처럼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 세상의 나라는 어떻게 다를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3-5).”
하느님의 나라는 권력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일이 없는 나라입니다. 서로 섬기는 나라이고, 하느님의 통치권에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나라가 완성되는 때가 바로 ‘종말’입니다.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7,22).”
이
말씀의 뜻은, “종말, 재림, 심판의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갈망할 정도로 너희가
고난과 박해를 겪는 때가 오겠지만, 종말이 언제인지는 모른다.”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참기 힘들어도 그 날이 곧 올 것이니 잘 참고 견뎌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주인이 갑자가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6-37).”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는 종말, 재림, 심판이 먼 훗날의 막연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그 날이 닥치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너무 빨리 왔다고(너무 이르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루카 17,23).”
이
말씀은, 거짓 예언자나 가짜 메시아에게 속지 말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좀 더 자세하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광야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마라. ‘보라,
골방에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마태 24,23-26).”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가 나타나는 일은 늘 있는 일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루카 17,24).”
여기서 ‘번개’는 ‘빠름’과 ‘갑작스러움’이 아니라, ‘밝음’과 ‘누구나 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누가 그것을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나 가짜 메시아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왜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물을 수도 있는데,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들이니 고난과
시련을 각오해야 하고, 그런 일을 겪더라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힘든 일들을 피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집회 2,5-6).”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마음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우
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리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서 싹터, 나날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마음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나가고, 마침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다음으로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갑자기 너희 가운데 있으리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 시대가 다가온다면, 무서운 재난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징조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요.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시한부 종말론이 더 극성을 부립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며 성실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 안에서 싹튼 하느님 나라는 크게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