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약은 집사 (루카 16,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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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로마 15,14-21)
14 나의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 자신도 선의로 가득하고 온갖 지식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서로 타이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15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대담하게 썼습니다. 16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18 사실 다른 민족들이 순종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룩하신 일 외에는, 내가 감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19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20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21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에 관하여 전해 들은 적 없는 자들이 보고, 그의 소문을 들어 본 적 없는 자들이 깨달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자 영리하게 대처한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드시며,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고 하신다. (루카 16,1-8 )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제1독서 (로마15,14-21)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6)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5장 16절에서 21절까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선교 활동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로마 교회 신도들이 자신에 대해 좀 더 앎으로써
자신이 비록 그들과 얼굴을 대하지 못했지만,
편지를 써서 권면할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먼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일꾼으로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종'으로 번역된 '레이투르곤'(leiturgon)의 원형 '레이투르고스'(leiturgos)는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s)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에서 유래한 단어로
기본적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여 공적인 일을 행하는 사람'이며,
정치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70인역(LXX)에서 이러한 단어들은 거의 모두가 성전에서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직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특히 사제의 직무와 제사의식을
기술하는 단락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특히 하느님의 일을 위해 성별(聖別)된 자들에게 사용되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특별한 임무를 밝힌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자신의 직분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 인식했으며,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희랍 사람들이 종이 된다는 것을 치욕과 불명예로 생각한 것과는 대조가 된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종됨이 하느님의 복음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제직'에 해당하는 '히에루르군타'(hierurgunta)의 원형 '히에루르게오'(hierurgeo)는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다', 또는 '사제직 수행으로 봉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복음 선교를
마치 구약 시대의 사제와 같은 직무로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복음으로 얻은 이방인들의 열매,
즉 이방인 회심자들을 하느님께 신성히 바쳐 드리는,
즉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살도록 헌신케 하는
귀한 사목을 하고 있음을 자각했던 것이다.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
복음의 사제인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 드린 제물이
바로 다른 민족들, 즉 이방인들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가리켜서 이방인들이라는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제로서 표현한 것이다.
사제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이러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잘 아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과 이방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느님과 이방인들을 화해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먼저 하느님 밖에 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회심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회심한 이방인들로 하여금 거룩한 산 제사의 삶,
즉 하느님과 성령으로 통교하는 신령한 예배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로마12,1-2).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레위1,3).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흠없는 제물이 되게 하여
하느님께 기꺼이 받으시도록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룩하게 되어'로 번역된 '헤기아스메네'(hegiasmene)는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여 봉헌하다'는 뜻을 가진
'하기아조'(hagiazo)의 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 계속 지속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됨을 나타내는 시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거룩함이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에 강조점이 있다.
또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러한 거룩함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신적인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는 성령과의 관련성이 암시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1코린6,11).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며(사도2,38),
이 사람들은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됨'을 얻어 입음으로써,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흠없는 합당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6,1-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8ㄱㄴ)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오히려 더 큰 불의를
저질렀지만, 주인은 이 집사를 칭찬하였다.
여기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집사의 도덕적인 부분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하고 지혜롭게 처신한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불의한 집사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는 일에 인색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외에는 관심이 없는 '세상의' 집사들도
이렇게 교활할 정도로 민첩하고 영리하게 미래의 상황을 대처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느님의 집사들도 적어도
이 정도의 지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책망과 더불어
교훈이 이 구절에 담겨져 있다.
여기서 '영리하게'로 번역된 '프로니모스'(phronimos; wisely; shrewdly)는
'신중하게', '사려깊게'라는 뜻인데, 어떤 이익 등을 위해 약삭빠르고
신중하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복음서에서 사용된다.
불의한 집사는 위기에 직면하여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미래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지혜를 보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하느님의 임박한 종말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 이후에 거처하게 될 복된 처소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주어진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신속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지금까지는 집사를 수식하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본절에 이르러
'불의한' 이라고 번역된 '아디키아스'(adikias; unjust; dishonest)라는
단어를 쓴 것은 오히려 집사의 지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원형인 '아디키아'(adikia)는 주로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
(로마1,18)과 하느님을 거부하고 적대하는 죄(1요한1,9; 5,17)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의 이 집사의 불의는 그의 직책과 관련하여 나온 것으로서,
즉 마땅히 해야 할 집사직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인의 뜻에 불순종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도 빚을 탕감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물이 예전처럼 낭비되고 있기에
주인에게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사람이다.
하지만 집사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앞날을 대비하여 민첩하게 처신하고
있는 그 모습만큼은 영리한 대처이기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1-8).”
1) ‘약은 집사의 비유’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민첩하게 행동하는 약삭빠른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죄인의 행동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데,
이 비유는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에 신속하게 대비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이야기 속의 집사를 본받으라는 가르침은 아니고,
“너희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대처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굼뜨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은, 그 집사가 평소에 업무 수행을 할 때에는
민첩하게 행동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해고한 것인데,)
자기 먹고 살 길을 찾는 일에 대해서는 민첩하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주인의 칭찬은 약간은 비웃음이 섞인 칭찬이고,
좋은 마음으로 칭찬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신명기를 보면 동족에게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 23,20-21).”
그래서 집사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이자를 없애주거나 깎아준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빚진 사람들은 빚이 줄어들어서 좋아했을 것이고,
집사는 자기의 먹고 살 길을 찾았을 것이고,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었기 때문에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집사의 본래 의도는 옳은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다가오는 심판에 대비하려면 신속하게 옳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도 먹고 살 길을 찾으려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는 너희는
왜 옳은 행동을 하지 않고 미적거리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주인이 직접 이자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집사가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꾸어 주고
이자를 착복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주인이 알게 되어서
그를 해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사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자기가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행동이 될 것입니다.
몰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을 ‘회개’ 라고 볼 수는 없고,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한 잔꾀일 뿐인데,
그래도 어떻든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주인이 집사를 해고한 것을 취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심판 날이 되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고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집사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잘못된 것을 미루지 않고 바로잡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이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은, “불의한 집사도 먹고사는 일에 위기가 닥치자
자기가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데,
하느님의 심판을 알고 있는 너희는 왜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 됩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세속 사람들이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본받으면 안 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신속하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본받아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이 말씀은 성경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두 제자를 꾸짖으시는 말씀인데,
불의한 집사의 민첩함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굼뜸’이 대조됩니다.
우리는 믿는 일도, 믿음을 실천하는 일도 모두
망설이거나 미적거리지 말고 신속하게 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은 글자 그대로 마지막 심판이어서 더 이상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날에는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느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재산을 멋대로 낭비하자, 주인은 그를 불러 해고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이에 집사는 오히려 더 뻔뻔스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까? 부자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서 그 빚을 줄여 주며, 대신 집사인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한 것이지요.
따라서 집사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은 조만간 그가 해고된 다음에는, 그 신세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갚아야 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약고 뻔뻔스러운 집사입니다.
그런데 복음 후반을 보면 주인은 이상하게도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지요.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이라지만, 상당히 어색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집사가 착하거나, 나쁘다는 것을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위기에 처한 집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대책을 민첩하게 세우는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세속의 자녀들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약고 재빠르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부터 계획을 잘 세워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을 받아들이려면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편리한 것을 포기해야만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손에 꽉 쥔 채, 이를 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까?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작은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